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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EnerTravel 2023. 7. 2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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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사기열전』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저자 소개

 

사마천은『사기』의 저자로 섬서성(陝西省) 하양(夏陽)에서 출생하였다. 사마천이 7세 때, 아버지인 사마담이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太史令)이 된 이후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구해 읽도록 가르쳤다.

 

사마담이 죽으면서 부탁한 『사기』의 완성을 위해 BC 108년,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황실 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BC 104년(무제 태초 원년), 그는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하게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 황제인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해 BC 99년, 사마천의 나이 48세 되던 해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宮刑: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았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사기』 저술을 계속하였다.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 :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환관(宦官)신분으로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으며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를 완성한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사기』가 완성된 2년 후에 사망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책 소개

 

1) 사기열전이란?

『사기열전』은 총 70편으로 이루어져있다. 『사기열전』의 ‘열전’이란 말을 풀이할 때 ‘열(列)’이 배열이나 서술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데에 전문가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전(傳)’은 본래 경전의 주석을 가리키는 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두로 전해진 것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전기(傳記)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리고 『사기열전』은 서술에 있어 인물의 비중을 고려하여 안배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독자에게 극적인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대립되는 인물을 같은 편에 놓은 경우도 많다. 또한, 유사한 직업군을 한데 묶어 차례로 배치함으로써 인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2) 시대적 배경

『사기열전』는 시간적으로 2,000여 년을 포괄하지만, 이 중 과반수가 한(漢) 대의 것이다. 무제는 한나라의 제 7대 황제로서 고제(高帝), 혜제(惠帝), 문제(文帝), 경제(景帝)의 통치를 거치면서 중앙 집권 체제가 확고해졌을 때의 통치자이다. 이 시기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학술이 번성했다

 

『사기열전』가 완성되었던 시기인 한나라는 어떤 나라였는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나라는 ‘진(秦)’이었다. 진나라는 강한 군사력과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나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진나라가 멸망한 까닭은 황제를 비판하는 학자들을 땅에 묻고 책을 불사르거나(분서갱유(焚書坑儒)),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폭력적인 정치를 폈기 때문이다. 진의 힘이 약해지면서 곳곳에 새로운 나라가 생겨났고, 그 중 유방이 세운 ‘한(漢)’이 중국을 통일했다.

 

한나라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제 7대 임금인 무제 때는 흉노족은 물론이고 동월과 남월(베트남), 고조선을 정복했다. 이후 한은 서쪽으로 정복 전쟁을 이어갔고 중국과 서방의 교통로인 비단길(실크 로드)을 개척해 전성기를 이룬다. 하지만 이로 인해 경제 사정이 경제 사정이 나빠진 데다 외척들이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면서 점점 쇠퇴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킨 왕망에 의해 멸망당한다. 왕망은 나라의 이름을 ‘신’이라고 지은 뒤 황제가 되었으나, 그 역시 15년 만에 유방의 후손인 유수에게 멸망당한다. 이 때, 유방이 세운 한을 ‘전한’이라 하고, 유수가 다시 세운 한을 ‘후한’이라고 부르는데 『사기열전』는 전한 시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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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1) 백이열전(伯夷列傳)

이 편은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매한 인품을 허유(許由), 무광(務光)에 견주면서 그려나간다. 왕의 자리를 서로에게 양보하기 위해서 고죽국에서 달아나버린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에 도달하여 서백창(주나라 문왕)을 만나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서백창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이 부(父)의 장례를 치르지 않고 전쟁부터 하려고 하자 백이와 숙제가 무왕을 막는다. 허나 결국 주나라가 천하를 평정한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곡식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나 뜯어 먹는다.

 

공자曰: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 (온 세상이 혼탁하면 청빈한 사람이 비로소 드러난다.)

 

2) 관•안열전(管晏列傳)

이 편은 춘추 시대 제(齊중)나라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① 기원전 785년 제나라 양공(襄公)이 피살되자 소백(小白)과 규(糾)는 서로 군자가 되기 위해 다툰다. 그 때 포숙(鮑叔)은 소백을 보좌, 관중은 규를 보좌했다. 규는 관중에게 군대를 인솔하여 소백을 막도록 했고, 관중은 활을 쏘아 소백의 허리띠를 맞혔다. 그 뒤 소백은 먼저 제나라로 가서 군주가 되는데, 이가 환공(桓公)이다. 환공이 즉위한 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여 경(卿)이 되도록 했고, 이를 소백이 받아들인다. 관중은 40여 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춘추 시대 최고의 군사(軍師)로 꼽힌다.

② 안영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등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30여 년 동안 자리에 있으면서 제나라를 중흥시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그는 때때로 군주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았던 명재상으로서 내치에도 뛰어났고,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았고, 옷 한 벌로 생활할 만큼 검소했고 직언을 서슴지 않은 명재상이었다.

 

3)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이 편은 도가와 법가의 학술 원류를 다루고 있다. 한나라 초기를 지배하던 사상은 겉은 도가요 안은 법가였으며 《사기》 집필 당시 왕인 무제도 겉은 유가요 안은 법가였으니, 실상 법가를 숭상한 진(秦)나라의 사상적 맥락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① 노자(老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자는 담(耼)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실을 지키는 사관이었다. 그는 도(道)와 덕(德)을 닦고 학문을 스스로 숨겨 명성을 없애는 데 힘썼다. 이러한 그를 사마천은 공자보다 나이가 많고 예(禮)에 밝아 공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공자에 의해 극찬을 받았다고 보았다.

②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흔히 도가 사상 또는 노장 사상이라고 한다. 노자의 학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장자(莊子)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초나라 위왕(威王)은 장주(壯周: 장자의 이름)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했으나 장주는 거절한다.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③ 한비(韓非)는 한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형명과 법술(法術)의 학설을 좋아했으나 그의 학문은 황로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유가는 글로 나라의 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협객은 힘으로 나라의 금령을 어긴다고 생각하여, 한나라 왕이 법과 제도를 닦거나 인재를 등용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실속 없는 소인배(=유학자)를 등용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유세의 어려움을 겪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사마천은 법가 인물에 대해 비우호적이었고, 지나친 성과주의를 비판했다.

 

4)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

이 편은 사마(司馬: 군사 업무를 책임짐)를 지낸 양저를 다루었다. 그는 춘추 시대 말기 제나라 대부로 재상 안영의 추천을 받아 장군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자신의 신분에 비해 높은 자리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당시 제나라는 군사적으로 매우 불리했는데, 사마천은 사마 양저에 대한 경공의 신임과 장가(莊賈)와의 갈등 양상을 그려 나가면서 문무(文武)를 두루 겸비한 인물로 묘사한다.

 

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이 편은 세 명의 뒤어난 병법가 손무(孫武), 그보다 100여 년 뒤의 후손 손빈(孫臏), 오기(吳起)의 이야기에 방연(龐涓)을 덧붙인 것이다. 그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저명한 군사가이자 병법가로서 그들의 저작(『손자병법』)은 후세에까지 전해진다.

① 손무는 제나라 사람인데, 병법으로 오나라 왕 합려(闔廬)를 만나게 된다. 합려는 군대 지휘 능력을 보기 위해 ‘부녀자’로 시험해 볼 것을 손무에게 제의한다. 손무는 부녀자들에게 ‘약속’을 공포하고 부월(鈇鉞)을 마련해놓고 여러 차례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약속’에 따르지 않는 부녀자(왕이 총애하는 희첩) 두 명의 목을 벤다. 그 후, 불평 없이 진행되고 손무는 합려에게 이제 군대는 잘 갖추어졌으며 실제 사용을 강조한다. 그 후, 손무는 장군이 된다.

② 손무의 후손 손빈은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위(魏)나라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나 능력이 뛰어난 손빈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형벌을 내리고 숨어 살게 한다. 그 몸으로 손빈은 제나라 사자를 설득하여 제나라로 가고, 장군 전기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그의 군사가 된다. 그가 낸 계책을 통해 제나라는 위나라 군대를 두 차례나 격파한다.

③ 위나라 사람인 오기는 장군이 되기 위해 자신의 아내(제나라 사람)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으나 병사를 다루는 일만큼은 ‘제일’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위나라 재상이 되지 못하고, 전문 재상의 후임인 공숙(公叔)으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결국 그는 초나라로 떠나고, 그 곳에서 재상으로서 임무를 다하나 종실의 대신들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태사공曰: 속담이 말하기를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행동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오자서(伍子胥)는 본래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고자 초나라를 등지고 오(吳)나라로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합려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뒤 오나라의 대부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에게는 월나라와 화친을 맺지 말고 멸망시켜 뒤탈을 남기지 말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오나라 왕은 오자서를 헐뜯는 간사한 신하의 말만을 듣고 그를 멀리하더니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든다.

 

7)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이 편은 공자의 제자 77명에 관한 내용을 실은 것으로 「공자세가(孔子世家)」와 자매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인용된 말은 대부분 『논어』에 있는 것이다.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도 즐거워하는 안회, 효성스러운 민자건(閔子騫), 덕행은 훌륭했으나 몹쓸병에 걸린 염경, 그리고 염옹, 염구, 중유, 영공, 재여 등 많은 제자들에 관해 썼으나 이 편에서 주목할 점은 공자의 애제자 안회(顔回)가 아니라 자공(子貢)에 관해 후반부에 상당한 편폭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8) 상군열전(商君列傳)

상군(商君)은 위나라 왕의 여러 첩이 낳은 공자로서 이름은 앙(鞅)이고 성은 공손씨(公孫氏)이며 그 조상은 성이 희(姬)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형명(形名)의 학문을 좋아하고 위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를 섬겼다. 공숙좌는 이런 그를 등용하지 않을 시 죽여야 함을 왕께 고하며, 상앙을 등용할 것을 간청하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상앙은 진나라로 떠난다.

그는 어진 이를 찾는다는 효공을 만나고, 효공은 그를 등용한다. 그 후, 위앙(=상앙) 법을 새로 개정하고 위에서부터 지키게 만들었으며, 진나라 장수로서 위나라 군대를 격파한다. 그러나 진나라 효공이 죽자 상군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밀고하여 도망치게 된다. 여관으로 도피한 그는 자신이 만든 법으로 인해 진나라에서 쫓겨나 위나라로 돌아가나 그 곳에서도 거부당한다. 다시 진나라로 돌아온 상앙을 혜왕은 그의 집안을 모두 죽인다.

 

9) 소진열전(蘇秦列傳)

이 편은 소진과 그의 두 동생 소대(蘇代), 소려(蘇厲)의 열전을 묶은 것이다.

소진은 동주 낙양 사람으로 스승을 찾아 동쪽의 제나라로 가서 귀곡선생(鬼谷先生)에게 배웠다. 유세를 하지 못한 소진은 가족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방에 틀어박혀 책(주나라 책 『음부』)을 공부한다. 이것을 통해 진나라로 가서 유세하려 하나, 상군이 죽은 뒤라 변론하는 선비를 싫어하는 진나라 왕은 소진을 등용하지 않는다. 그 후, 그는 연나라에서 유세하고 조나라 왕을 설득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각 제후들과의 맹약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이어 한, 위, 제, 초 여섯 나라 설득에 성공하고, 이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가 된다. 하지만 이런 그를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저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다니면서 ...”

소진이 죽은 뒤, 은밀히 제나라를 황폐하게 만들려고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연나라는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소진의 동생 소대, 소려는 모두 학문에 정진하였고, 후에 연나라 왕을 만나 소진이 예전에 하던 일을 이어서 하고 싶다고 전한다. 그러나 훗날 소려는 몸을 굽혀 제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연나라가 쇠퇴해가자 소대와 소려 모두 제나라로 망명하고, 그 곳에서 대우받는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할 당시, 소대는 연나라 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그 편지로 인해 다시 연나라로 가서 대우받고 제나라를 칠 일을 상의하여 마침내 제나라를 깨뜨린다. 진나라의 패악을 고하며 연나라 소왕이 진나라의 초대에 응할 것을 말린다. 그 후, 소왕은 가지 않았고 소대와 소려는 모두 타고난 수명을 누리면서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드날린다.

 

10) 장의열전(張儀列傳)

이 편은 연횡가들의 전기로서 장의(張儀), 진진(陳軫), 서수(犀首) 세 사람의 사적을 수록하고 있다. 연횡파는 합종파와 서로 날카롭게 대립되며 상대적이다.

위(魏)나라 사람인 장의는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종횡술을 배웠다. 학업을 마친 후 유세하러 제후들을 찾아갔을 때, 초나라 재상과 술을 마신다. 얼마 후, 재상은 구슬 도둑으로 ‘가난한’ 장의를 의심하여 수백 번 매질을 하나 장의는 ‘훔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세하지 못하고 먼저 등용된 소진을 찾아가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마침내 진나라로 간다. 한편 소진은 뛰어난 장의가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큰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 것을 자신의 사인(=가신)에게 말한다. 나중에 알게 되어 소진이 살아 있는 한,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조한다.

저(苴)와 촉(蜀)이 서로 공격하고 진나라에 도움을 청한다. 장수 사마조(司馬錯)는 촉나라를, 장의는 한(漢)을 치도록 설득하나, 진나라 혜왕은 사마조의 말에 따라 촉나라를 치고, 촉은 진에 예속된다.

진 혜왕은 공자 화(華)와 장의를 시켜 위(魏)나라 포양(蒲揚)을 에워싸 항복시키나 장의가 진나라에 말하여 그 땅을 돌려주고 정성껏 예우해주니, 위나라 또한 진나라에 상군(上郡)과 소량(小梁)을 바친다. 이에 혜왕은 장의를 진나라 재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위나라가 진나라를 섬기라는 장의의 의견에 따르지 않자 진나라 왕은 위나라 곡옥(曲沃)과 평주(平周)를 빼앗는다. 결국 위는 진을 다시 섬긴다.

 

11)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이 편은 지혜주머니라고 불린 저리자(樗里子), 저리자를 통해 혜왕을 만나 천하의 일을 언급한 감무(甘茂), 그리고 그 손자 감라(甘羅)의 전기를 다루었다.

① 저리자의 이름은 질(疾)이고 진나라 혜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그는 우스갯소리나 행동을 잘하고 지혜도 풍부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지혜주머니(智慧)’라고 불렀다. 그는 진나라 혜왕 8년에 우경(右更), 25년에 장군, 그리고 무왕과 소왕 시절에는 감무와 함께 좌승상, 우승상의 자리에 있었다. 저리자가 위나라의 포읍(蒲邑)을 치려고 할 당시, 호연(胡衍)과 만나 대화를 하면서 포읍 대신 피지를 치나, 항복을 하지 않자 그대로 또 돌아갔다.

② 감무는 하채(下蔡) 사람이다. 사거(史擧) 선생을 모시면서 백가(百家)의 술책을 배웠다. 진나라 혜왕 시절에는 장군, 무왕 시절에는 좌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한나라 양왕(襄王)이 공중치를 사자로 보내 용서를 구하고 진나라와 화친을 맺도록 만드나, 헐뜯는 이들로 인해 진나라에서 도망쳐 제나라로 가서 벼슬을 했다. 그 후,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받을 상황에까지 놓이나, 너무 현명한 탓에 재상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③ 감무의 손자인 감라는 열두 살에 진나라 재상이던 문신후(文信候) 여불위(呂不韋)를 섬겼다. 장경(張卿)을 연나라 재상으로 만들려 하나, 그가 원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던 문신후를 감라가 도와 장경이 떠나도록 만들었다.

 

12) 양후열전(穰候列傳)

진나라 무왕(武王)이 죽고 소왕(昭王)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선 태후가 섭정하고, 선 태후의 동생 양후(穰候)가 실권을 휘둘렀다. 양후 위염(魏冉)은 처음에 장군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 큰 공을 세워 양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양후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재상이 되어 백기를 장수로 삼아 한, 위, 제, 초를 차례로 쳐서 진나라의 세력을 더욱 키웠다. 세 번이나 진나라 재상이 되어 소왕이 서제(西帝)가 되도록 한 인물이다. 그러나 양후의 공과 권력이 커져 가면서 범저의 비방을 받고 소왕과 사이가 멀어지더니 결국 울분에 차 살다가 죽었다.

 

13)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① 백기(白起)는 미(郿) 땅 사람으로 병사를 다루는 데 뛰어나 진나라 소왕을 섬겼다. 그는 장군으로서 수차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면서 소와 시절 벼슬이 대량조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나라와의 전쟁에서 계책을 세워 식량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항복시켰다. 허나 그는 병이 들어 옮겨 다니니, 진나라 왕은 무안군(武安君:백기의 직책)이 자리를 옮기고 속으로 복종하지 않는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② 왕전(王翦)은 빈양 동향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병법을 좋아해 진나라 시황제를 섬겼다. 허나 시황제가 장군 이신(李信)의 말을 따르자 병을 핑계 삼아 빈양에 숨어 살았다. 결국 왕전은 말을 듣지 않아 진나라 군대는 패하였고, 시황제는 몸소 말을 달려 왕전에게 사과했으니, 그는 장수가 되어 형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왕전이 죽고 난 뒤, 그를 닮아 뛰어난 장수로 인정받은 손자 왕이(王離)는 항우(項羽)가 조나라를 도와 진나라 군대를 쳐 패배를 했다.

 

14)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이 편은 잡가들에 관한 열전이다.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두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었다.

① 맹가(孟軻)는 추(騶)나라 사람으로,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처음에는 제나라 선왕(宣王)을, 다음에는 양나라 혜왕을 섬기려 했으나 그들은 맹가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맹가는 물러나 〔제자〕 만장(萬章)의 무리와 『시』, 『서』를 순서대로 정리하고 공자의 사상을 서술하여 『맹자』 일곱 편을 썼고, 그의 뒤를 이어 추자(騶子)의 무리가 나타났다.

② 제나라에는 추자가 셋 있었다. 맹자보다 앞 시대 사람이자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위왕을 만나 벼슬을 구하고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여 성후(成侯)에 봉해져 재산의 인수를 받은 추기(騶忌), 다음으로는 음양(陰陽)의 소멸과 성장 그리고 변화하는 이치와 기이한 변화를 깊이 관찰한 추연(騶衍)으로 맹자보다 후대 사람이었다.

③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으로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어느 한 학설에 국한하여 배우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런 그를 혜왕이 재상 자리를 주어 예우해주려 했으나, 그는 평생 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④ 순경(筍卿)은 조나라 사람인데 쉰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나라에 건너가 학문을 닦았다. 그는 제나라 양왕 때 가장 나이 많은 스승이자, 세 차례나 좨주(祭酒)가 되었다. 이런 그를 누군가 참소(讒訴)하자 초나라로 떠났다. 순경에게도 제자가 있었으니, 이름은 이사(李斯)이다. 훗날 재상이 되었다.

 

1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제나라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조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위나라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 초나라 춘신군(春信君) 황헐(黃歇)은 선비를 기르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는데, 각기 식객 3,000여 명을 거느려 흔히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 불리었다.

맹상군의 이름은 문(文)이고 성은 전(田)이다. 그는 제나라 종실 대신인 전영(田嬰)의 서자로 빈객과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는 신분이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한결 같이 자신과 똑같이 식객들을 대우해주었다. 진나라 소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개 흉내를 내어 좀도둑질을 하던 식객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진나라 소왕이 맹상군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냈다. 그 때, 맹상군의 빈객 중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가 있으니, 그의 도움으로 진나라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사실 맹상군의 빈객들은 좀도둑과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처음에 부끄러워했으나 결국 맹상군을 구한 사람은 그들이었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맹상군을 따르는 자가 더 많아졌다.

 

1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이 편은 전국 시대의 네 공자 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었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과 지조 있게 끝까지 합종을 지키며 진나라에 대항하고 조나라에 충성을 다한 우경(虞卿)의 열전을 합쳐 놓은 것이다.

① 평원군 조승은 네 공자 중에서 가장 어질고 빈객을 좋아하여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대략 수천 명에 달하였다. 그에게는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이 하나 있었으니, 빈객이 떠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결국 애첩을 죽이고 절름발이에게 사과하니, 다시 선비들이 오기 시작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위협하자 왕은 초나라에 가서 합종 맹약을 맺도록 평원군에게 부탁했다. 이 때, 모수(毛遂)를 만나니, 모수는 자신을 천거하여 사신으로 나가 초나라 왕을 꾸짖고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과 말재주를 뽐낸다. 평원군은 그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② 우경은 짚신을 신고 어깨까지 걸치는 행이 긴 삿갓을 쓰고 와서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에게 유세했고, 조나라 상경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그는 왕께 간언했다. 진나라에 여섯 현을 주기 보다는 진에 원한이 있는 제나라에 주어 힘을 합쳐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면, 진나라에서 사자가 알아서 조나라에 올 것이고 이를 통해 한나라와 위나라가 제나라 왕을 중히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르니 모든 것이 우경의 말대로 되었다.

 

태사공曰: 우경이 사태를 헤아리고 상황을 추측하여 조나라를 위해 꾀한 계책들은 얼마나 주도면밀했던가!

 

1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는 전국 시대 네 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선비를 대하는 남다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위나라 공자 무기는 위나라 소왕(昭王)의 막내아들로 위나라 안희왕(安釐王)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그는 안희왕이 즉위하자 신릉군에 봉해졌다. 당시 범저가 망명해 진나라 재상이 되자 위나라 왕과 공자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허나 공자의 어짊에 객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을 통해 공자의 능력이 뛰어남을 본 안희왕은 그를 꺼려하여 나랏일을 맡기지 않았다.

공자는 위나라에 숨어 살던 선비 후영(侯嬴)이 찾아와 주기를 청하며 선물을 보내나 후영은 거절한다. 이에 공자는 술자리를 열었다. 다음 수레와 기마를 거느리고 왼쪽 자리를 비운 채 후영을 몸소 맞이하러 갔고, 후영은 공자의 태도를 살펴보려고 사양하지 않는다. 일부러 공자의 윗자리에 타고, 시장에서 친구 주해(朱亥)를 오랫동안 만나기를 청했다. 공자는 그럴수록 더욱더 온화하게 후영을 대우했고, 결국 후영은 공자의 상객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안희왕이 위나라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조나라를 돕게 하자 진나라가 위나라를 협박했고, 안희왕은 겁을 먹고 진비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평원군이 공자를 꾸짖고, 이에 후영이 공자에게 계책을 내주었다. 진비의 병부(兵符)를 여희(如姬)를 시켜 왕의 침실에서 훔쳐오게 하고, 진비가 군대를 내주지 않으려하자 주해를 시켜 진비를 죽이게 했다. 결과적으로 진나라 군대를 물리쳤고 조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이를 안 위나라 왕은 크게 노하였고 공자는 조나라에 머무르며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를 보고 빈객 중 한 사람이 말했고, 공자는 자책하며 부끄러워했다.

 

빈객曰: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

 

18)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춘신군(春申君)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헐(歇)이고 성은 황(黃)이다. 그는 여러 나라를 통해 보고 배운 것이 많았으며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을 섬겼다. 왕은 변론이 뛰어난 춘신군을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그 때, 진나라가 초나라를 치려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초나라가 망할 것을 두려워한 황헐은 진나라 소왕에게 글을 올렸다. “천하에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힘이 약한 개가 그 지친 것을 틈타 이익을 차지할 것입니다. ... 신이 왕을 위하여 생각하건대 초나라와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 이에 소왕은 초나라에 백기의 진격을 멈추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출병을 거절한 뒤, 초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주고 동맹국이 되기로 약속했다.

경양왕은 태자 완(完)과 함께 황헐을 진나라에 볼모로 보냈는데, 그 사이에 병들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에 황헐은 태자와 친한 진나라 재상 응후를 설득하나 진나라 왕이 재상의 말도 듣지 않자, 계책을 세워 목숨을 걸고 태자를 진나라에서 빠져나가게 했다. 더 이상 태자를 잡지 못할 때쯤, 진나라 왕에게 고했고 왕은 노하였다. 하지만, 응후의 설득으로 황헐을 살려서 초나라로 보냈으며, 태자가 고열왕(考烈王)으로 즉위하자 황헐은 재상이 되었다.

재상이 된지 25년째 되던 해에 고열왕이 병에 걸렸다. 허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조나라 사람인 이원(李園)의 누이동생이 왕후로서 낳은 태자만이 존재하니, 주영은 춘신군에게 이원이 당신을 죽일 것이라 말해주었다. 그러나 춘신군은 이원을 신뢰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고, 주영은 자신에게도 재앙이 올까봐 미리 달아났다. 결국, 고열왕이 죽자 춘신군은 이원의 병사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집안사람들까지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19) 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

이 편은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았지만, 진나라로 들어가 재상이 되어 공을 세우면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범저(范雎)와 채택(蔡澤)의 이야기이다.

① 범저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그는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위나라 소왕(昭王) 대신 위나라 중대부(中大夫) 수고(蕦賈)를 섬겼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등용하지 못했고, 오히려 제나라에서 그를 선물을 주며 데려가려고 했다. 이에 노한 위나라 왕, 그리고 왕의 말을 듣고 매우 화난 수고는 사인을 시켜 범저를 매질했고, 죽은 척을 하는 범저를 대자리에 둘둘 말아 변소에 버렸다.

② 범저는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을 받아 위나라를 벗어났고,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꿨다. 그 후, 정안평을 통해 범저는 왕계(王稽)를 만나 진나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유세하지 못할 뻔했으나, 양후가 한과 위를 넘어 제까지 쳐서 도읍(都邑)을 넓히려 했을 때 왕께 올린 글이 범저를 도와 끝에는 진나라 응읍(應邑)에 봉해져 응후(應侯)라고 불리었다.

③ 채택은 연나라 사람이다. 그는 벼슬자리를 얻지 못했고, 당거(唐擧)에게 관상을 보러갔다. 성인의 관상이나 수명은 43년이라 하였다. 하지만 그 수명으로도 충분하다 하였으니, 그는 자신이 ‘진나라 재상’이 될 것이라 말하고 다녔다. 이에 응후(진나라 재상)가 채택을 불러들였고, 긴 대화를 나눴다. 채택은 응후를 설득하고 응후는 채택의 말을 옳다하고 칭찬하며 진나라 소왕에게 소개하니, 왕 또한 채택과의 대화를 매우 즐거워했다. 이후 응후가 병을 핑계로 하여 재상의 자리에서 내려오자 채택이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20) 악의열전(樂毅列傳)

악양(樂羊)의 후손 악의(樂毅)는 전국 시대의 저명한 군사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魏)나라에서 태어나고 조나라에서 벼슬하다가 다시 위나라를 거쳐 연나라로 간 이력이 있다. 이로 인해 종종 ‘지조가 없다.’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악의는 어질고 병법을 좋아하여 조나라에서 그를 천거했으나, 무령왕(武靈王)이 사구(沙丘)의 난으로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고, 연나라에서는 자지(子之)의 난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 제나라가 연나라를 깨뜨렸다. 제후들은 진나라를 등지고 제나라를 섬기려고 하니, 연나라 소왕은 제나라를 칠 방법을 악의에게 물었다. 이 때, 소왕과는 사이가 좋았으나 뒤를 이은 혜왕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고, 결국 혜왕이 자신을 죽일까봐 악의는 서쪽으로 달아나 조나라로 가서 망제군(望諸君)이 되었다. 그렇게 살다가 조나라에서 죽었다.

그 후, 악의의 후손 악간과 악승은 연나라에서 살았으나, 왕이 자신들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자 조나라로 떠나 평생 그 곳에 머물렀다.

2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전국 시대의 수많은 전쟁은 대부분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편에 나오는 연여 싸움과 장평 싸움은 단순히 진나라와 조나라의 싸움이 아니고 여섯 나라의 안위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① 염파(廉頗)는 조나라의 뛰어난 장수였고, 인상여(藺相如)는 조나라 환관의 우두머리인 무현(繆賢)의 사인이었다. 당시 진나라 소공(昭公)이 조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내 성 열다섯 개와 화씨벽을 바꾸자고 하였다. 이것에는 문제가 많았으니, 해결할 자가 없었다. 이 때, 무현이 인상여를 사신으로 보낼 것을 추천했다. 그는 진나라 왕이 성을 주지 않고 화씨벽을 빼앗을 생각만 하자, 강제로 빼앗을 수 없도록 조언을 계속했다. 결국 그의 활약으로 진나라가 조나라에 성을 주지 않으므로 조나라도 화씨벽을 진나라에게 내주지 않을 수 있었다.

② 진나라 왕과의 회견을 마치고 돌아온 인상여가 염파보다 지위가 높아지자, 염파는 이렇게 말했다. “... 인상여는 겨우 혀와 입만을 놀렸을 뿐인데 지위가 나보다 높다. ...” 자신보다 미천한 신분의 인상여의 밑에 있는 것이 싫었던 염파였다. 이에 그를 피해 다니던 인상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던 사인들에게 말했다. “...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 이 말을 들은 염파는 그와 화해를 했고, 이해에 염파는 동쪽의 제나라를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위나라 방릉과 안양까지 손에 넣었다.

 

22) 전단열전(田單列傳)

전단(田單)은 제나라의 여러 전씨(田氏) 일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민왕 때 임치의 시연(市掾)이었으나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기원전 284년에 연나라 소왕은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다섯 나라의 병사들을 이끌고 제나라를 치게 하여 제나라 수도 임치와 70여 성을 함락시켰다. 그 상황에서 전단은 안평(安平)으로 달아났고,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수레바퀴 축의 끝을 모조리 잘라 버리고 쇠를 덮어씌워 붙이도록 시켰다. 이것 덕분에 연나라 군대가 왔음에도 동쪽 즉묵(卽墨)으로 가서 몸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전단이 장수가 되었다. 사실 그 때의 제나라는 거와 즉묵 두 성만을 지키고 있고 제나라 민왕도 피살되었는데, 제나라 장수 전단이 비상한 지혜와 군사적 재능으로 연나라를 깨뜨리고 구사일생으로 제나라를 지켜냈다. 그는 소문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대를 농락했고, 제나라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항복’이란 말에 방심한 연나라 군대를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에 제나라 민왕의 뒤를 이은 양왕(襄王)은 전단을 안평군(安平君)에 봉하였다.

 

23) 노중련•추양열전(魯中蓮鄒陽列傳)

노중련(魯中蓮)은 제나라 사람으로 탁월한 능력이 있었으나, 벼슬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이런 그가 조나라에서 유세한 적도 있었는데, 진나라가 조나라와 전쟁을 할 때였다. 당시 위나라 안희왕이 조나라를 도왔는데, 그는 평원군을 통해 말했다. “... 진나라 소왕을 ‘제(帝)’라고 높여 불러 주면 진나라는 필시 기뻐서 군대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노중련이 평원군을 꾸짖고 신원연을 만나 말했다. “... 진나라는 예의를 내버리고 ... 군사들을 권모술수로 부리고 백성을 노예처럼 부립니다. ... 진나라 왕이 제멋대로 제(帝)가 되어 천하에 잘못된 정치를 편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의 백성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에 말에 따라 진나라를 ‘제’라 부르지 않았으니, 결국 진나라 군대는 물러갔다.

추양(鄒陽)은 제나라 사람인데, 오나라 사람인 장기 부자(莊忌夫子)와 회음(淮陰) 사람인 매생(枚生)의 무리와 사귀었다. 또한 그는 글을 올려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의 틈바구니에 끼어 양나라 효왕의 문객이 되니, 양승 등이 추양을 시샘하여 효왕에게 참소했다. 추양은 옥 안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왕에게 글을 또 올렸다. 이를 보고 감탄한 효왕은 추양을 풀어주고 상객으로 삼았다.

 

24)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굴원(屈原)은 이름이 평(平)이며,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로 있었다. 그는 견문이 넓었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잘 다스려질 때와 혼란스러울 때의 일에 밝고 글을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런 그를 회왕은 매우 신임했으나 시기하여 헐뜯는 자도 있었으니, 이로 인해 회왕이 굴원을 멀리하였다. 그는 아첨으로 인한 군주의 밝음이 가로막힌 것과 올곧은 사람의 등용 실패를 마음 아파하며, 「이소(離騷)」를 지었다. 그 후, 굴원은 조정에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다들 그를 멀리하니 「회사(懷沙)」라는 부(賦)를 짓고 돌을 안은 채 멱라강(漞羅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가생(賈生)은 이름이 의(誼)이며 낙양 사람이다. 그는 열여덟에 시를 외고 글을 잘 지어 군에서 소문이 나있어, 오(吳)씨 성을 가진 정위(廷尉)가 하남 태수로 있을 적에 그를 자기 밑으로 불러들여 아꼈다. 효문제(孝文帝)는 보위에 오르자 오 공을 불러들여 정위로 삼고, 가생을 불러 박사(博士)로 삼았다. 그는 역법(曆法)을 고치고 관복 색깔을 바꾸며, 제도를 재정비하고 관직 이름을 새로 정하고 예의와 음악을 창작하였다. 하지만 굴원처럼 헐뜯는 자들로 인해 황제가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가생은 좌천되어 떠났다.

 

25)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여불위(呂不韋)는 양책의 큰 상인으로 집안의 재산을 모았다. 당시 진나라 소왕(昭王)은 태자가 죽자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삼았는데, 그의 둘째 아들 자초(子楚)는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시기였다. 예우 받지 못하는 자초를 불쌍히 여긴 여불위가 자신의 재산을 이용하여 가난한 자초가 빈객과 사귈 수 있게 하고, 진나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 부인을 섬겨 자초를 후사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시간이 흘러 소왕이 죽자 효문왕이 즉위했었는데 그는 1년만에 죽었고, 자초가 장양왕이 되어 즉위했으나 3년 만에 죽자 태자 정(政)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진시황이었다. 하지만 왕이 어려 여불위는 때때로 태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는데, 진시황이 장년이 되어감에도 이어졌다. 들킬까 두려워 한 여불위는 음경이 큰 노애(嫪毐)라는 사람에 대한 거짓 소문을 내서 태후가 그를 얻고 싶어 하게 만들었고, 태후는 노애를 거짓 판결을 내려 환관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시중을 들게 만들었으며 그와 사랑을 나누었고 결실을 맺게 되었다. 훗날 왕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로 뒤를 잇게 하려고 했는데, 이를 시황제가 알게 되었고 아들은 죽고 노애의 삼족이 멸하였으며 태후는 쫓겨났다. 이에 여불위는 죽임을 당할까 무서워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26) 자객열전(刺客列傳)

이 편은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한 다섯 자객의 활약상을 서술하고 있다.

① 조말(曹沫)은 노나라 사람으로 노의 장공(壯公)을 섬겼고, 장군이 되었다.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조말의 계속된 패배로 장공이 겁을 먹고 화친을 맺으려 했다. 그 뒤에도 조말을 계속 장군으로 두었고, 화친 맹약을 맺기로 한 날에 조말은 손에 비수를 쥐고 제나라 환공을 위협했다. 이에 노나라는 세 차례 싸움에서 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게 되었다.

② 전제(專諸)는 오나라 당읍(堂邑) 사람이다. 오자서가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오나라 공자 광(光)에게 그를 추천했다. 당시 오나라 왕 제번(諸樊)은 막내아우 계자찰(季子札)의 현명함을 알고 그에게 제왕 자리를 주고 싶어 했다. 이에 형제의 순서로 왕의 자리가 갔으나 계자찰은 달아나 버렸다. 이에 이말의 아들 요를 왕으로 삼자, 공자 광이 형제의 순서라면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제가 요양 12년에 그를 찔러 죽였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죽임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후에 공자 광이 숨겨 두었던 병사들을 내보내 요왕의 사람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합려(闔閭)이다.

③ 예양(豫讓)은 진(晋)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겼다. 지백이 조양자를 치자 조양자는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일을 도모하여 지백을 멸망시키고 그의 후손까지 죽여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큰 술잔으로 쓰기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예양은 복수를 하고자 했고, 마침내 성과 이름을 바꿔 죄수가 되어 조양자의 궁궐 변소의 벽을 바르는 일을 했다. 하지만 조양자에게 들켰고,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양자가 그를 풀어주었다. 허나 은혜와 복수 모두 갚기 위해 양자의 옷을 얻어 칼로 내리쳤고 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④ 지(軹)의 섭정(聶政)은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가족과 함께 제나라로 가서 가축 잡는 일을 하며 살았다. 당시 한나라 재상 협루(俠累)와 사이가 나쁜 엄중자(嚴仲子)가 그를 죽일 사람을 찾았고, 그 사람이 섭정이 되었다. 사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엄중자를 찾아가 일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는 관청 단상에 앉아있던 협루를 찔러 죽이고, 주위 사람까지 죽였다. 그 뒤 그는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⑤ 위(衛)의 형가(荊軻)는 책읽기와 칼싸움을 좋아해 위의 원군(元君)에게 유세하였으나 그는 등용되지 않았다. 형가는 연나라로 가서 자유분방하게 살았으나 그 사람됨이 신중하고 침착하였다. 이런 그를 연나라에 숨어 사는 선비 전광(田光) 선생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얼마 후, 때마침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오니, 자신을 예우하지 않은 진왕에게 원수를 갚고자 했다. 또한,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해온 번 장군의 복수까지 할 사람을 구하니, 형가가 그 일을 했다. 행장을 꾸려 진나라로 가서 가져온 지도에서 비수를 꺼내 진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27) 이사열전(李斯列傳)

이사(李斯)는 초나라 상채 사람으로 순경으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의 기술을 배웠다. 공부를 마치고 서쪽 진나라로 들어갔고, 당시 진나라 승상이던 문신후 여불위를 찾아가 그의 사인이 되었다. 여불위에게 인정받아 왕의 시위관까지 되었고, 후에 진왕은 이사를 장사(長史)로 삼았다.

때마침 한(韓)의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이 진나라를 교란시키려 하니, 이사까지 의심을 받았다. 이에 이사는 빈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을 올렸다. 진왕은 빈객을 내쫓으라는 명력을 거두었고 이사의 관직도 회복시켰으며, 그의 계책까지 받아들였다. 이후 이사는 승상이라는 직책까지 벼슬하게 되었다. 시황제 34년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정책의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시황제 37년에 승하하자, 태자를 정하는 일은 자신과 이사의 손에 있다고 조고(趙高)가 말했다. 허나 이사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거절하니, 갑자기 이사와 몽염을 조고가 비교했다. 다섯 가지 면에서 몽염보다 못한 이사를 조고가 계속 설득하자, 결국 이사는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막내아들 호해를 태자로 삼았고 그가 이세황제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법령에 따라 죽이고 벌하는 일이 가혹해지자 여러 신하가 스스로 위험을 느껴 모반하려는 자가 많아졌다. 이사가 여러 번 이세황제가 한가한 틈을 타 간언하려 했으나, 이세황제는 도리어 이사를 문책했다. 벼슬과 봉록을 소중히 여기는 이사는 결국 이세황제의 비위를 맞추며 용서를 빌기도 했다. 허나 이세황제가 믿고 따르는 조고를 헐뜯으니, 결국 이사는 감옥에 갔고, 삼족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후 조고는 승상이 되었고 이세황제를 위협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시황제의 손자 자영(子嬰)에게 옥새를 주나 자신이 정치를 하려했다. 하지만 결국 환관 한담(韓談)으로부터 조고는 죽임을 당하고 삼족이 멸망했다. 하지만 자영을 위해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자, 결국 진나라는 천하를 잃었다.

 

28) 몽염열전(蒙恬列傳)

몽염(蒙恬)은 그 조상이 제나라 사람인데, 할아버지 몽오(蒙鷔)가 진나라 소왕을 섬겨 대를 이어 진나라 사람으로 살았다. 그는 가문 대대로 장군을 지낸 관계로 시황제 26년에 진나라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쳐서 크게 깨뜨렸고, 이 덕분에 내사(內史)로 임명되었다.

그 후 진나라가 통일된 뒤, 몽염은 흉노를 압박하고 10여 년간 북방을 지키면서 만리장성을 쌓아 진시황에게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진시황이 죽자 조고와 이사의 음모로 사구정변(沙丘政變)이 일어나고, 이 일로 몽염은 동생 몽의(蒙毅)와 함께 참소를 받아 죽게 되었다.

 

2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전국 시대 말기의 유생으로서 서로 친밀한 정을 나눈 사이이다. 진나라 말기에 두 사람은 대의를 명분으로 일어난 진섭(陳涉) 밑에 들어가 조나라의 장상(將相)을 새롭게 세웠다. 그러나 진(秦)과 한(漢)의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대립 속에서 두 사람은 친구에서 원수라는 비극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장이는 한나라로 가고, 진여는 조나라와 초나라를 도왔다. 처음에 진여는 제나라 왕의 병사를 빌려서 장이를 깨뜨려 조나라에서 대왕(代王)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장이가 한나라에 투항하여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진여를 죽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조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30)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위표(魏豹)는 본래 위(魏)의 여러 공자 중 한 사람으로 영릉군(寧陵君)으로 봉해졌었다. 그리고 팽월(彭越)은 창읍(昌邑) 사람으로 자는 중(仲)이다. 이 둘은 진나라 말기의 빠른 변화 속에서 낮은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대단히 높은 지위까지 올랐다가 모반을 꾀하여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이다. 위표는 한 고조 유방의 오만함을 참지 못하고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나라를 빼앗기고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팽월은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 인물로서, 양나라 지역에서 여러 차례 항우에게 반기를 들고 초나라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여 항우를 불안하게 하였다. 허나 항우가 평정된 후 양왕이 된 팽월은 반란을 꾀했다는 이유로 한 고조에게 내쳐져 죽게 되고 나라와 일족도 없어졌다.

 

태사공曰: “ ... 그들은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뱀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때를 만나 자신들의 뜻을 펼쳐 보려고 했기 때문에 갇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31) 경포열전(黥布列傳)

경포(黥布)는 육(六) 사람으로 성은 영씨(英氏)이고 진나라 때는 서민이었는데, 어렸을 적 형벌을 받고 나서야 왕이 될 관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장년이 되어 경형(黥刑)을 받게 되자 기뻐했다. 판결을 받은 경포는 여산에서 많은 죄수 우두머리나 호걸들과 사귀었다.

진승이 군사를 일으키자 경포는 파군을 만나서 그의 부하들과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병사 수천 명을 모았다. 이후 경포는 항우를 좇아 진나라를 칠 때, 언제나 선봉에 섰다. 그래서 항우는 서초 패왕이 되었을 때 경포를 구강왕(九江王)에 봉하였다. 그 뒤 항우의 숙적 유방이 반간계를 써서 경포를 한나라에 투항하게 하고 회남왕으로 봉했다. 허나 한나라 11년, 경포는 유방이 전공이 큰 한신과 팽월을 죽이는 것을 보고 생명에 위협을 느껴 군대를 내어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불행하게도 싸움에서 져 죽고 말았다.

 

3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회음 사람으로 평민일 적에는 가난하고 방종하여 추천을 받아 관리도 되지 못했고, 장사를 해서 살아갈 능력도 없어 남을 따라다니며 먹고 살아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그는 진나라 말기에 먼저 항우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유방에게로 달아났으나 여전히 중용되지 못하다가 소하의 추천을 통해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유방은 초나라와 팽성에서 싸웠다가 져서 달아났지만, 뒤에 한신의 공으로 크게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 뒤 한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북방 지역에서 두 번째 전쟁을 하여 위, 조, 연, 제나라를 모두 평정함으로써 항우에 대한 전략적 포위망을 구축하고 결국 해하에서 그를 섬멸한다. 하지만 한신의 공이 지나치게 높아 군주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유방은 그를 꺼리게 되었다. 허나 한신은 시대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요구하며 화를 부르니, 항우가 죽은 뒤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옮겨 갔다가 죄를 지어 회음후로 강등되고 결국 반역하려다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3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한(韓)의 왕 신(信)은 원래 한나라 양왕의 첩의 손자로 패공이 한(漢)왕이 되자 그를 따라 한중으로 들어가니, 한신이 한(韓)나라 땅을 쳐서 차지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한신은 한(韓)의 왕이 되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한신은 북쪽 오랑캐인 흉노와 화해를 하고자 여러 차례 사자를 보냈는데, 이를 보고 한(漢)왕이 딴마음을 품었는지 의심하여 군대를 보냈다. 그러자 한신이 겁을 먹고 흉노와 함께 한(漢)을 치기로 하고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한신의 군대가 패하니, 한신은 흉노로 도망갔으나 시 장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노관(盧綰)은 풍(豐) 사람으로 고조와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항상 고조를 따라다니면서 모셨다. 한나라 5년 겨울에 고조가 항적을 무찌르고 노관을 별장군(別將軍)으로 삼아 유고(劉賈)와 함께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쳐서 무찔렀다. 또 그 해 7월 연나라 왕 장도(藏荼)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한나라 5년 8월에 노관은 연나라 왕이 되니 제후나 왕들 가운데 연나라 왕만큼 총애를 받은 이가 없었다. 한나라 11년에 진희의 군대를 치고 12년에 고조가 경포를 치고 진희를 죽이는데 ‘노관이 배반했다.’고 진희는 전하고 죽임을 당했다. 고조가 연나라를 치니, 노관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사과를 할 생각이었으나 고조가 세상을 떴고, 흉노 땅으로 들어가 살다가 죽었다.

 

34) 전담열전(田儋列傳)

전담(田儋)은 적현(狄縣) 사람으로 옛날 제나라 왕의 후예이다. 진섭이 처음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 왕이 되었을 때 주불을 보내 위(魏)를 침략하여 평정하고 적현에 이르렀으나, 적현의 성문은 굳게 수비되고 있었다. 이는 전담의 계책 덕분이었고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어 주불을 쳤고,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 땅을 점령했다. 허나 결국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의 군대에 져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이 편에서 전담이 제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의 이름으로 표제를 삼았으나 전횡의 모습도 눈에 띈다. 전횡의 호걸다운 면모는 유방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역할에서 드러나는데, 비동맹의 동맹군 역할을 수행하여 유방이 천하를 얻게 도왔다.

 

35)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이 편은 하나라 초기 개국 공신이며 유방의 충성스러운 장수였던 번쾌(樊噲), 역상(酈商), 하후영(夏侯嬰), 관영(灌嬰)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과 한나라 초기 정권을 굳건히 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서 모두 미천한 출신으로 시대 변화에 편승하여 영웅이 되었다.

① 무양후(舞陽侯) 번쾌는 패현 사람으로 개 잡는 일을 생업으로 하면서 고조와 함께 숨어 살기도 했던 인물이다. 처음에 고조를 따라 군사를 일으켜 패현을 쳐서 무너뜨렸고, 패공(沛公)이 된 고조는 번쾌를 사인으로 삼았다. 늘 패공을 따라다니며 모셨는데, 장한의 군대를 칠 때도 선두에 서서 23명의 목을 베어 열대부(列大夫)의 작위를 받기도 했고, 그 뒤로도 항상 제일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적군의 목을 베었다. 그는 현성군(賢成君)이라는 봉호를 받기도 했으며, 10명을 죽이고 146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병졸 2,900명을 항복시키기도 했다. 그는 죽음도 사양하지 않고 살았는데, 이를 마음에 들어한 항우는 나중에 패공을 한왕으로 세우고 번쾌를 임무후(臨武侯)로 불리게 했다.

② 곡주후(曲周侯) 역상은 고양 사람으로 진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가 모은 젊은이들이 수천 명이 되었다. 그는 병졸 4,000명을 이끌고 패공에게 귀속하였고, 그를 따라 장사(長社)를 칠 때 성에 가장 먼저 오른 공으로 신성군(信成君)에 봉해졌다. 항우가 패공을 한왕으로 세웠을 때, 역상은 장군 자격으로 농서도위(隴西都尉)를 맡았다. 그 뒤로 역상은 장군 신분으로 장도를 치고, 진지를 함락시키고, 나중에는 우승상이 되어 따로 군사들을 이끌고 상곡 평정과 대(代)를 쳐서 조나라 재상의 인수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③ 여음후(汝陰侯) 하후영은 패현 사람으로 패현의 마구간 사어(司御)를 지냈다. 그는 사신과 빈객을 배웅하고 돌아올 때마다 패현의 사상정(泗上亭)에 들러 고조와 이야기를 나눴던 인물이었으며,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현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고조가 패현의 항복을 얻어내는데 도움을 주었고, 패공이 된 고조를 따라 호릉을 치고 평(平)을 항복시켰다. 그 후로도 진나라 군대를 치고, 호유향을 항복시키고, 이유(李由)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렇게 항상맹렬한 기세로 싸우던 하우영은 언제나 고조가 처음 패현에서 일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태복으로 있었고, 태복으로서 효혜제까지 섬기다가 죽었다.

④ 영음후(潁陰侯) 관영은 수양현에서 비단을 팔던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중연(中涓)으로서 패공을 따라가 성무에서 동군의 군위를 무찌르고 강리에서 진나라 군대를 깨뜨렸다. 이로 인해 그는 칠대부 작위를 받았다. 그 뒤로도 패공을 열심히 따라 집백 작위, 나아가 선릉군(宣陵君), 그리고 진나라 군대와의 남전에서 격렬하게 싸워 패상에 이르니 이 공으로 창문군(昌文君)이 되었다. 또한 기마까지 잘 알아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 기병대를 크게 깨뜨렸으며, 항우의 장군 항관을 쳐서 무찔렀고, 자공 왕무의 군대를 치기도 했다. 그는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그 후로도 많은 군대를 무찌르니 승상 자리에 있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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