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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EnerTravel 2023. 6. 1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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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작가 소개

 

197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블라디미르 티호노프(Vladimir Tikhonov)는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하면서 ‘박노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춘향전의 나라’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다가 생계를 위해 번역, 여행가이드, 통역 일을 하면서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되었고 이내 작가로 변신하여 우리 사회에 잔존해 있는 전근대적인 폐습, 군사주의와 국가주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일련의 책들을 출판하였다. 

 

책 소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역사에 관해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가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며, 지난 세월 동안 잘못 새겨왔던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근대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꿈꾸는 책이다. 특히 근대화의 과정에서 기성 권력들이 자신들의 편의상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버린 반란자들을 끄집어내어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 21세기 동아시아인으로 추구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제시한다. 그리고 지나친 민족주의, 권위주의, 미국 숭배주의, 남성우월주의 등 반드시 버려야 할 악습들에 대하여 끈질기게 작가의 관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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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줄거리)

 

[1부] 진흙 속의 연꽃: 동아시아 휴머니즘의 계보

 

1. 승려는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1) 불교의 호국(護國)은 승려의 참전이 아닌 왕이 삼보를 받들고 계율을 지킨다면 나라는 불•보살의 가피력(加被力)으로 저절로 지켜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불교는 그 출발점부터 국가(군사적인 호국)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2) 불교에 대한 시혜를 기대하는 전통이 강하였고 근대적 민족주의의 수용이 늦어서 일제시대의 승려들이 총독부에 복종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저항의 전통이 일천하여 계율에서 무기를 드는 것을 철저히 금함에도 불구하고 징집 명령에 거부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한국 승단의 모습이 생겨났다.

제도권 불교의 ‘국가 친화적 기질’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철저한 중앙집권적 관료행정과 동시대 지구촌의 다른 사회들에 비해 뛰어난 경쟁력과 종교집단에 대한 장악력이 세계 최고였던 한반도에서 불교계의 유일한 생존방법은 ‘순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이 가공해 놓은 ‘국가적 종교’였다. 원효가 태종무열왕이나 문무왕이 보살행을 닦아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 기대했던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즉, 원효는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멸망시키는 것이 승려가 할 일이 아님에도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와 달리 국가적 통제가 느슨했던 사회에서 살았던 혜원은 ‘종교 자유’의 씨앗을 뿌린 승려이자 정토신앙을 개척한 자, 그리고 수행처 루샨에서 30년이나 칩거하며 승려로서의 계율 지키기에 빈틈이 없었던 원칙주의자였다.

 

2. 유교적 좌파의 거두, 공의 사회 역설하다.

(1) 1970 - 1980년대에 ‘한국사회론’이 떠올랐다. 한국의 유교적 가족주의 사회에서는 학연•지연•혈연 위주의 사적인 네트워크가 지배적인 단위인 만큼 그 안에서 ‘상생의 관계’를 만들자고 했다. 이 논리는 명분상 유교의 미덕을 내세우나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왜곡된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불어 한국의 극우 언론들이 편애하는 ‘아시아 사치론’은 두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첫째, 2,000년 동안 서로 대립했던 다양한 사상을 포함하는 ‘유교’라는 복합적인 담론을 관학(官學) 성격이 짙은 일부 사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했다. 둘째, 보수성 짙은 왕조 사회의 관료와 선비만을 ‘유교’로 인정하고 진보성이 강한 많은 유교 사상가들은 무시하였다. 왕조•관료 중심의 수직적 통치 관행에서 벗어나고자 혼신의 노력을 했던 전통시대 동아시아 진보 유림들은 공정한 사회를 위한 투쟁의 표본을 보여준다. 특히 명나라 말기 진보 유림들은 환관 등 궁정 파벌의 비합리적인 사적 통치를 비판하고 공익적•합리적•사회 통합 지향적 정치 시스템을 제창했다. 당시 양심적 집단 동림당(東林黨)은 수직적 ‘위민(爲民)’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 ‘민(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국가 통제의 철폐와 민간인 교육 진흥을 요구했었다.

 

3. 니체보다 이지가 빨랐다

(1) 사람들은 질문한다. “개인주의란 바로 이기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냐?” 하지만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위해 연대할 줄 아는 주체적인 ‘개인’과, 오히려 기존의 인습에 매몰되어버리는 몰개성적 ‘이기주의자’는 정반대 개념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질문을 받는다. “개인주의라는 서구의 가치를 우리까지 수용해야 하는가?” 서구에 대한 선망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 서구와 일제 군국주의•훈육주의를 무조건 베끼면서 ‘근대화 세력’을 자칭해 온 남한의 주류가, 그들만을 위한 근대화 밑에 깔려 있는 서민•노동자들에게 복종이 아닌 자존•인격 의식을 싹 틔울지도 모르는 개인주의를 비하하기 위해 ‘서구적’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다. 그래서 과연 개인주의는 정말 서구만의 가치일까?

 

(2)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사회적 억압 안에서 지키려는 사상적 경향을 뜻하는 ‘개인주의’는 계급사회와 함께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제국에서 군대에 가느니 차라리 콜로세움에서 야수들에게 먹혀 죽겠다는 초기 기독교인이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무법의 춘추전국시대에 세상을 ‘인(仁)’으로 교화하려 했던 초기 유가 등 모두에서 일종의 도덕적 개인(개성)주의를 볼 수 있다. 와중에 ‘천고의 이단아’란 이름을 얻은 이가 있었으니, 중국 근세의 급진적 개인주의의 원조격인 이지(李贄) 선생이다. 그는 벼슬아치가 되어서도 벼슬아치이기를 거부했고 나중에는 이데올로기적 죄목으로 베이징의 감옥으로 잡혀 들어가기까지 했다. 이런 그의 이상(理想)이란 자신들의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진실에 기반해서 남과 교제할 줄 알며, 고립되지 않으면서 거짓이 없는 ‘열린 개인주의’였다.

 

(3)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각종 제도권적 습관이나 가치관, 지식, 세계관이 결국 우리를 지배하고 ‘제도의 노예’로 만든다는 비판은 19세기의 니체와 20세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가 등 비판적 지성인들이 해왔는데, 이지는 이미 명나라 말기에 ‘나’를 지키려면 외부의 이념 주입이나 훈육을 물리칠 줄 알아야 한다고 제창했다. 그래서 이지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권위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내가 과연 나답게 살고 있는지, 나대로 생각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4. 이슬람과 중국, 공존의 코드는 있나

(1) 공인된 ‘동아시아 사상’의 범주에 들어 있지 않은 신앙은 아예 동아시아적인 것으로 취급조차 받지 못한다. 수많은 중국인, 한국인, 이본인은 이슬람을 동아시아 문화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 속 처용의 원형이 신라 말기 경주를 드나들었던 이슬람 상인이었다는 학설이 보여주듯 이슬람 문화와 한국의 역사적 관계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역적으로 1,000년 이상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존해 왔다.

 

(2) 중국에서는 어땠을까? 송나라 시절, 이슬람 상인들이 화려한 모스크들을 전립 하고 연안 지대 관세청의 관료나 고을 원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 후 ‘색목인(色目人)’들이 정복자인 몽골인들을 보필하는 특권층으로 부상한 원나라 시절에는 중국에서 이슬람의 전성기였다. 공적으로는 일반 공민의 생활방식을 따라야 했으나, 사적 영역에서는 자유롭게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을 수 있었다.

 

5. 야수의 세상에서 평화를 꿈꾸다

(1) 안정적 조공 외교 덕에 국가 간의 무장 갈등이 비교적 드물었던 전통적 동아시아 출신의 지식인들에게, 무장 경쟁으로 끊임없이 준전시 상황을 연출하는 근대 유럽 열강의 호전적 세상은 끔찍한 야수의 세상이었다. 와중에 1880년대 초부터 관심을 끌게 된 ‘우리도 힘을 키우자’는 주장. 이 주장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이미 불평등 조약의 올가미에 걸려 관세장벽도 세우지 못하고, 왕조 말기의 극심한 부패와 민심 이반(離反) 속에서 조선이 과연 힘을 키울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 못지않게 지식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념이었다. 궁극적인 진리였던 유교적 원론 원칙 입장에서 무기는 ‘흉물’이며 전쟁을 벌이는 군주는 ‘폭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 유교적 신념이 강한 많은 온건 개화파나 개신 유림들은 당장은 부국강병이 중요하나 차후에 세계가 평화와 인의예지의 이념으로 돌아와야 한단 현실과 이상의 절충 논리를 펼쳤다. 이 같은 논리의 초기 사례를 한국 최초 근대 신문 〈한성순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강의와 오세창 등의 지식인이 만든 신문의 주된 관심사는 ‘부국강병의 비결’이었지만, 가끔 유교적 이상론의 입장에서 세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전쟁 없는 세상을 모색하는 논설도 실렸었다. 또한 익명의 필자는 ‘크고 작은 국가들이 세계적인 ’ 의원(議院)‘을 설립하여 국가 간의 모든 문제들을 ’ 국제법‘에 의거해 결정, 해결하자고 제안을 하고, 더 나아가 국제적인 ’ 세계 공공의 군대‘를 두어 ’ 천하의 난폭한 자‘들을 토벌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놀랍게도 유엔과 유엔의 평화유지군 등 2차 대전 이후의 국제 협력기관들을 예견하는 듯하다.

 

6. 조선, 량치차오에게 반하다

(1) 1899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 량치차오의 ‘애국론’이 소개되고, 조선이 주권을 빼앗기기 시작한 1905년부터는 ‘양계초 붐’이 일어났다. 근대 학교 설립자들은 그의 소설, 논문들을 한문독본으로 썼고, 신문•잡지들은 앞다퉈 그의 글들을 번역해 실었다. 차세대 문화운동가들도 그를 ‘근대의 교사’로 받들었다. 이것은 그가 근대 서구 이론들을 중국 고전에 빗대어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다는 점과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야망을 중국 애국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해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과거의 ‘백성’을 애국적인 ‘국민’으로 변모시켜 서구•일본처럼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의 사회진화론적인 논리는 조선 신지식인층의 집단 이데올로기로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국주의 국가들을 학습해 닮아야 한다는 논리가 결국 제국주의에 대한 지적인 항복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기 쉽지 않았다.

 

(2)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량치차오의 저술들은 대부분 금서가 되어 사라졌음에도 지식인들은 격분에 찬 ‘애시객(哀詩客)’의 논설을 은밀히 읽었다. “자유(즉 민족독립)는 천하의 원리”란 그의 말은 자유 없는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기도문이 되었던 것이다. 와중에 양계초는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었다. 1918년 연합국의 승리로 1차세계대전이 막을 내리자, 그는 중국 고문 자격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서구의 진면목에 눈을 뜨게 되는 ‘진리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사상의 근원지를 순례하는 기분으로 떠났으나, 마주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참상이었다. “자연의 파괴보다 인간의 파괴가 더 처참하고, 야만인의 파괴보다 문명인의 파괴가 더욱더 처참하다”는 말은 양계초의 명언이다.

 

7. 너희가 톨스토이를 아느냐

(1)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식민지 시기 말기까지 톨스토이 붐이 이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의 평화주의와 반(反) 국가주의의 원조로 잘 알려져 있는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세계적인 살육의 판도 속에서 한국 지성인들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근대 폭력성에 환멸과 절망을 느끼는 젊은 이상주의자들에게 살육과 증오가 없는 ‘대안적인 근대’의 길을 보여주었다. 또한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톨스토이의 존경의 태도에 한국 지식인들은 감탄했다.

 

(2) 국가와 폭력을 ‘과도기의 필요악’으로 생각하는 100년 전의 상당수 주류 사회주의자보다도 톨스토이가 훨씬 더 철저한 근대의 이단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그는 어떻게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 같은 군사주의적 ‘영웅’들이 대접을 받고 병역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의식되었던 개화기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지성계의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조선 초기 톨스토이의 숭배자 중 한 사람인 최남선이 있다. 그가 본 톨스토이는 금욕적인 생활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 미신이 아닌 이성에 근거한 신봉을 예수처럼 가르쳐준 종교인이었다. ‘영(靈)의 철학가 톨스토이’ 이미지를 만들려는 최남선은 톨스토이의 탈근대적 대안을 추상화하고 종교 화해서 병역거부, 국가에 대한 불복종 호소와 같은 그의 정치•사회적 핵심 사상을 빼버렸다. 그래서 〈소년〉과 같은 개화 잡지에서 나폴레옹의 ‘격언’과 톨스토이의 ‘교훈’이 나란히 공존하여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8. 전쟁을 넘어, 국경을 넘어

(1) 러일전쟁의 도래가 국민의 애국주의적 단결을 가져다주었다는 일본과 러시아 우파의 통념이 있는데, 양쪽이 전쟁을 일으킨 의도 중 하나는 후발 근대화가 불러일으킨 각종 사회 모순과 갈등들을 봉합하여 아래부터의 변혁 운동을 예방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변혁의 주체들은 ‘애국’의 주술에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헤이민신문〉은 진정한 적은 ‘자본주의와 군국주의’라고 외치며 어용적인 애국주의의 광란 속에서 러시아 동지들과의 계급적 연대를 주장했고, 러시아의 평화주의적 문호 톨스토이의 반전 평화 메시지 ‘반성하라!’를 싣는 등 일본 지식인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반항을 일으켰다. 레닌을 위시한 러시아의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 상당수의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한술 더 떠서 “가증스러운 러시아 전제왕권의 패배가 변혁의 길을 터줄 것”이라며 러시아의 패배를 공공연하게 환영하기도 했다.

 

(2) 1904년 8월 14일, 만주 벌판이나 뤼순에서 하루 수백수천 명의 생명을 빼앗는 살육이 자행되는 가운데, 암스테르담에서는 세계적인 사회주의자 연합인 제2인터내셔널의 제6차 대회가 열렸고, 주제는 ‘반전 평화’였다. 이 대회의 스타가 된 두 사람이 있었으니 러시아 대표 플레하노프와 일본 대표 가타야마 센이었다. 대회가 개막되자 의장이 두 사람을 가리키며 “정부들끼리 전쟁을 해도 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동지애를 갖고 전 세계 무산계급의 평화 지향성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이에 감동한 플레하노프가 가타야마에게 악수를 갑자기 청했고, 이 모습이 만장의 박수를 자아내며 두 사람의 포옹까지 이끌어냈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본 플레하노프와 기독교인이어서 비폭력주의를 주장했던 가타야마. 사회주의가 매개가 되어서 최초로 만나게 된, 모든 것이 완전 다른 이 두 사람은 결국 암스테르담 대회를 주목거리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사회주의의 이상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했다.

 

9. 붓다가 마르크스를 만날 때

(1) 붓다는 말했다. “승려는 왕궁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하고, 칼 찬 사람에게는 설법하지 말아야 하며 몇몇 필수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거나 탐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돈과 권력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동아시아는 붓다의 가르침과 국가•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에 국가와 자본에 맞선 불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몇몇 스님들이 일본의 초기 자본주의가 국내를 착취 공장으로, 이웃 나라를 처참한 전장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국민’이라는 환상의 벽을 뚫어 국가•자본주의와의 투쟁에 나섰다. 러일전쟁 반대운동, 노동운동 지원을 하였다. 또한 〈헤이민신문〉 초기 사회주의자 그룹 일원이었던 우치야마 구도 승려는 “군인들이여, 착취자 군대의 장교들에게 복종하지 말고 탈영하라!”라고 외쳤다. 이렇게 급진적인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1911년에 경찰이 조직한 ‘천황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 불교가 어용화되고 사회주의가 ‘반종교 운동’에 물드는 지난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붓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한 사람은 일본 불교 사회주의의 대부 세노 기로였다. 원래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했던 그는 농촌 소작쟁의를 중재하면서 계급적 질서의 폭력성을 체험한 뒤 점차 “마르크스와 붓다는 뿌리가 달라도 민중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휴머니즘은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소작인의 쟁의와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고 진보정당과 협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독특한 불교 사회주의 철학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일본의 경찰이 이런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절대 전향하지 않겠다던 세노는 오랜 고문 끝에 결국 전향을 하고 동맹했던 간부들과 조직원들이 줄줄이 검거되어 결국 조직이 와해되었고, 깊은 자괴감으로 세노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2부] 21세기를 휘젓는 20세기의 망령

 

1. 국적이란 움직이는 것

(1) 국적 포기자들이 사람들의 눈에 배신자로 비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역사 속에서 국적에 대한 의식의 원류를 찾아보면 몇 가지 사실이 발견된다.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소속’이란 의미의 국적은 한국사에서 최근 형성된 법적 개념이다. 늘 있어온 듯한 이중 국적 불허나 국적 상실과 같은 개념들은 한국 법제도사에서 기껏해야 반세기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와 반대로 18세기말 이전의 서구는 한 군주국의 장교로 복무했다가 조건이 안 맞거나 갈등이 생기면 경쟁 군주국에 가서 복무해도 누구도 ‘배신자’라 하지 않았다. 국가적 소속이 매우 상대적이었던 서구와 달리 동아시아에서의 국가 소속 의식이 매우 뚜렷했다.

 

(2) ‘국적 이탈자’에 대한 전통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부역(附逆)했다가 자진해서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간 자들은 역적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이탈’ 자체보다 적군에 대한 ‘부역’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또 명나라 환관으로 바쳐진 사람들이 나중에 사신으로 고국에 왔을 때에도 ‘이탈’ 보다는 환관이라는 계층에 대한 양반들의 멸시가 작용하여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이보다 이전시대에는 신민의 구분이 달랐다. 산둥 반도의 신라방이나 신라촌에 거주하며 일본과 무역을 했던 신라인은 신라에서는 신라 신민으로, 당나라에서는 외국 계통의 당나라 신민으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이중 국적의 회색지대는 개화기에도 존재했다. 타국의 국적을 가졌음에도 조국의 정치에 계속적으로 개입했으며, 외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일단 조선 신민으로 태어난 사람은 완전한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의식이었다.

 

(3) 현재 ‘국적’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게 만든 결정적 시기는 박정희 집권기, 특히 유신시대일 것이다. 일제식의 국가주의가 지속되도록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병역 의무를 기꺼이 이행하는 대한민국의 서량 한 국민과, 불온사상에 감염될 확률이 높아서 믿기 어려웠던 해외 동포 사이의 확실한 경계선을 긋는 ‘국적’의 개념을 만들었다. 한 예로 병영 국가에서 이루어진 국적 신성화 작업에 의해 한국 국적을 보유한 정상인 남자는 무엇보다 먼저 ‘군인’으로 규정되었는데, 병역 불이행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거나 ‘비국민적’ 행각으로 개념화되었다.

 

2. 힘센 백인종을 닮고 싶다

(1) 사람들은 신문•잡지•교과서 등의 권위적인 저술을 통해 외지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긴 했지만, 중화주의를 대체한 서구 중심주의적 세계관은 곧 서구•일본 저술에 대한 ‘믿음’을 의미했다. 미국 교과서와 일본 신문. 이것들은 믿고 따라야 할 새로운 사서삼경으로 미지 영역의 길잡이가 되고 말았다. 근대화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지도 모를 전범(典範)의 교체와 함께 세계의 위계적 분류법도 아울러 교체되었다.

그리고 1899년 일본의 사회진화론적 관학자 가토 히로유키는 말했다. “백인이라는 우월한 인종이 야만스러운 미개인들을 상대로 침략 약탈 전쟁을 벌이는 것은 결국 세계 전체의 진화를 촉진하는 자연도태 법칙의 발로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수많은 개화주의자들이 ‘과학적인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했다. “힘센 백인종을 모방하자!”

 

(2) 세계는 민족•국가 간의 경쟁 무대라는 게 그 당시 개화적 지식인의 상식이었던 만큼, 백인종이 강하고 우월할수록 위협적으로 느끼기도 했다. “물이 넘치면 밖으로 흘러내리듯 힘이 넘치는 집단이 곧바로 약한 집단을 침범하는 것이 약육강식•우승열패”라는 것은 유교를 대체한 사회진화론의 중심 원칙이었기에 모범은 곧 ‘위협’이었다. 특히 한반도에 인접해 있고 실제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여 침탈의 야욕을 가졌던 ‘백인의 러시아’에 대한 공포는 남달랐다. 당시 러시아에 기대려 했던 미씨 세력과 황인종의 보호자는 일본이라고 했던 1세대 개화파들이 대립하였었다. 하지만 러시아도 러시아지만 과연 일본이 황인들의 보호자였을까? 백인 공포증을 십분 활용하여 일제강점기를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호자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3. 관습이라는 적과의 동침

(1) 근대적인 지배층이 내세우는 위로부터의 종속적인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항할 세력이 없을 때, 기득권은 근대의 대표자가 되어 ‘구습’과 ‘폐습’을 자신만만하게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문명적 정체성도 세우고 바깥 후견인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었다.

 

(2) 오늘날 보수파의 선조에 해당하는 구한말의 친미•친일 개화파가 처음으로 여론 주도의 한 축으로 등장하고, 〈독립신문〉이 문명, 경쟁, 기독교의 기치를 처음 내걸었던 1896-1899년에 기득권의 모습은 달랐다. 그들의 현실적인 준거집단인 메이지 일본이 유교적 과거의 상징이 된 중국을 청일전쟁에서 대패시킨 후 고종이 서구 열강의 공사나 목사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

 

(3) 전장에서 싸울 줄도, 외국과 교제할 줄도 모르는 조선을 위해서 문명의 이치를 먼저 깨달은 〈독립신문〉 종사자들이 내놓은 개혁안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부조리뿐만 아니라 종래의 ‘관습’ 전체가 신생 개화지상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혁명가는 아니었으나 당대 관습 헌법의 반대편에 섰던 급진적인 문화 개혁가였음은 틀림없다. 1910년대에도 관습 헌법의 불화는 지속되었고, 민족 우파의 지도자가 된 송진우는 사상 개혁과 유교 타파를 외쳤고 기독교적 감상주의자 전영택은 남존여비 사상, 문벌, 가족 제도는 혁명을 일으켜 뇌수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관습에 대한 개화파 후예들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고유 풍습을 옹호하고 제사를 폐하려는 기독교인들과 서구 선교사를 비판했다. 뒤늦게나마 유교의 일부를 인정한 셈이다.

 

5. 민족자본이라는 말이 우습다

(1) 자본의 주인이 혈통이나 국적상 한국인이라고 해서 그것을 ‘민족’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예컨대 이라크 침략에서 미국 군수자본과 복구사업의 예산을 독차지한 기업들이 미국이란 국가를 이용하여 국가적 살육으로 횡재하였다 하여 그 자본을 미국의 자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늘 이윤을 추구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족’은 경쟁의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

 

(2) 100년 전 근대적 자본 맹아기 재벌의 대표자이던 안경수가 이끌었던 독립협회가 제도권 사학에서 민족주의 운동의 시초로 거의 신격화되었다. 한데 제도권 사학이 민족운동으로 그려낸 독립협회 회장의 꿈이란 사실 민족적 경계선을 훨씬 넘은 일본을 맹주로 한 황인 공동체였다. 당시 몰락한 가문의 서자였던 주변적 엘리트 안경수에게 일본의 신문명은 출세의 발판이 되었다. 조선과 일본을 왕래하며 일본 외무성에서도 신임을 얻은 그는 시간이 흘러 러시아 주도의 삼국 간섭으로 국제 정세가 변화하자 반일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형을 받기도 했으나, 이 덕분에 친일파가 몰락한 뒤에도 계속 양지에 남아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조선 최초 조선은행을 설립하고, 일본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야심 찬 사업가 생활을 영위했다. 이 점을 보아 그를 ‘매국노’라 일컫는 사람도 있으나 동시에 그가 대한제국의 군권 존속을 희망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매국노라 서술하기는 힘들다.

 

6. ‘사랑해요 미국’의 원조, 조병옥

(1) 이라크 파병의 결정의 뒷면에는 북한의 침략 가능성, 한국의 수출 경제, 미국 기관 투자 등과 관련한 미국의 협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더 근원적인 동기는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의 어버이다운 보살핌에 대한 한국 지배자들의 몸에 밴 충성심과 신앙적 믿음이었다. 미국과 ‘나’를 구별조차 하기 싫어할 정도로 내면적인 ‘숭미화’가 이루어졌었다. 개화기 때 숭미병(病) 증후군을 통해 정치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 있었으니, 1950년대 민주당 지도자로 중도 우파 라인의 원조 중 하나였던 조병옥이다.

 

(2) 조선에서는 서북 자산가의 후계자와 친분이 있는 고학력자 조병옥이었겠지만, 미국이라는 세계의 중심지에서는 일개 소수민족 출신의 가난한 손님이 뿐이었던 그가 미국으로부터 후광을 받으려 했던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계적인 엘리트들이 모이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자신과 미국을 일치시키는 데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 훗날 외교관으로서 미국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내면적으로는 ‘자유의 천지’를 또 하나의 본국으로 여겨,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라면 인디언들을 죽여도 된다는 논리를 펼치기까지 한다.

 

7. 교주님과 근대성을 생각하다

(1) 신흥종교에 열정을 쏟는 동아리의 교주의 빌라에서 작가는 충격을 받게 된다. 젊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교주의 “문선명에겐 늙은이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식구들은 젊은 피가 많아!”라는 교세 자랑 발언. 전도유망해 보이던 학생들이 왜 그 교단으로 가게 되고, 교주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또 일본에서는 1995년 3월 20일 도교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이 있었다. 독가스 제조 책임을 맡은 화학 석사나 옴진리교를 위해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한 젊은 건축가,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재판을 받았음에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던 고학력 인류학자 등 젊은 지성인들이 교주의 말만 듣고 대량 살인을 정당 방어로 믿게 되었을까?

 

(2) 위계 서열 전인 폭력•착취, 패거리 집단 안에서의 윗사람에 대한 맹종 때문에, 개인과 집단 ‘어르신’이 합리적인 횡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토양이었기 때문에 ‘교주님’들이 번성하기 훨씬 쉬웠다. 그리고 이 상황을 더 왜곡하는 것은 일반적 종교집단의 구조적인 문제들과 전전(戰前) 민족주의 청산의 미흡성이다. 성직자와 평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기 어렵고, 일부 교회에서는 출석하지 않은 신도를 반강제로 출석시키거나 배신자로 낙인찍기도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른과 아이를 기본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하여 개인으로서의 독립심과 자긍심을 길러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8.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들의 추억

(1) 학생이 교사를 때린 교권 침해 사건이 일어나면 곧바로 ‘충격적인 뉴스’가 되어 세상에 알려진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들에게 하는 ‘교육적 목적의 체벌’은 특별히 심한 경우가 아닌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한 학생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거나 평생의 상처가 될 수 있는 인격 모독을 해도 사회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렇듯 아래로부터의 폭력과 위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사회적 잣대가 매우 다르다. 간혹 하극상의 혐의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반면, 윗사람의 폭행이나 추행은 사랑의 매나 장난으로 여겨지고 처벌을 받지도 않는다.

 

(2) ‘상급자 체면 중시’, 이것은 ‘유교 유습’과 ‘일제 잔재’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야 할 진실은 일제강점기는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의 권위에 적극 도전했다는 시절이라는 것이다. 당시 개인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에 눈을 뜬 많은 학생들이 교권주의적 태도를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독으로 느끼고, ‘악질 교육자 배척 운동’에 나서며 스승답지 않은 스승의 ‘체면’을 구겨버리는 일이 많았다.

 

9. 독재자와 성웅의 그늘

(1) 현재까지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면서도 ‘깊이 읽기’가 제대로 안 된 정치인 중 하나가 박정희다. 당시 지배층은 지배층대로 박정희의 성공을 선망하고, 신분 상승의 꿈을 꿨던 피지배층은 피지배층대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 박정희의 ‘자아’는 어떤 독서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을까. 그의 숭배 대상은 누구였는가.

 

(2) 박정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이광수가 쓴 소설 《이순신》에 그려진 성웅(聖雄)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이광수가 그린 최악의 조선이라 칭한다. 그의 조선은 단순히 열등한 후진국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였는데, 불가치병 환자인 조선인들을 구출하려다 죽은 완벽한 인격자 이순신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그려진 인물이다. 일체의 조선인들이 사리사욕, 나태, 비겁함에 빠진 반면 풍악도 멀리하는 ‘성웅’ 이순신은 ‘의지할 것 없는 백성’에게 부모 이상의 구심점이 된다. 이것을 박정희는 성웅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도자가 우둔한 민초들을 뜯어고치겠다는 발상을 하였고, 국민들을 생산•폭력 능력을 갖춘 자본주의적 주체로 ‘개조’하는 데 사용한다.

 

[3부] 두 얼굴의 근대인, 잊힌 근대의 비극과 향기

- 해당 내용이 열 가지 정도 있으나, 비슷한 시대의 이야기도 있어 세 가지만 서술하겠습니다.

 

1. 이준 열사는 친일파였다?

(1) 헤이그 밀사로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이준 열사의 주요 학력은 친일 내각이 세운 법관양성소 졸업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 중 항일의 대열에 선 이들은 소수였고, 더구나 러일전쟁이 발발한 시점 이준은 “일본이 같은 황인종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러시아로부터 지켜주고 있다.”는 인식 하에 일군을 위로하는 의연금을 거두려고까지 했었다.

 

2. 계몽주의자? 군국주의자!

(1) 유길준은 해외 학위와 선진 지식을 권력 획득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남한의 ‘주류’에 의해 선각자, 계몽의 선구자로 기려져 왔다. 안창호는 유길준을 조선 민족의 모범적인 지도자로 섬기고 그의 흥사단 이름까지 본떠 사용하기도 했다. 유길준이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귀인들이 서울을 찾을 때마다 한성 주민들을 반강제적으로 환영식에 동원하는 등 행적이 결코 모범적이지 않았음에도 오늘날 교과서에는 그를 ‘근대화의 선구자’, ‘국민 계몽의 주역’이라 서술하고 있다.

 

(2) ‘경쟁’이라는 개념을 조선에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이었다. 그의 은사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든 ‘경쟁’이라는 번역어를 ‘경쟁론’이라는 글을 통해 도입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 개발 프로젝트를 예견하듯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에서 대규모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한 것도 유길준 등이 속한 실무 개화파였다.

 

(3) 유길준에 따르면 사람이 가장 신성하게 여겨야 할 두 가지 의무는 납세의 의무와 징병에 따라 군사가 되는 의무이다. 특히 후자를 강조했는데,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바랐다. 당시 서구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유길준은 자유주의적 입헌군주국을 이상향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인 모델로 삼았던 것은 메이지 일본이었다. 그는 이 의식을 모델 삼아 국가와 주군에 대한 무조건적 일본식 희생정신을 각인하는 것이 계몽이자 문명이라고 하였다. 과연 이것은 정말 계몽주의에 속하는 행동이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3. 영웅 최재형의 잊힌 전설

(1) 1980년대에 각광받았던 독립운동가는 오늘날 인기를 잃고 관변의 지원에 의존하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는 왜 그들에게 무관심하게 되었을까? 한 이유는 친일 예속 엘리트들에 의해 건설되다시피 한 남한에서 적지 않은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이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자본주의가 많은 이들에게 내면화된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주류 사학자들이 지금까지 독립운동사를 연구, 대중화해 온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충분한 검토 없는 ‘의거’의 사실만을 나열한 것. ‘민족’이라는 코드 뒤에 숨겨져 있는 복합적 정체성들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2) 고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최재형이라는 사람은 노비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점은 양반 출신 항일운동가처럼 ‘글발’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료들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끝자락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그를 ‘항일운동의 영웅’이라고 칭할 정도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직접 몸으로 뛰고 실천하면서 오대양의 오지를 체험하며 많은 가르침을 얻었고, 장사꾼이기는 하였으나 공공선을 중요시하여 고아원과 학교, 가난한 한인들을 위해 기부도 많이 하였던 최재형이었다.

 

[4부]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적 독재로부터의 탈주

 

1. 화랑들이 ‘변태’여서 부끄러운가

(1) 아유가이 후사노신이란 관학자는 화랑들을 동성애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애국충성의 화신인 화랑들이 변태를 업으로 삼았다 하니 우리에 대한 비하와 왜곡임이 자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동성애도 이성애와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하나의 사랑법이자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라는 진보된 생각을 가진다면, 아무리 아유가이가 악질적인 일제 학자였다고 하더라도 화랑들의 동성애 가능성을 일제의 조작으로만 볼 수 있을까. 상당한 순화 과정을 거친 후대의 자료만을 가지고 화랑을 논할 수는 없지만, 화랑들이 유교적 사학이 싫어할만한 방향으로 성을 즐겼을 것이리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2) 동성애에 대한 탄압의 정도는 교회 세력의 강약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그 역할을 한 것이 성리학이었다. 특히 성리학의 성왕인 세종은 궁중 동성애와 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그는 궁녀 사이의 ‘음란한 짓’을 근절하는 데 애썼다. 반면에 일본에서 동성애는 비록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훨씬 더 자유로웠다. 승려의 경우 ‘치고’라는 제자를 키우면서 색정을 풀었고, 사무라이의 경우 특별히 어여쁜 시동과 사랑의 꽃을 피웠다.

 

2. 조선시대 섹시녀의 기준

(1)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통념’이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통념이 되어 당연하게 들리기를 갈망했다. 기존의 지배 관계를 은근히 정당화하는 수많은 통념이 행동 양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살 빠졌다”는 어느새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예뻐졌다”와 동의어가 되었다. 또 뚱보를 조롱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은 물론, 유아를 위한 동화책에서도 악당들은 자주 뚱뚱하게 묘사된다. 특히, 날씬한 여성이 바로 여성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남성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여성들에게도 상식인 것이 현재의 비극이다.

 

(2) 사실 날씬한 여성의 몸이 이상형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지금 섹시해 보이는 몸매가 과거에는 섹시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여성의 가슴은 섹시함으로 묘사되는 요즘과는 달리 예전에는 산아•육아 능력의 상징이었다. 한국과 중국에서 고전 한시 중 가슴의 섹시함을 찬미하는 시가 단 한 수도 없다. 반면 일제강점기의 매체는 여성의 풍만을 다루는 시각이 이중적이었다. 

 

(3) 조선의 미인은 오늘날 말하는 각선미나 날씬한 몸매를 가지지 않았었다. 오히려 적당히 풍만한 체형을 가진 여인들이 인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은 풍만한 여체를 선호하는 반면, 동시대의 일본이나 중국은 조금 야윈 체형을 미인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남성에 대한 것은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오직 여성에게만. 여성에게 요구되는 구체적 외형은 달라도 어느 시대에서나 남성은 자신의 욕구를 여성에게 강요하였다.

 

3. 국제결혼은 애국심을 죽이는가

(1) 국제결혼을 두고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두 사람의 개인적 일인 결혼이 왜 현대판 노비문서인 여권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인 관심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과거의 예로 1990년대 초반까지 남아공에서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혼인, 더 나아가 성관계까지 금지했다고 한다. 극단적 사례이나 근대의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넘는 사랑’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 국경을 넘어 사랑을 맺는 국제결혼은 ‘여권 색깔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결합’으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닌 나라 간의 문제로 언어상 규정이 되어버렸다. 이 용어는 사실 메이지 일본이 만들었는데, 이것을 때로는 국민을 살리는 방법으로, 때로는 반국민적 행각으로 치부했었다. 정반대의 이 두 가지 논리는 사회진화론이라는 공동의 이념을 기반으로 삼았다. 왜소한 체구의 일본 인종은 생존경쟁에서 패배할 확률이 높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등 인종’들과 피를 섞고자 했고 일본인과 서구인의 국제결혼을 장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단일민족’을 추구하는 보수파와의 갈등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의 엘리트가 보수화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뒤에는 ‘단일 순수 혈통 민족’의 이데올로기가 지배 담론으로 자리를 굳혔고,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았다.

 

4. 여걸들의 자유분방도 기억하라

(1) 남성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등의 영역에서 족적을 남긴 여성이라면 대개 단순한 ‘희생자’로 보려고 하는 시각이 강하다. 명성황후 민비가 거의 20년 동안 국운을 좌우하던 사람이었음에도 ‘민비’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일본인에게 시해당하는 ‘희생’의 장면이고, 유관순의 보편적 이미지 역시 일본인들에게 고통받고 장렬하게 죽은 민족 수난의 상징이다. 여성은 줄곧 주체가 아닌 비참한 희생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2)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은 남성을 위한 나라였다. 오늘날의 가부장적인 억압까지도 당연할지 모를 전통의 유산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기생 제도는 보통 여성을 향락의 도구로 삼는 가부장제의 억압 기제로 묘사된다. 이 제도가 여성들을 양반들의 풍류의 객체로 만들고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 인권을 유린했음에 틀림없다. 와중에 조선 양반들을 고매한 선비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인데, 사실 수많은 선비들은 《춘향전》의 변사또 못지않게 관가에 예속된 여성들에게 잔혹했다고 한다.

 

(3) 문학작품을 통해서 본 조선의 기생들의 모습은 현실과 달리 훨씬 주체적이며 적극적이다. 경제적 빈궁함과 가부장적 억압의 한계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유교적 규범이 진취적 여성의 무기가 되기도 했다. 한 예로 18세기경 고전 소설 《옥단춘전》의 주인공 평양 기생 옥단춘은 기생 명단에 매여 있으면서도 자신을 ‘공부하고 수절하는 처녀’로 여겨 벼슬아치들의 수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5. 민족의 상징, 섹시 코드와 만나다

(1)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은 세 명이 다 같은 성씨인데, 한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해외에서 성공한 스포츠계의 스타인 박찬호와 박지성은 ‘1등 신랑감’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아무리 1등을 많이 하더라도 박세리는 ‘1등 신붓감’으로 지칭하는 언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1976-1996년까지 한국인 선수들이 국제올림픽에서 따낸 금메달 중에서 여성이 따낸 메달은 40%, 그럼에도 스포츠계에서 여성은 늘 소수자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남자 선수들만큼 국민적 영웅이 되지 못한다.

 

(2) 일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체대 여학생과 여자 선수 사이에서 스포츠가 ‘여성성’을 가꾸는 데 장애가 된다는 편견이 아직 남아있다. 사회가 근육질의 여성을 바람직한 인생의 반려자로 보지 않고, 여성성과 근육질을 대조적 개념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또한 여성 근육질은 남성 관객의 눈요깃감이 되어 몸매, 섹시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 폭력성이 강한 대항전 종목의 여자 선수는 ‘요정’이 되기는커녕 ‘엽기’로 인식되기도 한다.

 

[5부] 근대의 유라기공원: 제국, 개인, 양심

 

1. 일본 신문, 피를 먹고 자라다

(1) 신문이 일본을 주도하는 힘으로 부상한 것은 ‘따라잡기’식 근대화 속의 국민 형성 과정에서였다. 획일적인 국민으로 묶는 데 물론 어느 근대국가에서든지 학교제도와 신문들이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의 경우, 정부의 통제 하에 언어•세계관 등을 신속히 통일할 수 있는 대형 일간지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학교 선생의 수업을 통해 통일시키는 것보다 대형 신문으로 지배하는 것이 빨랐다. 일본 정부는 공무원의 신문 구독을 의무화하고, 구독할 돈이 없는 이들이 와서 신문을 볼 수 있는 종람소를 세웠고, 1875년에는 ‘신문지 조례법’을 통해 매체의 반정부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 신문지상에서 전쟁의 피비린내가 나기 시작한 것은 실패로 돌아간 1874년 대만 정벌 때였다. 〈도쿄니치니치신문〉의 종군기자가 쓴 기사가 연일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다. 그 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1877년 동료들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선전적 전장 보도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전장을 ‘낭만적으로’ 묘사했고, 주요 일간지 기자들이 몰려들어 보도 경쟁을 벌였다. 특히 청일전쟁 때는 보도기관의 역할을 넘어 전쟁 히스테리를 부추기는 주체로 부상해 버렸다.

 

2. 일본 재벌은 어떻게 인정받았나

(1) 일본의 서민들은 재벌을 존경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벌에 대해 냉소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벌을 교활하고 부정부패와 돈세탁으로 얼룩진 멸시적이고 부도덕한 이미지로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존경하는 현대사 인물로 기업인들을 뽑기도 한다. 이것의 배경에는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던 군부, 정치인들에 비해 ‘모두의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것처럼 보인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이 비교적 양호한 정치인들로 비쳤다는 것, 그리고 한편으로는 약자를 주변 화하는 과정이 언론에 의해 은폐된 덕분이기도 하다.

 

(2) 한국 자본주의는 흔히 천민자본주의라 부른다. 그 이유는 기업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들 즉, 천민 출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적 재벌의 상징인 삼성가의 이병철만 해도 천선꾼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지역 토호인 그의 조상들이 그 마을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감상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를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뜬금없지만 저자가 한국사람이 아니란 점이었다. 솔직히 ‘박노자’라는 이름을 보면 나이가 조금 있으신 어른이 생각나지 않는가. 서양 사람이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깊숙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책을 쓰기란 여간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다음 놀랐던 점은 내가 역사에 대해서 표면적인 진실만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또한 아직은 좀 갇혀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이미 사회적 통념으로 인정받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시선으로 하나 하나 살펴보는 작가의 시선을 배워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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