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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EnerTravel 2023. 9. 25.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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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순이삼촌』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책의 배경 

 

순이삼촌은 1947년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현기영의 소설이다. 할아버지 제사에 참여하려 고향에 들른 서술자 ‘나’가 친척 아주머니인 ‘순이 삼촌’이 죽은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되어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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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현기영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표작으로 꼽히는 《순이 삼춘》(1979년)은 1960년에 나온 오영수의 단편소설 후일담 이후로 쭉 문학계의 금기였던 4.3 사건을 조명한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의의를 지닌다. 해당 책은 당장 금서로 지정되고 현기영 본인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민주화 이후로 《순이 삼촌》은 4.3 사건을 다룬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순이 삼촌》 뿐 아니라 제주도라는 섬이 겪었던 비극의 역사, 동시에 알려지지 않은 항쟁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품을 여럿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1901년에 교폐(프랑스인 천주교 신부 및 신자들의 행패) 및 세폐(가혹한 세금 징수) 시정을 요구하며 일어났던 신축민란을 다룬 《변방에 우짖는 새》, 일제강점기 제주 해녀들의 항일 및 노동투쟁(제주잠녀항쟁)을 다룬 《바람 타는 섬》(1989년) 등, 한국문학사에서 제주도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언급할 경우 가장 먼저 꼽히는 인물. 최근에는 자전적 소설인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년), 6월 항쟁 당시의 386세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누란》(2009년)을 내놓았고,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2016년)를 내놓았다.

 

 내용 요약 

 

<1.소드방놀이>

큰 흉년이 들던 해에 윤관영은 부형을 받았다. 부형이란 원래 사창미를 축낸 아전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쪄 죽이는 형벌이었지만 요즘에는 아궁이에다 불때는 척만 하고 죄인이 죽는 시늉을 했는데 그마저도 약식화되어 솥뚜껑 하나 두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으로 끝나기도 했다. ‘소드방놀이’라는 제목의 ‘소드방’은 제주도 사투리로 ‘솥뚜껑’을 뜻한다. 원래 윤관영은 목을 자르는 효수를 받았지만 사또와 사전 이야기가 되어 부형을 받은 터라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지, 사또가 정말 약속을 지킬 것인지 불안했다. 윤관영이 걱정을 떠안고 불안해하며 형을 받으러 가는데 고수가 북까지 치며 사람들을 모았다. 모여드는 사람들은 죄인에게 죽을 때 죽더라도 먹은 곡식을 뱉어놓으라고 야유했다. 도착하자 가마솥 10개에 불을 때고 있었고 이에 윤관영의 불안은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가마솥들이 구휼을 위한 죽을 끓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윤관영은 사또가 사창미를 팔아 작전해달라기에 명을 따랐을 뿐이니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합리화하며 억울한 생각이 든다. 윤관영이 형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닷새 전 환곡미 이백석 이상 범포한 자를 적발하고 대회군민하여 효수하라는 공문과 어사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사또가 나타나고 구휼이 시작되었고 윤관영과 눈이 마주친 사또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윤관영은 결국 백성들이 던진 사기그릇과 돌맹이에 맞아 죽게되고 사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후, 남은 진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윤관영의 시신을 치우라고 명했다.

 

<2.순이삼촌>

나는 얻기 어려운 휴가를 간신히 받아 할아버지 제사일에 맞춰 8년만에 고향 제주로 향한다. 8년 세월이 무색하게 김포공항에서 단 오십분 만에 도착한 고향은 나에게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 밖에 남겨준 것이 없다. 관광자원도 없고 귤농사도 되지 않는 나의 향리는 예나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지난 8년간 많이 바뀐 고향의 모습에 마치 관광객이 된 기분이다. 가장 반가운 친척은 1살 차이의 길수형이다. 부쩍 늙어버린 친척 어른들의 얼굴을 대하자니 8년이란 시간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나는 어른들게 각오한대로 채근을 듣고있다가 ‘순이삼촌’이 안 계시는걸 알아차렸다. 순이삼촌은 어디계시냐는 물음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순이삼촌은 촌수는 멀지만 가까이 지내기도 했고 몇주 전까지만해도 서울에 올라와 나의 집에서 지내셨다. 큰아버지를 통해 들은 순이삼촌의 소식은 얼마 전 밭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전부터 신경쇠약을 앓고 계셨지만 무엇 때문에 병세가 심각해져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건지 괜스레 서울살이 때문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삼촌이 서울에 올라오신지 얼마 안되었을 때 아내와 소동이 있었다. 순이삼촌은 끝까지 누가 그랬다고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아내를 붙잡고 ‘밥 많이 먹는 제주도 식모’라는 말에 눈물을 보이셨다. 나는 아내가 그런 말을 했든 안했든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아내의 시댁 식구를 대하는 태도에 화가 났다. 삼촌의 제주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아내는 이해해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아내는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나를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나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고향에 대한 기피증이 약간 바뀌었다. 삼촌과 있을 때만이라도 고향 사투리를 쓰기 시작했고 아들에게도 고향 사투리를 제법 많이 알려주었다. 순이삼촌은 그 일로 기분이 퍽 상하셨는지 좀처럼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지 않으셨고 아내와 부딪힌 사건이 또 있었다. “쌀이 벌써 떨어졌어요?” 라는 아내의 말투를 “쌀이 벌써 떨어질 리가 있나요?”하는 반문으로 잘못 이해한 삼촌은 자신이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쌀이 떨어진 줄 아느냐, 혹 자신이 쌀을 내다팔기라도 했단 말이냐며 울었다. 그날 이후 우리 내외는 오해를 풀어드리려 노력했으나 삼촌의 강박증은 더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삼촌의 사위가 장모를 모셔가겠다며 출장을 핑계삼아 찾아왔다. 삼촌은 약속한 1년을 다 채우고 내려가겠다고 거절하셨다. 그날 삼촌의 사위 장씨로부터 순이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삼촌과의 이야기를 들은 장씨는 그럴줄 알았다며 삼촌이 신경쇠약 환자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제주에서 4-5년 전 사이가 좋지않던 이웃에게 콩 두말 도둑으로 몰린 후 심한 충격을 받아 절간에 정양까지 했다고 했다. 사위를 홀로 보내고 계속 오해만 쌓으며 지내던 삼촌은 1년을 채 못 채우고 다시 제주로 돌아가셨는데, 제주로 가신지 1달도 안되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삼촌 생각에 복잡해졌다. 밤이 깊고 제사가 시작되니 어릴적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듣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당시에 7살이던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폐병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도피자 낙인으로 숨어살던 아버지가 일본으로 밀항해 가버려 나는 큰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몹시 춥던 날 철모에 총까지 든 군인들이 연설을 들으라며 병든 노인들까지 빠짐없이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불러냈다. 그리곤 군인의 가족들을 골라냈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큰아버지는 군인 가족들 틈에 섞여 나갔다. 사람들은 군인에 이어 공무원가족, 대동청년단과과 국민회 간부 차례가 오자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나갔지만 직계가족 외에는 들어가라고 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불났져!”라는 부르짖음이 들렸고 돌담에 매달린 사람들의 체중으로 돌담이 무너졌다 무너진 울타리로 사람들이 나가려 하자 지체없이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군인들은 일제히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었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총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수라장이 된 사이 총성이 울려 퍼졌고 나와 길수 형은 고무신을 잃어버리고 사람들 틈에 섞여 울다가 우익가족들 품에 숨었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군인에게 끌려나갔고 그 후엔 총성이 들렸다. 그렇게 11번째 무리가 끌려나갈 쯤에서야 대대장이 도착하며 학살은 끝이 났지만 이미 500-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순이 삼촌도 끌려간 무리 중에 섞여 있었는데 옴팡밭에서 총을 맞기 전에 기절해서 깨어보이 순이 삼촌 위로 시체가 여럿 쌓여 있었다고 했다. 삼촌은 오누이를 그날 잃었다. 아마 삼촌의 마음의 병은 그날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그때의 슬픔을 잊고 주은 탄피로 화약총을 만들어서 놀기도 했지만 어른들은 그날의 후유증을 쉽게 잊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순이삼촌만큼 깊은 후유증을 앓지는 않았다. 인고의 30년, 그럭저럭 잊고지낼 만한 세월이지만 순이삼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결국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3.도령마루의 까마귀>

서호부락 밖, 일주도로에 사람들이 작업반별로 무더기 모여앉아 인원점호를 받는다. 민보단 사람 넷이 죽창을 낀 채 공책을 들여다보며 이름을 부르거나 턱짓으로 수를 헤아린다. 까마귀 오순경은 길가 밭담 위에 앉아 점호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오순경 옷은 까마귀 날개를 닮았고 눌러쓴 모자는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해서 사람들은 오순경을 까마귀 오라고 불렀다. 점호가 끝나자 까마귀 오가 나와 호각을 불었고 울력꾼들은 떼를 지어 걸어간다. 마을 남정네들은 폭도에게 쫓기고 경찰에 쫓겨 피해다녔다. 귀리집은 석달 만에 아들 순원과의 상봉을 꿈꾼다. 도령마루에서 만나기로 된 아들을 생각해 뗄감을 챙기지만 밥을 얻어먹으려고 학교도 못가고 반동냥질을 하는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곡기라도 한 됫박일망정 주고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모두가 굶주리고 있는 터라 줄 수 있는 곡기가 전혀 없었다. 귀리집은 젖먹이 아기도 있던터라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 집터에 가서 곡식을 챙겨온다. 돌아오는 길에 들켜서 잡혀간 귀리집은 추궁과 학대를 당하고 좁쌀도 뺏긴 채 빈손으로 풀려난다. 결국 아기는 굶주려 죽었다. 호열병으로 다섯 살배기 순구를 잃고 이름도 못 지어준 갓난쟁이가 죽고나니 이제 남은 자식이라곤 순원이 뿐이다 계엄령이 떨어진 제주바다에는 배가 뜨지 않는다. 귀리집은 순원 아방이 진장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차라리 죽더라도 자신 모르게 죽어서 살아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길 바란다. 순원 아방은 시아버지 삭젯날 잡혀갔었다. 동네 산사람 몇사람이 삼우제 끝나거든 입산하라는 강요를 하기 위해 조문왔던 것을 본 마을 사람이 신고하여 끌려갔었다. 아침이 되어 영순이 아방 등에 업혀나온 그는 꼬박 열흘을 몸져누웠다. 그리고 아방은 팔월 삭젯날 순원이만 읍내에 남겨두고 폭도들에게 붙잡혔다. 아마 삭제 지내러 온 친척들 중에 폭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걸쇠오름까지 끌려갔다가 도망쳐 나온 순원이 아방은 서둘러 떠났다. 순원 아방이 떠나자 이번엔 폭도들이 밤중에 내려와 앙갚음으로 불을 질렀고 이 때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폭도들에 의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폭도의 가족이란 누명이 벗겨졌다.

도령마루로 향했던 귀리집은 드디어 도착했지만 읍내 사람 일터가 멀어 순원이를 점심 대나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업이 시작되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가 가진 사람들을 까마귀 떼가 모여있는 곳으로 모았다. 말을 뜯어먹고 있는 줄 알았던 까마귀 떼는 사람들의 시체더미에 몰려있었다. 당가를 가진 아낙네들에게 까마귀를 몰아내고 시체를 구덩이에 옮기라는 명령에 귀리집은 까마귀를 몰아내는데 영순 어멍이 가리킨 곳에 순원아방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들은 구덩이에 넣으면 영영 시체를 찾지 못할 것을 알기에 까마귀 오의 눈치를 살피며 시체의 눈을 까마귀가 못 해치게 머릿수건으로 가린 뒤 담 밖으로 내던졌다.

 

<4.해룡 이야기>

문중호는 출근하자마자 어머니 일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어머니가 둘쨋놈 돌에 맞춰 상경한다는 전보를 엇저녁에 받아서 오늘 아침 새벽부터 서울역에서 기다렸지만 어머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출근시간에 쫓겨 회사로 온 문중호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린다. 어머니를 보호하고있다는 전화라도 오지않을까 기다리던 때, 고향 친구 춘호에게서 전화가 온다. 고향친구들 모임에 빠지지 말라는 연락이었다. 중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고향에 대해 떠올린다. 중호에게 고향은 찌든 가난과 불행의 대명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잦은 흉년과 소까이, 난리로 5만명도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었던 일...등을 생각하다 문득 30년 전 소까이날 기억을 한다. 갈림길에서 어머니와 중호는 떼어졌다. 어머니가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손을 내밀었는데 토벌군 한명이 달려들어 어머니를 힘껏 밀쳤다.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돌로 이마를 짓찍었다. 중호는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당시 어머니는 군인에게 끌려가 새살림을 차렸고 중호는 고아원에 갔다. 일년 몇 달 만에 군인이 육지로 가는 바람에 어머니의 뜨내기살림은 파탄났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중호는 어린 마음에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으로 계속 고아원에 남았다. 중호는 고향에 대한 모든 것을 미워했다. 서울 사람이 되기 위해 서울말투를 배웠고 결혼을 하면서 본적도 서울로 옮겼다. 어머니는 늘 자신이 자식에게 해준 것이 없기에 받는 것 또한 적게 받겠다는 자격지심을 갖고 계셨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지만, 천재지변과 같이 막강한 가해자들, 고향섬 여자들에게 약탈, 겁간, 살인을 잫애하던 왜구들이 전설 속에서 해룡으로 묘사되었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인 해룡. 그러다 문득 중호는 과거에 대해 겁낼 게 아니라 무섭게 증오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고향녀석들 모임에서 해룡에 대해 이야기하고 되새길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본적을 고향 제주로 옮기기로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서 본적이란 서류상의 등록지가 아닌 등장인물의 뿌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래서 본적을 서울로 해놨던 당시의 중호는 고향을 거부하지만 끝에 본적을 제주로 바꾸기로 마음 먹은 것은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것 같았다. 결국 중호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증이 남았다.

 

<5.아내와 개오동>

석규는 기자일을 그만두고 몇 달 동안 무기력증에 빠져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않고 집에서 번역일만 하며 지낸다. 그마저도 번역한 원고를 보내거나 새 일감을 받아오는 건 아내에게 시키고 집에만 있었다. 석규의 마당에는 오동나무가 있는데 사년전 이 집을 마련했을 때 석규가 심은 것이다. 집 안에 오동나무를 심으면 안된다는 장모의 말에 미신이라고 믿은 석규는 오동나무를 방치했는데, 시간이 흐르자 벌레들이 들끓었고 오동나무는 나날이 커져서 집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아내는 벌레를 좀 잡아달라고 하소연했지만 석규는 못 들은척하고 아내는 결국 벌레를 홀로 잡는다. 오동나무 밑에는 봉봉 이라는 석규네집 개가 묶여있다. 주인만큼 무기력한 봉봉은 원래 석규와 매일 아침산책을 했었는데 사고를 당한 후, 산책은 물론이고 차소리만 나도 겁을 내곤 했다. 석규는 신문사에 일하던 때 이념다툼으로 신문사를 떠난 동료 완규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는 당장 먹여살려야 할 처자식이 걱정되어 현실 앞에 무릎 꿇고 계속 신문사를 다녔다. 그러면서 부장이 쓰라는 기사들만 써나갔다. 그러던 중, 공장 여공들에 대한 글을 써오라는 부장의 말에 취재를 하는데 부장이 원하던 방식이 아니라 여공들의 어려운 삶에 집중하여 취재를 했다. 이에 부장은 석규의 원고를 갈기갈기 찢었다. 석규는 이에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는지 야근을 하며 기사를 쓰던 중, 답답함을 느끼고 충동적으로 소방용 도끼로 부장의 책상과 의자를 마구 내려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석규는 신문사의 일자리를 잃었고 처외삼촌의 일자리 권유가 있었으나 그 자리는 여공들을 쪼고 오로지 생산성만을 위하는 자리였기에 할 수 없었다. 석규가 오래 실직 생활을 하자 생활이 어려워진 아내는 석규에게 동창 모임을 다닌다는 핑계를 대고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취직한다. 나중에 장모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석규는 자신이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도저히 처외삼촌이 권한 자리는 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갈등을 한다. 이러한 석규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인지 석규는 칼을 들고 오동나무로 올라가 오동나무 가지들을 마구마구 잘라낸다.

 

<6.꽃샘바람>

공장이 잠시 문을 닫는다는게 세달이 되었고 동숙의 배가 불러온 것도 세달이 되었다. 공장 문이 닫히고 동숙은 동료였던 준식과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다 동숙은 임신을 했고 준식은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결국 동숙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지운 후, 죄책감과 괴로움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을 느끼고 자신이 죽였다는 금붕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동숙은 목발을 지닌 남자를 만나 그에게 봄날 새싹이 돋듯 종아리가 새로 돋아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신도 상처에 새살이 돋게 하기 위해 의사가 말한 약을 사먹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금붕어를 싼 흰수건을 약방에 미련없이 버렸다.

 

<7.초혼굿>

(못 닿는 고향)

제대 말년 병장 박진호는 제대를 앞두고 사람이 변했다. 그는 내무실 최고 고참이 되던날 관례대로 졸병들을 집합시켰다. 졸병들에게 돌아가며 더도 말고 주먹 한 대씩 골고루 배급하는 일종의 세례식 같은 것을 한 진호는 그날 이후로 매트리스 밑에 엠원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품고 잔다. 제대가 1달 정도 남은 이 시점부터 진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대 후 돌아갈 고향을 생각하면 돌을 하나 삼킨 듯 답답함이 느껴졌다. 악몽에도 자주 시달려 이를 쫓기 위해서도 계속 총을 품고 잤다. 내무실에 양상병과 둘만 있던 날 밤, 갑자기 일어난다. 총을 들고 나간 진호가 혹시라도 자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양상병이 찾아나섰고 우려했던 소동은 일어났지만, 다행히 진호는 죽지 않았다. 무사히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에 타고 있던 진호는 한 여인이 눈에 띠었지만 자신의 멀미를 가눌 수가 없었다. 갑판에 나와 토악질을 계속 하던 진호는 난간 위에 빨래처럼 그림자와 함께 물 위로 떨어졌다. 30분 뒤 선원은 진호가 있던 자리에 한 켤레의 훈련화만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고향의 모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익수가 가을 들어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밤이면 악몽을 꾸고 소리를 질러댔다. 익수가 병을 얻은 것은 직장에서 퇴근시간을 기다리던 때 한 통의 전화로 인해서였다. ‘양병주 선생님’을 찾는 전화였는데 그는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듣기로, 제주에 온지 2달만에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익수는 그의 가족들을 찾아 억울한 혼백이라도 들려주고자 찾았지만 육지에서 온 양병주의 일가붙이를 찾는 것은 전혀 무망한 일이었다. 그 후 육지사내 양병주의 넋이 씌었는지 익수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직장조차 그만두어야 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어느 밤, 익수는 자살바위로 올라가 혁대 안에 두 손을 틀어넣고 허공에 몸을 던졌다.

 

<8.동냥꾼>

나에게는 양일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열등감의 대상이었다. 새벽까지 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나는 낙방한 서울의 일류대학을 양일은 합격했다. 섬마을에서 서울 일류대를 입학하는 사람은 몇 안되었다. 나는 일류회사에 입사하고 양일은 뜻밖에 작은 기계조립회사에 들어감으로써 양일을 앞선 생각을 했다. 양일은 4년 전 나에게 2만원을 빌리고 소식이 끊겼다가 4년만에 연락이 왔다. 양일이 실패한 삶을 살고 있길 바랬지만 막상 초라한 양일을 보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후 또 양일은 만원만 갖고 만나러 와달라고 했고 이에 나는 친구 둘과 함께 양일을 만나러갔다. 친구들 역시 양일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던 터라 몰락한 양일의 행색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소주집에 가서 소주를 나눠먹으며 들은 양일의 사연은 ROTC 복무 중 사고로 인해 불명예제대를 했고 그 후 취직이 어려워 계속 내리막길이 계속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듯한 노동판에 몸을 담게 되었다는 양일의 사연에 나는 동정의 감정이 생기는 듯 했다. 하지만 양일은 기죽지 않고 앞으로 대학 동기들과 교수를 만나 일자리를 구할 것이라는 당당한 계회게 다시금 열등감이 치솟아 비상금 만원을 건네주려다가 친구들 셋이 합쳐 술 값을 제외한 6900원의 돈 만을 남겨주고 간다. 양일에겐 가진 전부라고 6900원을 내놓았던 친구들은 그 후 셋이 맥주집에 가서 팁까지 12000원을 지불하고 양일은 알코올중독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9.겨울 앞에서>

완주의 누이가 소식이 끊긴지 벌써 한달 반이 지났다. 완주는 밀린 빨래를 해치운다면 누이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다는 느낌이 들어 빨래들을 하지 못하고 누이만을 기다린다. 완주에겐 후배의 소개로 만난 약혼자였던 인정이 있었다. 그들은 1년 남짓 사귀다가 헤어졌다. 완주에겐 완석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형사에게 누명을 쓰고 쫓기다가 1년 넘게 행방이 묘연했다. 완주를 집에 데리고 오라는 인정의 부모님은 성화였지만 완주는 갈 수가 없었다. 양친은 일찍 여의고 일가붙이도 별반 없는 집안, 행방불명된 막내를 기다린다는 말을 들으면 반가워 할 어른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완주는 인정과의 관계를 끊고자 모질고 못되게 굴었다. 결국 그들은 헤어졌고 완주와 인정이 처음 만났던 계절,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완주는 여전히 완석과 누이를 기다린다.

나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풀벌레 한 마리를 잡으며 흔적만 남기게 된 벌레를 “마치 그 벌레가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이라고 묘사한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10.아버지>

이 이야기는 좌익폭동 때 폭도로 입산한 아버지를 둔 소년의 의식세계를 담고 있다. 소년은 열 살 때 고향을 등진 후 고향에 찾아가본 적이 없고 고향을 추억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떠올린 고향은 텅 비어있던 운동장과 운동장에 있던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타버린 송장의 기억부터 시작된다. 소년은 또래 친구들에겐 비밀로 하는 연못을 갖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두어달 마다 집에 오셨다. 아버지가 오실 때마다 할머니는 소년의 귀를 막았는데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찾아왔을 땐, 할머니가 왠일인지 귀를 막지 않았다. 할머니는 소리없이 울고 계셨고 아버지는 마을이 모두 불탈테니, 이사를 가야한다고 했다. 그 날부터 소년의 마음 속에는 상상의 점이 자라게 된다. 상상이 점점 커져가며 소년은 완실에게 돈을 던졌다가 완실에게 끌려가 물에 갇힌다. 산불이 나고 산불을 끄는 물 앞에 아버지가 피 묻은 대창을 들고 내려왔고 나는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오지 말라고 막으며 물가로 헤엄쳐 가다가 완실의 팔맷돌에 맞는다. 하지만 상상과 다르게 현실에선 비는 오지 않았고 산불은 끝내 꺼지지 않았다. 이튿날 학교 운동장에는 불에 탄 공비의 시체 하나가 전시되었다.

 

감상

소드방놀이에 “야릇하구나 어째서 큰 부정은 죄가 안되고 작은 것만 죄가 되나. 부정이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 훨씬 도둑답다. 그것이 대담해져서 명화적쯤 되면 이미 도둑의 탈은 벗겨지는 법. 부정이란 것도 좀스럽고 쩨쩨한 구석이 있어야 진짜 부정이지, 쥐가슴 태우며 훔쳐내는 쌀 한톨, 실 한가닥은 부정이지만 환곡미 이백석 횡령은 이미 부정이 아니었다.” 라는 부분이 있다. 이는 요즘 시대에도 해당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영화 ‘마스터’ 대사 중에도 “푼돈으로 장난치는 사람은 사기꾼이라 부르지. 억 단위가 되면 경제사범이라고 높여 불러, 근데 그게 조 단위가 되면 뭐라 부를 거 같아?” 라는 이병헌의 대사가 있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력무죄 무력유죄 라는 말처럼 힘과 돈이 없는 사람은 죄를 받고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죄를 덜 받거나 감면당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 사또는 아무런 벌도 받지않고 끝나지만 결국은 벌을 받았길 바란다.

순이삼촌은 교과서를 통해서도 접했던 작품이지만 다시 읽어봐도 그때의 비극이 너무나도 참혹하게 느껴졌다. 순이삼촌을 비롯한 제주의 슬픈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제주를 매우 좋아해서 일년에도 몇 번 씩 찾아가는 곳이지만 이러한 사연을 몰랐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다시 제주를 갔을 때 제주는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았다. 너무나도 슬프고 억울하게 떠나간 목숨들이 너무 안타깝고 즐거움과 낭만으로만 느껴졌던 제주가 슬프게도 느껴질 것 같다. 어떻게 같은 민족끼리, 같은 인간끼리 어떠한 권리로 누가 누구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일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내가 그 시대에 그 곳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이 비극적인 결말들을 갖고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우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이 후회되지 않는다. 몰랐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작가 역시 제주 사람이기에 소설을 썼지만 그 소설을 살아왔다는 표현이 생각났다. 아픔의 역사를 문학으로 가르쳐 준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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