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Tok/독서, 서평

『고백록』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EnerTravel 2023. 8. 5. 13:06
728x90

 

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고백록』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작가와 책 소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융합시켜 기독교 문화의 체계를 세워 천년을 지속하는 중세시대의 이념을 설계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서양의 고대철학의 두 기둥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문명을 통합, 흡수하면서 시작된 정복왕조의 대왕 알렉산드로스의 시대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그리스부터 시작된 그의 정복야망은 페르시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정확히는 간다라 지방)까지 규범 지어질 수 있으며, 그 지역에 퍼졌던 그리스 문화, 다시 말해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테제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이 로마에 붕괴되면서 발현된 기독교적 태도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공인과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의 국교화는 인간중심주의인 헬레니즘의 근간을 궤멸시켜 버리고 유아독존적인 존재인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맡겨버리는 초월적 존재에 기대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라고 하는 서양의 근간이 되는 두 문화는 서로가 합치될 수 없는 접점이 없는 문화였다. 신을 인간으로 다루는 그리스와 신은 초월적 존재로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숭상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하는 로마는 대립될 수밖에 없고 병존할 수 없는 문화였다. 이 아우러질 수 없는 두 문화를 최초로 믹스시킨, 병존을 넘어서 융합시켜 로마의 기독교 문화의 체계를 세운 인물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인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기독교 문화 속서 ‘교부철학’이라는 사상의 기틀을 만들어낸 위대한 인물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옹호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자고 호소할 목적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되었다. 그는 한 때 로마제국 말기의 퇴폐한 풍조 속에서 일시적이나마 타락한 생활 속에 빠지기도 했으나 기독교인 어머니 모니카의 정성에 감동하여 기독교에 귀의, 히포(Hippo) 지역의 주교가 되었으며, 주교로 서품 받은 지 1년 뒤인 서력 397년에 집필을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4년 뒤인 서력 401년 책을 완성하여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뉜다. 1권부터 9권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체험한 도덕적, 사회적 방황의 시간을 살아온 시간을 회고하며 신의 은총을 찬양한다. 10권에서는 회심의 주체인 자아와 기억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통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1권부터 13권까지는 창세기 해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생의 궁극적 의미,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에 관해 미래지향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혹시 자신이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 신 앞에 선 한 인간의 고백의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728x90

 

줄거리

1권~9권: 방황의 시간 회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냉철한 지성과 차가운 가슴으로 진리를 탐구해 나아가던 것과 달리, 젊은 시절 정욕과 혈기가 왕성해져서 망나니, 양아치, 탕아와 같은 방종한 삶을 살게 되었다. 고향인 타카스테로 돌아와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단지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악행을 저지르며 단순히 만족을 위하여 사람은 범죄를 일으킨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특히 그는 자기가 열여섯 살 때에 불량배 친구들과 ‘배나무 아래에서’ 많은 배를 훔치는데 자신의 이 모든 악한 행위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을 흉내 내고자 하는 죄악 된 동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고, 주님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주님의 침묵을 핑계로 음란함에 사로잡혀서 온갖 짓을 다하며 나 자신을 함부로 굴리며 시궁창 같은 삶을 살았지만 사실 주님은 침묵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말씀하고 계셨다. 그는 악을 사랑했었다. 어떤 것을 얻고자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나쁜 짓 그 자체를 사랑했던 추악한 영혼임을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학교를 다니며 웅변술을 배우는 가운데, 키케로의 저서인 『호르텐시우스』를 익고 철학을 접하게 되면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올라 하나님을 비롯한 여러 주제들에 대해 사고를 하게 되고, 성경을 직접 읽어 보고자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여 포기하고서는, 하나님과 만물에 대한 참된 진리라고 주장하는 마니교 이단에 빠져들게 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실망하여 집에서 내보내지만 하나님과 주교에게서 아들이 결국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응답을 받고 다시 아들과 함께 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인 타가스테에서 흑인 노예와 동거를 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에 빠져서 경연대회에 나가 말로써 사람을 홀려 우승하는 등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였고 여러 교양 학문들의 책을 섭렵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물질주의적 사고에 빠져 허황된 망상들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내고, 그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삶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자신의 생활을 영위해나가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밀라노로 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의 예비신자로 교회에 나가게 되지만 지혜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뾰족한 길을 찾지 못한 채 고민이 깊어진다. 어머님의 권유로 약혼을 하게 되지만 어린 신부를 기다리는 2년 동안에도 정욕을 참지 못해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한다. 이렇게 지독하게 욕망만을 추구하던 그는 하나님 앞에 참회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매우 지독하게 스스로를 담금질하면서 평생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그쳐나간 사람이다. 그의 ‘고백록’에는 뜨거웠던 사람의 열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신앙인의 신앙을 향한 글’로써 ‘차분하고 무념무상하면서 조용하

고 그윽한 글’이 아닌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 플라톤 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물질주의적인 사고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이 지으신 피조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도 선하시며 피조세계도 전체적으로 선하다는 것과 악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진전된 이해에 도달하게 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인식과 느낌으로 바울의 서신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30세가 된 해였고, 밀라노로 온 지 2년째가 되는 해였다. 어느 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황실 고위직에 있던 그리스도교인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수도사 안토니우스와 황궁의 두 관리의 회심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크게 격동되었지만, 회심하고자 하는 자신의 간절한 열망과는 달리 정욕의 습성으로 인해서 의지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서 크게 괴로워하고, 회심 직전까지 갔다가도 주저앉고 만다. 하지만 밀라노에서 세 들어 살던 집 동산에서의 씨름은 계속된다. 마침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집어 들고서 읽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이 일어나고, 그의 옆을 계속해서 지키던 알리피우스도 함께 회심하게 된다. 주님은 죄인의 회심을 기뻐하신다. 내 영혼이 희망과 안일한 가운데 있을 때보다도 큰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때나 절망 중에 놓여 있을 때 얻는 기쁨이 더욱 큰 이유는 만물은 변하지만 주님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빅토리누스의 이야기를 듣고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주님을 그처럼 섬길 수 있기를 열망하였지만 타인의 쇠사슬이 아니라 본인 의지의 쇠사슬에 묶여 육욕을 낳았고 이는 습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필연적인 유혹이 되어버렸다. 그는 은밀한 영혼의 밀실인 내 마음속에서 치열한 의지의 싸움을 펼쳤다. 그는 자기가 어떠한 죄인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얼마나 선량한 자가 될 수 있는지는 헤아리지 못하였고 그러한 번뇌 속에 정원으로 뛰쳐나가 고독과 혼란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가 이미 오랫동안 뜻한 바대로 우리 주 하나님을 섬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 속에는 그것을 원하는 나와 그것을 원치 않는 나가 있었는데, 그 양자는 모두 그 자신이었다. 그가 완전히 원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정원으로 뛰쳐나가 그 자신과 싸웠고 그 속에서 그 자신은 찢기고 분열되었습니다. 이 의지의 분열은 그의 의지에 그 문제의 근원이 있지만, 그 자신 속에 별개의 정신적 본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분열이 ‘내가 일으킨 죄’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일으킨 것이라고 보았다. 즉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인 것이다. 그 역시도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니교는 인간의 사고 행위를 두 의지가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 속에 있는 본성이 다른 두 의지 중 하나는 善이고 다른 하나는 惡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 영혼의 본질을 신의 본질과 똑같다는 가공할 교만에 빠져있었다. 상반되는 의지의 수효만큼 상반되는 본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이 같은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진리로 되돌아가 사색하여야 한다. 사색을 통해 한 영혼 속에 여러 의지가 다양

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지난날의 어리석은 속삭임에 마음이 들떠 있었음을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더럽혀진 뜻에 있는 지체가 하는 말에 귀를 막고 그것을 묵살하라는 말소리가 들려오는 환청에 시달리기도 했다. 비참한 모든 것이 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빠져나와 마음 앞에 쌓였을 때 그는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만다. 지나간 오욕을 지금 당장 씻을 수 없다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그는 나의 하느님은 당신 자신에게 영원한 기쁨이며, 당신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피조물들은 언제나 당신에게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제 허망한 즐거움에 잠기지 않고 하느님의 복락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얄팍한 궤변으로 웅변술을 팔아먹는 수사학 교사직도 물러났다. 하느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고 허위에 찬 광란과 법정에서의 논쟁만을 생각하는 젊은 학생들을 더 이상 양성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후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하고자 에보디우스 등과 오스티아에 머물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고하기 이전에 어머니를 하느님의 여종으로 규정하고 그녀 역시 하느님이 보내주신 은총이라고 여기고 찬양하였다. 하느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하시던 어머니 역시 하느님 나라의 경건한 가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채찍이며 그리스도의 인도였다고 강조하였다.

 

10권: 진정한 고백

 

고백의 본질은 ‘우리의 죄에 관한 것’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자기성찰은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이다. 누구도 자기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 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성찰을 회피하려고 무척이나 애쓴다.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자신의 등 뒤에 놓아두었다는 그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가 자신을 살피기 싫은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부끄러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자신을 대면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하며 신이 부여한 성찰의 기회를 받아들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극적인 전회는 선을 신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것에서 구한 피조물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한 대로, 쉴 새 없는 추구와 안식을 찾기 위한 탐구의 연속이었다.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간절히 바라

던 선을 신 안에서 찾아냈다는 것을 말하게 되며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주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 속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과거의 죄에 대한 고백이지만 그것 역시 동시에 신에 대한 감사와 찬미이다. 죄의 고백과 신에 대한 찬미는 곧 하나로서, ‘나의 선과 악에 관해서 의롭고 선이신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나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 나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나는 당신 앞에서 고백함으로써 내 마음으로 이를 행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인간의 양심도 심연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게 고백을 꺼려한다 해도 주님이 인간의 마음속을 모르실 일이 없다고 위처럼 생각했다. 그가 진실로 고백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의 언어나 음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영혼의 언어와 사유의 외침에 의하는 것이다. 비록 묵묵한 외침으로 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큰 소리를 지르며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절망에 수렁에서 자기의 무능을 탄식하는 일 없이 주님이 베풀어 주신 연민의 사랑과 은총의 감미로움 속에서 각성할 것을 하느님에게 고백한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정과 사랑을 간직한 형제를 위해 그의 참모습을 고백하기도 했다. 서로의 선행에 대하여 기뻐하고 서로의 악행에 대하여 함께 슬퍼하기를 원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완하여 하느님의 성업이 결코 중단되는일이 없도록 힘쓰는 자신에게 은총을 내려주실 것을 기원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하느님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육체의 향기로운 냄새등과 같은 감각에 의해서는 신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육체의 힘을 능가하여 영혼을 통하여 그분에게 올라가야한다고 강조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노새의 육체적 힘이나 자신의 육체적 힘이나 다를 바 없기에 무지한 말이나 노새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깨닫게 하는 힘’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이 힘으로 모든 감각 기관이 하나가 되어 한 육신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11권~13권: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삼위일체를 사도의 가르침을 배제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사도는 ‘신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본질이란 관점에서 삼자에 대해 숙고하길 원한다. 즉 한 생명, 한 정신, 한 본질이 얼마나 불가분적인가를, 또 그 구분이 그들 사이에 얼마나 불가분적이면서도 여전히 구분되는가를 인정할 수 있는 자는 인정하는 편이 좋다고 말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절대적 존재, 절대적 선이므로 그것에 대항하는 것은 전적인 무, 선의 전적인 결여라고 보았다. 이 선과 무의 사이에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위치한다. 피조물은 신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된 것으로서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상 존재를 지닌 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무에서 만들어진 이상 존재와 선을 결여하고 있다. 신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와 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피조물은 상대적 존재이며 무를 섞고 있으므로 무로 돌아갈 위험이 대단히 높다. 인간의 생활 전체가 끊임없는 욕구와 행복의 추구인 이유도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그 신을 자신 속에 갖지 않고 바깥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며, 그 존재의 결여를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즉 피조물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욕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문제는 그 욕구의 대상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 욕구의 대상은 신인가, 이 세속적인 욕망인 것인가로 나뉘는데 전자를 카리타스(사랑), 후자를 쿠피디타스(욕망)라고 불린다. 그중 본래의 욕구, 목적에 도달하는 것은 카리타스뿐이다. 그 까닭은 인간의 욕구는 본래 그 존재의 결함을 채우려고 하는 것인데, 이 세상으로 향하는 욕망은 인간보다도 더 낮은 존재에 의해서 그것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 자체보다도 더 소멸적인 것에 의해서 그것 자체의 소멸성을 모면하려고 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욕구를 계속하는 한, 인간은 깨진 독에 계속 물을 채우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결코 궁극적인 안식에 도달하여 만족하는 일이 없다. 인간의 욕구를 궁극적으로 채우는 것은 오직 신 뿐이며, 신에게서 만족을 구하는 자는 그 구하는 것을 실제로 찾아내는 법이다. 신은 불변적인 선이며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평화인데 반하여, 인간은 무에서 창조된 이상 소멸적인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감상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개종한 후 11년 되던 해인 397년 그가 43세 되던 때 출생 후부터 그 당시까지의 그의 생애동안 내적의 변화 과정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묘사한 “영혼의 자서전”이다. 고백록은 단순한 자서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에 대한 웅장한 찬양 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죄악 뿐만은 아니며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한 찬양인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일생 속에 늘 함께하신 하나님의 진리의 손길을 가까이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달려가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전권을 꿰뚫는 근본사상은 ‘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최후까지도 소망해야 할 것은 어떠한 선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신의 영역 속의선이며, 항상 편히 쉬고 계시는 주님 속에서 편안히 쉬는 일이다. 이러한 ‘안식’이라는 근본 사상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무에서 창조되어 무로 전락할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태생적인 위험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11권에서 13권에 서술되어 있는 천지 창조는 이 피조물의 피조성을 해명한 것이다. ‘시간’은 피조물과 조물주를 구별하는 존재의 형식으로 ‘영원’과 구별된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기독교를 결합해 중세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신과 영혼에 특히 관심을 가지며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그 자체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리면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말한다. “밖에서 찾지 말고 내면으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거한다.”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내면에 진리인식의 근원이 있기때문이다. 모든 진리의 근거는 하나님의 정신에 내재하는 이데아들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이 이데아들은 존재론적으로 최고 지위를 차지한다. 인간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정신이 하나님을 통해 밝아져 깨달음을 가질 때이다. 이때 신적인(순수한) 정신(mundus intelligibilis)이 그 이데아들을 인간의 정신에 직접 비춰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 밖에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인간은 이처럼 근원으로부터 개별적인 진리들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 진리들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진리를 진리이게 하는 근원적인 진리, 즉 진리 자체에까지 도달할 수도 있다. 이 진리 자체는 모든 선한 것들의 선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인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카테고리들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인식할 수 있다. 모든 세계는 그의 형상이며 비유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이며 동시에 비존재이다.그 피조물들은 그들의 존재가 신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를 나누어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존재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실재성의 부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와 같이 완전한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실재도 아닌 ‘실재성의 부족’이 바로 죄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