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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EnerTravel 2023. 8. 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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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징비록』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시대적, 사회적 배경

(가) 징비록

징비록은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도체찰사로서 군무를 총괄한 유성룡이 7년 간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하며 겪은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국내외적 정세로부터 임진왜란의 실상, 조정 내의 분란과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 등 임진왜란을 둘러싸고 발생한 일들을 매우 사실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기록문학이다. ‘징비’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함이 담겨있다.

 

(나)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

명 : 조선이 1400년대 세종, 세조, 성종 때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듯 명도 성조 영락제에 의해 발전기에 이르렀으나, 16세기에 접어들어 무종의 사치와 유흥,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 그리고 세종시대(1522~1566)의 신구 세력의 정치적 대립 등으로 인해 상당한 혼란의 시기였다.

 

조선 (A) 정치 : 조선 왕조는 본래 훈구세력을 기반으로 개국 이래 100년 간 지배되어 왔다. 그러다 성리학을 내세우며 성장한 사림세력과의 마찰로 인해 세력이 나뉘게 되었고 명종 때 대거 등용된 사림세력들이 선조에 이르러서 조정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인사권을 장악하려 서로 대립하기 일쑤였기에 어떤 국론이든 의견 통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예로 김성일과 황윤길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왔을 때 의견이 둘로 나뉘는 바람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또한 당시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문란해져 갔는데, 신분질서를 바탕으로 한 양반관료제도가 와해되고, 조세와 부역의 기준이 무너져 군역도 불균형하게 부과되었었다. 양반 세력들은 직권을 이용하여 농장을 확대해 가며 부를 축척한 반면, 공납제도의 문란으로 농민의 부담은 과중되어 백성들의 불만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인종, 명종 때 척신 세력의 부패와 선조 때의 사림 세력의 양분화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고 집권층인 양반세력의 분열과 갈등은 왜란 발발 당시 국론 통일에 장애가 되었다.

 

(B) 국방 :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대립으로 지도층이 분열하면서 국방력이 약화되었다. 본래 조선의 국방은 개국 초기, 16세의 남성부터 60세 남성에게까지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였을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어 왔으나 100년여에 걸친 평화로 인해 군정이 문란해지면서 대가를 받고 군대를 대역하는 자들이 늘어나 진관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을묘왜변 이후 제승방략이라는 군사법을 사용하였다. 이는 유사시에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지정된 방위지역으로 가서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나 각 도의 병, 수사를 기다려 총지휘를 받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소규모의 적이 쳐들어 올 때나 효과적이었지, 대규모의 적이 침공해 왔을 때는 불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임진왜란에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으며 류승룡이 이점을 지적하며 개편을 주장하였으나 반대 의견에 의해 묵살되었다.

 

일본 (A) 정치 :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1587년 전국을 통일한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빈번한 농민출신에서 일약 최고의 권력자는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기반이 약해 지방영주인 다이묘의 지지기반이 약하였다. 특히 토지 소유 문제에서 불만을 샀다. 또한 명나라와 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도요토미는 정권기반에 내재된 취약점을 해소하고자 통치구조의 개편을 시도하였고, 동시에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힘을 해외로 분출시킴으로써 그들의 욕구충족은 물론 자신의 지지기반 확보를 동시에 꾀하였다. 따라서 명나라를 정벌하여 중국 대륙을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겠다는 허황된 꿈을 발판으로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다이묘들의 군대를 재편성, 나고야에 지휘 본부를 건설하여 수륙군의 편성을 완료하기에 이른다.

 

(B) 조총의 보급 : 15~16세기 일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서양문화가 유입되었는데 이를 남만문화라 한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천문학, 의학, 항해술, 지리학 등 실용적인 지식이 유입되었는데, 조총의 경우 일본이 한창 무력을 다투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중 일본에 방문한 최초의 포르투갈인에 의해 전해지게 되었다. 제조법을 통해 생산이 시작되었고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퍼져나가 신병기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다) 왜란 전 조선과 일본 관계

조선 초기 : 왜구를 회유하거나 진압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1491년 대마도를 정벌함으로써 교역을 중단시키기도 하였고 이에 일본 측에서는 사신을 보내 통신 재개를 여러 차례 요청하여 결국 1426년 이후로 부산포(동래),염포(울산),제포(충천) 등 삼포를 개항하여 일본의 왕래와 교역을 허락하였다.

 

삼포개항 이후 : 일본인의 출입이 급증하자 조선에서는 국방상에 위협을 느껴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왜인들은 삼포왜란, 사량왜변, 을묘왜변을 일으키며 도발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때마다 왜인과 약조를 개정해가며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1555년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라)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

(A)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심리적 공명심이나 영웅심.

(B) 조선, 명과의 무역독점을 통한 해외발전 또는 지방영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해외원정 (일본에 분배해 줄 토지가 없자 조선의 토지를 분배해줄 목적)

(C) 조선과 중국의 정치적 불안정

(D) 조선이 성리학 발달로 인해 무예보다 문예를 더 중요시 여긴 점

 

(마) 임진왜란 후의 상황

조선 : 7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의 인구는 1/3 정도가 감소하였고, 생존 인구의 1/3은 타지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런 참담한 현실 앞에서, 중국 전한 초기의 황제인 문제가 추진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던 ‘여민휴식’ 정책을 벤치마킹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여민휴식 정책 : 임진왜란이 종료된 지 2년이 지난 선조33년(1600) 9월, 비변사는 왕조 재건을 위한 개혁 프로그램 12개 조항을 제출했다. 국가가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는 이른바 ‘여민휴식’ 정책은 임진왜란 발발 이전의 16세기 국정 운영에 대한 쓰라린 반성의 산물이었다. 선조는 12개 조항 가운데 몇 개 조항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혁안을 순순히 수용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복구정책은 이듬해인 선조 34년(1601) 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과정 : 여민휴식 정책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적극적인 권농 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고, 중앙과 지방의 재정 자립도를 향상하는 것이었다. 지방관들은 개간사업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개간주체들에게 종자나 농우를 지급하였고 개간된 농지에는 파격적인 세금 감면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지방의 적극적인 개간은 10년 만에 과열을 우려하여 조정에서 말이 나올 정도로 꽤 성공적인 복구사업이었다.

두 번째는 부세제도의 개혁을 포함한 각종 재정개혁 단행이다. 이는 전쟁 이전의 모든 부채를 일체 탕감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부채를 안고 태어난 16세기의 농민들에게는 환영할만할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조정은 불필요한 지출을 모조리 줄이고 과격할 정도로 감축을 실시했으며, 농민들의 세금을 줄이거나 감면하는 등 민간을 최대한 배려하려 했다.

 

결과 : 이러한 조정의 노력으로 임진왜란 이후 10여년 만에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불안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여민휴식 정책은 광해군 즉위 이후 잠시 퇴조하게 된다. 그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궁궐 개축에 집착하고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는 등 민간을 크게 쥐어짜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로 인해 실정을 거듭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시행하였던 대동법 시행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전후 복구에 제대로 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인조반정 이후 즉위한 인조 이후로 다시 여민 정책을 이어갔으며 조선 말기 후대 군주들에게 어느 정도 회복된 조선 경제를 남겨줄 수 있었다.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정권이 들어선다. 일본은 조선 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대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약탈해 간 많은 서적을 통해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 : 조선을 도와 임진왜란에 참전한 뒤, 국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여진 : 명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키워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을 공격하였고 끝내 명나라를 멸망시킨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 그는 임진왜란 당시 전쟁터를 다니며 경험한 전쟁의 참혹함을 바탕으로 중립외교를 실시,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돕되, 새로이 떠오른 후금과도 다투지 않는 실리적인 대외 정책을 실시한다.

 

과정 : 명은 후금을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보냈으나 후금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적당한 때에 후금에 항복했다. 그러자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조를 왕으로 세운다.

 

후금의 침략(정묘호란) : 인조가 명을 섬기고 후금을 멀리하자 조선은 후금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결국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료하게 된다.

 

병자호란의 발발 : 조선이 여전히 명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가까이 지내지 않자 국력이 더욱 강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한다.(1636년 병자호란)

이로 인해 조선은 삼전도의 굴욕은 물론 수만 명의 조선인 포로를 내어주게 되는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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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아 퇴계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유성룡(1542~1607)은 2년만에 과거에 급제하게 되어 25세가 되던 해 관직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좌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했다. 어릴 적부터 이순신(1545~1598)을 알아왔던 유성룡은 일찍이 그의 됨됨이와 능력을 알아보고,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1년 2개월 전 작은 현의 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하여 요직에 심어놓았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하였으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파견되어 오자 그와 함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여 서애집, 영모록, 징비록 등 수많은 글을 남겼으며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쟁의 참화를 실제로 겪은 고위관리로서 황희, 채제공 등과 함께 조선왕조 5대 재상으로 손꼽힌다.

 

내용 요약

본래 징비록은 상,하 2권과 녹후잡기 그리고 근포집 2권, 진사록 9권, 근무등록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징비록 상, 하 2권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이 담겨 있으며, 녹후잡기는 저자가 임진왜란이 지속된 7년 동안 보고 들은 내용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징비록의 가치는 일찍이 일본에 알려져 1695년 일본 교토에서 간행되었다. 본 책은 징비록 상, 하 2권과 녹후잡기로 이루어진 판본을 번역 원본으로 삼았다.

 

징비록 1권

 

1.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겐지 왕을 몰아내고 일본 전역을 평정하여 66주를 통일한 인물로, 외국 침략의 야욕을 품은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는 자주 사신을 보냈으나, 그럼에도 조선에서는 한 번도 사신을 보내오지 않았기에, 이는 곧 자신들을 업신여긴다는 증거다” 라며 야스히로를 보내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다. 본래 양국은 200년 이상 서로 경축하거나 조문하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일전에 조선의 사신 일행이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토병에 걸린 적이 있어 그 이후부터는 일본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예에 따라 대접하여 돌려보내기만 할 뿐, 사신을 파견하진 않았다. 조선에서 수로가 험해 사신을 보내지 못한다고 답변하자 히데요시는 분노하며 또 다른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2. 끈질긴 요청 끝에 결국 조정에서는 1590년 사신을 파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존의 대마도 태수를 내쫓고 자신의 심복인 요시토시에게 섬을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그를 통해 안전하게 바닷길을 왕래하라는 내용을 전함으로써 조선이 더 이상 거절할 구실을 없애버렸다. 또한 그는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를 데리고 들어와 동평관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조선의 사신이 함께 가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조정에서는 ‘일전에 조선을 침략한 반란군들을 돌려보내게 한 뒤, 통신사 건을 다시 논의하는 게 어떻냐’ 고 물었고 이에 요시토시는 반란을 모의했던 조선인 십여 명을 끌고 와 조정에 바쳤다. 임금은 사신들을 불러 친히 상을 내렸다. 당시 류성룡은 “일을 조속히 결정지어 양국 간에 불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옵소서”라고 임금께 글을 올렸고, 이튿날인 1590년, 조정에서는 요시토시 일행과 함께 황윤길과 김성일, 허성을 떠나보냈다.

 

3. 조선의 사신 일행은 예정보다 한참 늦게 일본에 도착하였고, 예우에 어긋난 대우를 받았다.

황윤길 일행은 수도에 도착하고서도 다섯 달이 지난 후에서야 겨우 왕명을 전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여러 구실을 대며 국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히데요시와 마주하는 자리에 들어섰을 때는 어떠한 연회 도구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들은 예우를 충분히 갖추지 않았다. 또한 그날 이후로 다시는 히데요시를 볼 수 없었다. 김성일은 이에 분노하며 “우리는 사신으로서 국서를 지참하고 왔는데, 답서가 없다면 이는 허수아비를 만나고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였다. 그러나 황윤길은 일행을 이끌고 즉시 떠났다. 사신일행이 길을 되돌아가던 중 답서가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이 하도 거만하여 화가 난 김성일은 이 글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글을 고쳐 다시 가지고 오기를 여러 번, 미흡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황윤길 일행은 답서를 받아 조선으로 향했다.

 

4. 1591년 봄, 사신 일행이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부산에 도착한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이렇게 되자 조정의 의견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류성룡이 김성일을 만나 연유를 묻자, 그는 잘못하면 나라 안 민심이 동요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 답했다. 사신들이 받아온 답서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고자 한다’는 말이 있었다. 류성룡은 이 내용을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당시의 영의정이 반대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긴다면 대의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조선이 일본과 공모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응남 등을 보내어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하여 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남해안 일부에 성을 쌓고 신축하거나 고치도록 했다. 그러나 견고한 성이 아닌 그저 규모만 컸기에 전쟁이 터지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또한 당시 조선에는 병법의 활용이나 장수 선발, 군사 훈련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았다.

 

5. 조정에서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불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그간 이순신은 세운 공이 많았지만 누구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 만에 겨우 정읍 현감에 올랐을 뿐이었다. 당시 왜적의 태도가 날로 극성스러워지자 임금이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여 수사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어 진관제도를 다시 정비하여 평상시에는 훈련에 전념하고 전시에는 한 곳에 집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꺼번에 무너지는 폐단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제승방략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 하여 그의 주장은 폐기되었다.

 

6. 임진년 1592 봄, 임금이 신립과 이일을 변방에 파견하였으며 김성일을 경상도로 떠나보냈다.

이일과 신립은 당시 무장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장수들로, 이 일은 충청 전라도로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순시토록 하였다. 4월 1일, 두 사람은 읍에나 군에는 필요한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임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류성룡은 신립을 만나 과거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어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지적하였으며 나약해진 병사들을 걱정했다. 그러나 신립은 그의 말을 무시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던 와중, 임금은 명령을 내려 경상 우병사 조대곤을 승지 김성일로 교체하도록 하였다. 김성일은 유학자였기에 장수에 임명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비변사가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결국에는 임금의 뜻대로 김성일이 경상도로 떠났다.

 

7. 임진년1592 4월 13일, 왜적이 국경을 침범해 부산포가 함락되었다.

왜적들이 타고 온 배는 대마도로부터 부산포 앞에 이르는 바다를 가득 메워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은 왜적의 침략을 보고받자마자 성으로 돌아왔으나, 적이 사방에서 몰려오는 바람에 성은 삽시간에 함락되고 말았다. 좌수사 박홍은 겁에 질려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후 왜적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연달아 쳐서 함락시켰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겁에 질려 소산역으로 물러났다. 당시 동래 부사 송상현은 이각에게 자신과 함께 성을 지킬 것을 제안했으나 이각은 그대로 후퇴했다.

 

8. 침략한 지 이틀 뒤인 15일, 적이 동래에 입성하였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송상현은 반나절을 버티다 결국 왜적의 칼에 찔려 죽었는데, 왜적들이 들어와도 자리에 꼼짝하지 않아 결국 왜적의 칼에 맞아 사망하였다. 왜적들은 그의 태도를 가상히 여겨 시신을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말뚝을 세워 표시해 두었다. 동래가 무너지자 주변 고을들은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동래성 밀양 부사 박진은 기습을 당하여 밀양성으로 도망쳐 병기와 창고를 불사른 다음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시 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자기 첩부터 피란시켰다. 이러니 성 안 인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적은 거칠 것 없이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는 데 비해 우리 편에서는 누구 하나 나아가 그들의 길을 막는 자가 없었다. 순찰사 김수는 진주성에서 침략 소식을 접하고 말을 달려 서부 지방으로 도망친 뒤 온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격문의 내용은 모두들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결국 온 고을은 텅텅 비게 되어 적의 진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9. 왜적의 침략 사실이 4일 후인 17일 이른 아침에 조정에 닿았다.

경상 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처음 전해져 왜적의 침략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모든 대신들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임금을 뵙고자 하였다. 곧이어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당도했다. 부산은 당시 적에게 포위되어 통행이 불가했다.

 

10. 순변사 이 일이 먼저 떠나고 이후에 별장 유옥이 병사들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이 일은 서울의 정예병사 300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가려했으나, 병조에서 선발한 병사들은 유생 또는 집에서 살림하던 사람에 불과하여 멀쩡한 병사가 없었다. 이런 까닭에 이 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이 지나도록 떠날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이 일이 먼저 떠난 후에 별장 유옥이 병사들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11. 류성룡은 신립에게 병사들을 내어주며 출발하도록 하였다.

류성룡은 체찰사에 추천된 후, 김응남을 부사로 삼아줄 것과 전 의주 목사 김여물도 함께 자신과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그런 동안 급보는 계속 이어져 적의 선봉이 이미 밀양 고개를 넘어 곧 조령에 닿을 것이라는 내용이 전해졌다. 류성룡이 김응남과 신립을 불러 대책이 있는지 묻자 신립이 싸우러 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어 곧 도순변사에 임명하였다. 신립은 궐 밖으로 나가 함께 갈 사람들을 구하고 다녔으나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때마침 류성룡은 중추부에서 모집한 군사들과 함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모아놓은 병사들의 명단을 넘기며 공이 먼저 앞장서라고 하였다. 하여 김여물을 비롯한 병사들은 신립을 따라가게 되었다.

 

12. 왜적이 김해를 함락시키고 있을 무렵, 경상 우병사 김성일의 하옥 명령이 내려졌다.

김성일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 본영으로 항하였는데, 적들은 이미 김해를 함락시키고 서부의 여러 고을을 짓밟고 있었다. 그는 적과 대치하였으나 휘하 장수들은 모두 겁을 먹고 달아날 생각만 하였다. 할 수 없이 병사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고을마다 격문을 띄웠다. 그런데 임금이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를 이유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성일은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힘을 다하여 적을 물리쳐 달라는 말을 전하고 체포되어 직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상도 지방에서 김성일의 신임이 두텁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게 되었고 그 죄가 용서되었다. 이어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하여 도내 인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정비토록 하였다.

 

13. 첨지 김륵을 경상좌도 안집사에 임명하였다.

당시 경상 감사 김수는 서부에 있었는데 적이 가로막고 있어 동부와 통신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수령들은 모두 달아나버렸고 민심 또한 해이해졌다.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륵을 안집사에 임명하였다. 그가 당도하자 백성들은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14. 순변사 이 일이 문경에 당도하였다.

경상도 순찰사 김수는 제승방략의 군사 분류법에 따라 각 고을에 공문을 띄웠다. 각각 소속 병사들을 거느리고 정해진 곳에 주둔하면서 서울에서 내려올 장수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문경 남부의 수령들은 병사를 거느리고 대구에 모여 있었다. 얼마 후 순변사 이 일이 문경에 당도하였으나 고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창고를 열고 곡식을 꺼내어 함께 간 병사들에게 먹인 후 함창을 거쳐 상주에 닿았다. 당시 상주 목사 김해는 핑계를 대고 달아나 산속으로 숨어버린 상태였다. 판관 권길만이 홀로 고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일은 병사가 한 명도 없는 책임을 물어 권길을 죽이려 하였다. 권질은 밤새도록 고을을 다니며 수백 명의 병사를 모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들 뿐이었다. 이 일이 상주에 머물며 백성들을 위로하자 숨어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수백 명으로 불어나 순식간에 대오를 갖춘 군대가 조직되었다. 그때 적군은 이미 선산에 이르러 있었다. 저녁 무렵 개령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코앞에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 일은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실제로 적들은 상주에서 겨우 20리 떨어진 장천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영에는 척후병이 없어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5. 상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순변사 이 일은 충주로 도망쳤다.

겨우 불러 모은 병사들과 장수들을 모두 합치니 8백에서 9백 명의 수였다. 이 일은 북천 냇가에서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몇 사람이 숲 속에서 나와 서성거리다 이내 사라졌는데,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은 적이 엿보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곧이어 성 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살펴보러 간 군관이 조총을 맞고 쓰러져 목이 베였다. 10여 자루의 조총에서 탄환이 불을 뿜었고, 맞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적은 양쪽에서 군사를 포위하며 몰아붙였다. 이 일은 이미 늦었다고 깨닫고선 말머리를 돌려 급히 북쪽으로 달아났다. 말을 타지 못한 자들은 대부분 죽고 말았다. 적들은 이일을 계속해서 쫓았는데, 그는 의복까지 풀어헤치고 겨우 도망쳐 종이와 붓을 구해 임금에게 패한 내력을 전했다. 이후에 이 일은 조령을 지키고자 했으나, 신립이 충주에 있단 소식을 듣자 바로 충주로 달려갔다.

 

16. 이일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천도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이양원 등에게 서울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각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천민들, 말단 관리들을 모아 성첩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도성의 성첩은 모두 3만이었기에, 7천 명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것도 오 합지 졸뿐이었으니 그들 머릿속에는 도망갈 마음밖에는 없었다. 또한 지방에서 선발하여 올라온 병사들마저 말단 관리들과 결탁해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자 대신들이 나서 세자를 세워 민심을 수습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이를 허락했다.

 

17. 동지사 이덕형을 일본군에 사자로 보냈다.

조선의 군사가 상주에서 패하고 후퇴할 무렵, 통역관 경응순이 사로잡혔다. 적장 고니시 유기 나가는 히데요시의 글을 그에게 주며 “동래에서 울산 군수를 사로잡아 그로 하여금 편지를 전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제껏 아무 소식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덕형을 28일 충주로 보내라” 하였다. 그들이 사로잡았다는 자는 이언 함인데, 그는 벌을 받을까 봐 도망쳐왔다고 하면서 편지도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덕형은 일전에 일본 사신을 접대한 적이 있었기에 고니시 유기 나가가 그를 만나고자 했다. 이덕형이 가겠다고 하여 예조에서는 답장을 써 주었으나 가는 도중, 이미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 먼저 경응순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지만 그만 적장에 잡혀 죽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온 이덕형은 평양에서 임금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18. 조정에서는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지방 군사를 선발하여 서울을 지키도록 했다.

임금은 서울을 떠날 것에 대비하여 지방 지리를 잘 아는 이조판서 이원익과 지사 최홍원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 두 사람은 예전에 안주목사와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터였기에 임금의 순행 길을 닦는 데는 적격이었다.

 

19. 신립은 군사적 요충지인 조령을 버리고 충주로 돌아갔다.

충주에 들어선 신립은 충정도의 모든 군사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군사가 8천을 넘었다. 처음에는 조령을 방어하려고 하였으나 이일의 패전 소식을 접하자 그만 낙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조령은 험준하나 그렇기 때문에 요새로 군사적 요지였는데 그냥 버린 꼴이 되어버렸고 이에 군사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때 한 군관이 들어와 적이 이미 조령을 넘었음을 조용히 전했다. 신립은 진영을 동요케 한다며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고는 임금에게 적이 아직 상주에 머물고 있다고 글을 올렸다. 그러나 이미 적은 10리 밖까지 진격해 온 상태였다.

 

20. 적이 충주에 진입하자, 신립이 맞아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신립은 탄금대 앞을 흐르는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잠시 후 적군이 양쪽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무리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다른 한 무리는 강을 따라 내려왔다. 신립은 어쩔 줄 몰라하다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말머리를 강물 속으로 돌려 죽고 말았다. 병사들마저 그의 뒤를 따라 들어 강은 이내 시체로 가득 차고 말았다. 김여물 또한 함께 전사하였다. 이일만이 동쪽 갓길을 따라 산속으로 도망쳤다. 조정의 계책과는 달리 결과는 참담했다. 경상도 바다를 지키던 좌수사 박홍은 단 한 사람의 병사도 동원하지 않았다. 우수사 원균 또한 많은 배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싸우지 않았다. 또한 적이 상륙해 왔을 때 좌병사 이각이 도망치는 바람에 적들은 북쪽을 향해 밤낮으로 진군할 수 있었고, 결국 이제껏 이들을 맞아 제대로 싸워본 장수는 한 명도 없었다. 이러니 불과 10일 만에 상주까지 닿았던 것이다. 훗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탄식하기를, 왜군을 쫓아 조령을 지나가다가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구나 하였다.

 

21. 4월 30일 새벽, 임금이 서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신립이 패했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성 안은 떠들썩해졌다. 대신들은 상황이 이러하니 전하께서 잠시 평양으로 가신다음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했다.

그때 장령 권협이 임금을 뵙기를 청하더니 서울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빌었다. 그러자 류성룡이 군신 간의 예의를 차리라며 물러가라 했다. 이어 왕자들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고, 세자는 전하의 행차를 따르는 게 좋겠다고 왕께 아뢰었다. 결국 왕자들은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도록 명령이 내려졌고, 우의정은 서울에 남는 유도대장에 임명하였으며 영의정은 임금을 수행하도록 했다. 류성룡 또한 수행에 따랐다.

 

22. 임금 일행이 끝내 개성에 도착하자 유성룡의 죄를 지적하여 파면시켰다.

보고 받은 이일의 장계에는 적이 곧 성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임금의 가마가 대궐을 빠져나가 경복궁을 지나 혜음령을 넘어 마산역을 지나 임진강에 이를 때까지 내린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개성부에 들어서 남문 밖 관아에 당도하자 대간들이 수상을 탄핵시키는 글을 올렸다. 임금께서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계속된 글에 결국 수상은 파직되었고 후임에는 류성룡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임금은 류성룡의 죄를 지적하며 파면시켰고 다른 이들을 승진시켰다. 그때까지도 적이 서울에 채 입성하지 않았기에 임금을 피란길에 오르도록 한 죄를 물었던 것이다. 이에 류성룡은 승지 신잡을 서울로 보내어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23. 그러나 3일, 적이 서울에 들이닥쳤고 임금은 임진강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도대장 이양원과 원수 김명원은 이미 달아난 후였다. 적은 동래로부터 세 갈래로 나누어 올라왔다. 적의 깃발과 총소리는 온 나라를 뒤덮었다. 왜적들은 험한 요지를 이용해 경책을 세웠으며 밤에도 불을 밝혀 통신을 주고받았다. 도원수 김명원은 적이 밀어닥치자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며 무기와 화포를 모두 강물 속에 버린 후 도망쳤다. 이양원 또한 한강을 지키던 병사들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양주로 도망쳤다. 세 갈래로 나뉘어 진격한 적은 모두 서울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은 텅 빈 상태였다. 김명원은 글을 올렸다. 그러자 임금은 경기도와 황해도 군사를 모아 임진강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류성룡은 파직당한 몸이었지만 임금의 뒤를 따라 7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24. 삼도 순찰사의 군사마저 용인에서 패하고 말았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지원하려다가 임금께서 피란하시고 서울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그대로 전주로 돌아갔다. 그러자 도내 사람들이 싸우지도 않고 돌아왔다며 이광을 비난하였다. 그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과 경상도 순찰사 김수와 합세하여 총 5만의 병력으로 용인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날이 저물고 군사들이 해이해진 틈을 타 적군이 공격해 왔다. 당시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으로, 병무에 익숙하지 못해 명령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요지를 지키지도 못했다. 병사들은 모두 겁에 질려 도망치기 바빠 그 소리가 산을 뒤흔들 지경이었다. 결국 패하게 된 삼도 순찰사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제 지역으로 돌아갔다.

 

25. 부원수 신각이 양주에서 적을 무찌르고 적병 6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였다. 신각은 김명원의 부장으로 한강 싸움에서 패했을 당시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들어갔다. 마침 그곳에 온 함경우도 병사 이혼과 함께 서울로 들어가 민가를 약탈하던 적을 격퇴시켰다. 이는 왜적이 조선에 침략한 후 처음으로 승리한 싸움이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나와 환호하였다. 그런데 김명원이 임진강에서 올린 장계에 ‘신각이 제 멋대로 다른 곳으로 가는 등 명령에 불복종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올렸다. 결국 조정에서는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왕의 전령을 행하는 선전관을 파견하였는데, 뒤늦게 승전 소식을 알게 되어 사람을 뒤쫓도록 했으나 이미 신각은 선전관의 손에 죽은 후였다.

 

26. 한응인과 김명원의 군대가 임진강을 지켰으나, 적군의 덫에 넘어가 많은 군사를 잃었다.

김명원은 임진강 북쪽에서 군사들에게 강을 지키도록 하고, 강 위의 배는 모두 거두어 북쪽 기슭에 매어두었다. 그러자 남쪽에 진을 친 왜적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10일이 지나자 왜적들은 막사를 불태우고 군기를 거두며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신할 이 신할 리 경기 감사 권징과 함께 도망가는 적을 쫓으려 강을 건너려 하였다. 때마침 한응인 또한 적을 쫓으려 했으나 그의 군사들이 말렸다. 그러자 한응인은 머뭇거린다 하여 군사 몇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때 별장 유극량이 나서 말렸으나 신할리 그를 버려하였다. 유극량은 나랏일을 그르칠까 두려웠을 뿐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며 군사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건넜으나 양쪽에 숨어있던 적병들의 기습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이어 병사들은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고 강 건너에서 이 모습을 보던 김명원과 한응인은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둘은 임금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으나 조정에서는 이들을 문책하지 않았다.

 

27. 적이 함경도로 들어오면서 두 왕자가 적에게 사로 잡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수행하던 신하들이 모두 적에게 잡혔다. 이로써 모든 국토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에게 사로잡혀 함경도 북부까지 다녀온 함정호란 인물이 도망쳐와 류성룡에게 북도의 사정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기 나가와 함께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 안성에 당도했다. 그곳에서의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들은 제비 뽑기를 통해 갈라졌다. 당시 적은 왕자의 뒤를 계속 쫓고 있어 북쪽으로 피신하였으나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적에게 팔아넘겼다. 기요마사는 그들을 풀어준 다음 군진 속에 두었다가 후에 함흥에 머물도록 했다.

 

28. 이 일이 평양에 당도했다.

충주 싸움에서 패한 이 일은 강을 건너 평양에 당도했다. 당시에는 임금을 수행할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아무리 도망 온 신세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기뻐했다. 이때 병사 임욱경이 달려와 적이 봉산까지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류성룡은 좌상을 찾아 이일을 보내 대동강 가운데의 영귀루 밑의 얕은 물줄기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좌상이 동의하며 이일을 파견하였다. 겨우 수십에 불과했던 이일과 군사들은 길을 헤매다 만경대 아래로 달려갔다. 그곳에 서서 대동강을 바라보았더니 이미 적 수백 명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강 가운데 작은 섬의 백성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고 있었다. 이 일은 이미 강을 건너고 있는 적들을 향해 활을 쏘게 만들어 6,7명을 맞춰 쓰러트렸고 이를 본 적군은 그만 물러가 버렸다. 이 일은 계속 그곳을 지켰다.

 

29. 명나라의 요동 도사가 진무 임세록을 조선에 보내 왜적의 정세를 살피도록 했다.

임금은 임세록을 대동관에서 접견하였다. 유성룡은 6월 1일 복직하여, 그를 접대하게 되었다. 당시 요동에서는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란했다는 소식과 이윽고 평양까지 닿은 왜적의 소식을 접하자 의심을 품었다. 왜적이 이렇게 빨리 올라올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유성룡은 임세록에게 왜적의 척후가 적은 이유를 설명하는 등 조선의 상황을 전했고 임세록은 이를 본국에 보고하기 위해 급히 말을 돌려 떠났다.

 

30. 조정에서 임금이 함경도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의견과 아닌 의견이 분분하였다.

적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의 대신들은 피란 갈 것을 청했다. 특히 정철은 누구보다 앞서 피란을 주장했다. 또한 함경북도로 향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함경도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였지만 누구에게도 보고를 받지 못해 상황을 알지 못하여 이런 논의가 가능했다. 류성룡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임금께서 이곳으로 피란을 오신 것은 명의 구원병을 기다렸다가 나라를 수복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명나라의 구원을 요청해 놓고 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면 적이 길을 가로막아 명나라와의 통신이 어려워질 것이며, 온 나라가 적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 함경도라고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혹여 그곳으로 갔다가 적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어느 곳에 기댈 수 있겠습니까? 신의 늙은 어머니 또한 강원도나 함경도 지방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곳으로 가고 싶으나 어찌 나라의 앞날보다 우선하겠습니까” 그러나 뒤이어 지사 한준이 임금께 함경북도로 향할 것을 주청 하였고 결국 중전 또한 함경도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31. 시게노부와 겐소가 이덕형과의 만남을 요구하였다.

당시 적이 대동강에 온 지 3일이 될 무렵 건너편에서 왜병 하나가 나무 끝에 종이를 매달아 놓고는 돌아갔다. 이를 가지러 건너간 김생려에게 왜병이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친절하게 그 종이를 건네주었다. 류성룡이 편지를 펴 보았더니 이덕형에게 시게노부와 겐소가 함께 보내는 편지로, 내용은 강화를 의논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덕형이 조각배를 타고 건너가 시게노부와 겐소를 대동강 가운데에서 만났다. 겐소는 일전에 우리가 조선의 길을 빌어 중국에 조공을 하고자 하였는데, 조선이 이를 허락지 않아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작은 길이라도 열어 준다면 더 이상 큰 일은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덕형은 우선 귀국 군사들을 물리치고 나서 강화를 논의하자고 하였다. 그날 저녁, 적 수천 명이 나타나 동쪽 기슭에 진을 쳤다.

 

32. 6월 11일, 마침내 임금이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다.

최흥원, 유흥, 정철 등은 임금을 따라갔고 좌상 윤두수와 김명원, 이원익은 평양성에 머물렀다.

류성룡 또한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는데, 그날 왜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는 좌상과 도원수, 순찰사와 함께 연광정에 있었으며 성안의 3,4천의 병사들은 대동성 문루와 장경문을 지켰다. 10여 명의 적 기병이 양각도를 향해 강물 속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강변 가까이 오더니 성을 향해 총을 쏘았다. 류성룡은 활을 쏘도록 시켰는데 적들이 이를 피하며 물러갔다. 이를 본 김명원은 활 잘 쏘는 병사를 뽑아 배에 태운 다음 활을 쏘도록 했다. 배가 저편에 다가가자 왜적들은 멀리 달아났다. 병사들은 배 위에서 현자총을 쏘아 불화살을 왜군에게 날렸다. 왜군은 정신없이 흩어졌다가도 화살이 떨어지면 모여들어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33. 유성룡은 종사관 홍종록, 신경진과 성을 떠났다.

그 무렵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나날이 메말라 갔다. 류성룡은 좌상에게 “이곳은 강이 깊고 배가 없어 적이 건너지 못하고 있지만 상류로 가면 건널 수 있을 만큼 얕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적들은 그곳을 이용해 건너올 것이니 지금부터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김명원은 태연하게 이미 이윤덕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다고 말했다. 못 미더웠던 유성룡은 좌상으로 하여금 이원익을 그곳으로 가도록 명했다. 당시 류성룡은 임금의 명에 따라 오직 명나라 장수만 접대할 뿐 군사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하여 하루빨리 명나라 군사를 맞아들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라 생각하여 날이 저물자 종사관 몇 명과 함께 성을 떠났다.

 

34. 류성룡이 박천으로 이동한 임금 일행을 만나 물속에 마름쇠를 깔아놓을 것을 요청했다.

밤이 깊어 순안에 도착한 류성룡은 도중에 이양원 만나 적이 이미 철령에 이르렀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임금 일행은 이미 영변을 떠나 더 서쪽인 박천으로 향해 이동 중이었다. 유성룡은 박천으로 달려가 임금을 뵙고선 적의 위치를 알린 후, 적이 강의 얕은 곳을 건널 것을 대비하여 마름쇠를 물속에 깔아놓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모인 마름쇠는 수천 개에 이르렀다. 류성룡은 병조정랑 이유징을 추천하며 그를 불렀는데 꺼려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데 끓는 물 속이라도 들어가야 할 때에 이 정도 일을 피하려 하냐면서 그를 그르쳤다.

 

35.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대동강에 주둔하던 적병들은 경비가 삼엄하여 도무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김명원은 정예군사를 선발하여 밤을 이용해 강을 건너도록 했다. 공격을 시작하자 잠을 자던 적들은 놀라 허둥거렸으며 조선의 군사들은 많은 적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 주둔하고 있던 적들이 순식간에 몰려와 군사들은 배를 향해 물러났다. 그러나 적들이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선원들이 배를 육지에 대지 않아 뒤쫓아 온 적에게 의해 밀리게 되었고 겨우 살아남은 군사들만이 왕성탄을 건너 도망쳤다. 이 모습을 본 적병들이 왕성탄 부근의 강이 얕다는 사실을 깨닫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 날 성 앞까지 진군한 왜적은 성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었고 평양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류성룡은 이를 임금께 알렸다.

 

36. 곡식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임금 일행은 가산을 떠나 정주에 닿았다.

일전에 식량 부족을 걱정한 조정에서 여러 고을의 곡식을 평양으로 옮겨 두었었다. 그 양은 무려 10만 석이 넘었는데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왜란이 발발하고 임금이 평양을 떠나온 이후로는 인심이 험악해져 난민들이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는 일이 많았다. 임금이 가산을 떠날 무렵, 가산 군수 심신 겸이 류성룡에게 잠시 머물며 고을 사람들을 진정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가산의 관청에는 백미 천 석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명나라 군사를 돕기 위해 남겨두었던 몫이었다. 류성룡은 얼마간 대문에 앉아 있다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머물러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을 안은 난리가 났고 심신 겸은 곡식을 다 빼앗기게 되어 도망치고 말았다.

 

37. 류성룡은 정주에 머물러 있으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머물며 창고 안의 곡식을 보전하였다.

정주를 떠나 더 서쪽인 선천으로 향하던 임금은 류성룡에게 정주에 머물러 있으라 명했다.

정주는 이미 모두가 피란을 떠나 텅 빈 상태였다. 저녁 무렵 남문을 바라보니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일제히 가는 모습을 보고 류성룡이 군관에게 살펴보고 올 것을 지시했다. 그에 의하면 창고를 약탈하려는 자들로 벌써 수백 명이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류성룡은 그 가운데 9명을 잡아와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을 벗긴 다음 창고 옆 길가에서 끌고 다니게 하였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여 정주 창고 안의 곡식은 지킬 수 있었으며 용천, 선천, 철산 등 주변 고을의 창고도 보전되었다.

 

38. 얼마 후 평양을 떠난 윤좌상, 김명원, 그리고 무장 이빈 등이 정주에 도착하였다.

임금은 윤좌상이 오거든 정주에 머무르라고 하였지만 그는 명령을 듣고도 바로 임금을 향해 떠났다. 류성룡 또한 김명원과 이빈에게 정주를 지키라고 한 뒤 임금의 행렬을 뒤쫓아 용천으로 떠났다. 그는 곽산산성 밑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종사관 홍종록을 불러 명했다. 길가의 창고가 하나같이 비어 있으니 명나라 구원병이 온다 해도 먹일 것이 없다. 이 부근에는 구성의 창고만이 온전한 것 같으니 그대가 구성에 가서 사람들에게 “명나라 구원병은 이미 출발했으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량미가 부족하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 나서 군량미를 옮긴다면 후에 조정에서 큰 상이 내릴 것이다”라고 말하라 하였다. 홍종록은 충성스럽고 성실한 인물로 나라를 위해 아무리 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아 구성을 향해 떠났다.

 

39. 임금께서 의주에 도착하셨다.

명나라 장수 대모라는 자와 사유가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던 중, 평양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와 주둔하고 있었다. 그전에 요동에서는 조선의 구원병 요청에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오직 병부상서 석성만이 조선에 대한 지원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석성은 조선의 사신 신점을 불러 요동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이를 본 신점은 통곡하며 아침저녁으로 구원병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 임금은 병사 2개 부대를 파견하여 조선의 임금을 호위하도록 명하고, 경비로 은까지 하사했던 것이다.

 

40. 왜적이 평양성에서 몇 날 며칠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사신 정곤수를 비롯한 여러 사신들을 띄우며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심지어 합병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미 평양까지 함락되었기에 압록강마저 안전치 못하다는 생각에 서둘렀던 것이었다. 다행히 왜적들이 평양성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 군사들은 재정비를 하며 명나라의 구원병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으며 나라의 회복에 기틀을 마련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41. 7월 명나라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이 5천의 지원병을 거느리고 조선에 온다는 기별이 전해졌다.

류성룡은 병이 심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어려워, 임금이 좌상 윤두수에게 대신 마중을 나가 군량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류성룡은 현직 대신이 윤두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며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청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군사들이 정주를 거쳐 가산까지 가는 동안의 군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나, 안주와 숙천, 순안을 거치는 동안에는 양식이 없기 때문에 3일 치의 양식을 그전에 준비해 가야 함을 알렸으며, 구원병이 평양에 이르러 즉시 성을 탈환하지 못한다면 평양의 서쪽 고을에 있는 곡식을 운반하여 사용하면 될 것임을 알렸다. 류성룡은 대신들을 통해 이러한 사정들을 명나라 장수와 협의하여 처리토록 요청하였다.

42. 류성룡이 인심을 수습할 방법을 찾아 다른 고을에도 이 방법을 활용토록 했다.

류성룡이 저녁 무렵 소관역에 도착하였으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여 몇 명을 찾아내 공책을 펴 보이며 말했다. “지금 명나라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이때야말로 모두가 나서 공을 세울 시기이다. 후에 이 공책을 토대로 여러분의 공과 죄를 매긴 다음 임금께 아뢸 것이며, 그 내용에 따라 상도 받고 벌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이름이 없는 자들은 누구도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람이 찾아와 이름을 책에 올려 줄 것을 청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요청하였고, 땔감과 마초를 나르고 집을 짓거나 음식을 장만하는 역할을 하였다. 류성룡은 이를 통해 난을 만난 백성들을 다그치기보다는 타이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게 되어 이후로는 매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내용을 적어 여러 고을에 전하며 이 방법을 활용하도록 지시했다.

 

43. 류성룡이 안주 이후의 군량까지 마련했다.

류성룡이 정주에 도착하자, 홍종록이 구성 사람들을 모아 정주와 가산으로 날라다 놓은 것이 말먹이 콩과 좁쌀을 합해 2천 석이나 되었다. 그런데 안주 이후가 걱정되었다. 하여 임금에게 달려가 행재소로 향하고 있던 충청도 아산 창고의 세미 1200석을 군량으로 쓸 수 있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자 그곳에서 2백 석은 정주로, 2백 석은 가산으로, 나머지 8백 석은 안주로 운반토록 하였다. 그러나 안주는 적의 진영과 가까운 곳이라 일단은 배에 보관하였다.

 

44. 부교를 완성하여 명나라 군사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 무렵 첨사 장우성은 대정강에 부교를 놓고, 신계중은 청천강에 부교를 만들어 명나라 군사가 건널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유성룡은 안주로 들어가 정세를 살폈는데 당시 적병은 여전히 평양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순찰사 이원익은 이빈과 함께 순안에 주둔한 상태였고 도원수 김명원은 숙천에 있었다.

 

45. 19일 조승훈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여 후퇴하였다.

조승훈이 의주에 도착하자 부대의 선봉이 되었다. 그는 요동에서 이름난 장수로, 오랑캐와의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산에 도착한 그날 밤 자정, 조승훈 일행은 칠성문을 통해 성 안으로 쳐들어 갔다. 그런데 비가 오고 길이 좁은 탓에 말이 달리기 힘들었으며 왜적들이 조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유격대장 사유는 총을 맞아 전사하였고 많은 병사들과 말이 죽었다. 조승훈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순안과 숙천을 거쳐 안주 성 밖에 이르러 통역관 박의 검에게, “적은 많이 죽였으나 유격대장을 잃었으며, 날씨가 좋지 않아 적을 섬멸하지 못했다. 그러나 군사를 보충하여 다시 공격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치 말고 부교도 철거하지 말라”라고 했다. 말을 마친 그는 대정강과 청천강을 건너 공강정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승훈은 요동으로 돌아갔고 유승룡은 안주에 머무르면서 지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46.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도 앞바다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다.

원균은 적의 규모에 놀라 나가 싸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백여 척의 배와 화포, 무기를 바닷속에 던져 버린 후 몇 명만 대동한 채 배를 타고 달아났다. 이영남이 이를 옆에서 비판했다. 그러자 원균이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며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병사에게는 제각기 역할과 임무가 주어져 있어 조정의 명이 있기 전에는 마음대로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원균은 그 후에도 대여섯 차례에 걸쳐 이영남을 보내 원군을 청하며 뱃머리에 앉아 통곡하였다. 얼마 후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이억기와 함께 거제로 나와 원균의 군사와 합세하여 거제도 앞바다에서 적과 부딪히게 되었다. 이순신은 당시 거북선을 이용해 깃발을 흔들며 패한 것처럼 달아나는 모습을 보여 적을 꾀어낸 다음 넓은 바다로 나오자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열을 지어 벌려 섰다. 그리고는 대포를 쏘아 공격하며 수많은 적선을 파괴하였다. 그 후 왜적들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부산과 거제로 숨어버렸다.

 

47. 이순신의 승리가 왜적의 진군을 막다.

승전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임금이 대단히 기뻐하며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가 심하여 정헌대부로 승급시켰고, 이억기와 원균 또한 승급시켰다.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격하려 했었으나 거제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한 팔이 끊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평양성을 점경한 유기나라가 지원군이 사라져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순신이 한 번 이긴 결과로 조선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지방까지 지키게 됨으로써 군량의 조달과 통신체계가 확립될 수 있었다. 또한 요동과 천진 지방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되어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를 통해 조선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도 이순신은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머물며 적의 교통로를 막았다.

 

48. 전라도 전라 감사 이광 등이 전라도를 지켜냈다.

당시 왜군은 경상우도에서 전주 부근으로 들이닥쳤는데 정담과 변응정은 웅치고개에서 산길을 가로질러 막고 왜적과 싸워 수많은 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저녁 무렵 다시 쳐들어온 왜적에 의해 패하고 말았다. 다음날 적군이 전주에 다다랐고, 도망가기에 바빴던 관리들과는 달리 전적 벼슬을 지낸 이정란은 성 안으로 들어가 아전과 백성을 독려하며 성을 지켜냈다.

또한 전라 감사 이광이 가짜 병사를 만들어 세워 놓은 후 적을 혼란에 빠트리자 적은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갔으며 웅치 고개에 이르자 조선의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길가에 묻고는 큰 무덤을 만든 뒤 ‘조선의 충성스러운 정신과 의로운 기운을 기린다’ 고 써 놓고 물러갔다. 이로써 전라도만은 끝까지 안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49. 8월 1일,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 등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원익과 이빈은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김응서는 평양 서쪽에서, 김억추는 대동강 하류에서 수군을 이끌고 있었다. 그날 이원익 등이 평양성 북쪽으로 병사를 보내 왜적 선봉대 20명을 물리쳤으나 갑자기 적의 대부대가 몰려와 순식간에 많은 병사를 잃게 되어 다시 순안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50. 9월,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왔다.

조승훈이 패하고 돌아갔을 때 왜적들은 명나라를 염소에 비유하고 자신들을 호랑이라 비유하며 의기양양해하였다. 심유경은 유격장군이라고 거짓 칭호를 붙여 순안에 도착하여 명나라 황제 편지를 적진에 전달했다. 내용은 ‘조선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군대를 일으켜 난리를 피우느냐?‘ 였다. 고니시 유기 나가는 편지를 읽고선 직접 만나 협의하자고 하였다. 심유경은 단 서너 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평양성으로 갔다. 유기 나가, 요시토시, 겐소 등이 그를 맞이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심유경은 돌아왔으며, 왜적이 그를 아주 공손한 태도로 배웅했다. 다음 날 유기 나가는 편지를 보내 심유경의 안부를 물었다. 칼날 위에서도 얼굴빛 하나 변치 않으니 이보다 더 당당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칭찬이었다. 심유경은 자신이 황제께 보고하여 처분을 내릴 것이니 앞으로 50일 동안은 평양성 10리 밖으로 나와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조선의 병사들도 10리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였다.

 

51. 각 도에서는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류성룡은 안주에서 모두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라는 공문을 사방으로 띄워 보낸 적이 있었다. 수많은 의병이 있었으나 그중, 금강산 표훈사에 유정이라는 승려가 부천님 앞에 공문을 펼쳐놓고 승려들과 함께 읽으며 눈물을 흘린 뒤 승군을 일으켜 평양에 도착하였고 그 병력은 무려 천여 명에 육박했으며 평양 동쪽의 순안의 관군과 합세하였다.

 

52. 이일을 순변사에 임명하고 이빈은 행재소로 불러들였다.

이 일은 적이 평양성에 들어간 다음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이어 명나라의 구원병이 도착한다는 말이 전해지자 평양으로 향하여 평양 근처의 임원역에 진을 친 후 의병장 등과 합세하여 꽤나 많은 적을 물리쳤다. 그에 반해 이빈은 싸우기만 하면 패해 사람들은 그를 이일과 교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명원이 반대하면서 양쪽이 충돌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류성룡을 보내 해결하도록 했다. 그는 이일을 순변사에 임명하고 이일의 자리는 박명현이 대신하도록 조치하였고 이빈은 행재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53. 간첩 김순량을 사로잡았다.

12월 2일, 류성룡은 김억추에게 전령을 띄웠다. 전령에는 적을 공격하라는 내용과 함께 전령을 받은 지 6일 이내에 돌려보내라는 내용을 담았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령이 돌아오질 않자, 알아보니 군인 김순량이 수상하여 잡아들였다. 고문을 가해 자백을 하게 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적의 간첩으로 전령과 비밀공문을 가지고 평양성에 들어가 적에게 전해 소 한 마리를 상으로 받았다고 하였다. 적의 간첩은 곳곳에 분포하여 모두 40여 명이 넘었고 류성룡은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여 간첩을 모두 잡아들였다. 얼마 후 명나라 군사가 도착했는데, 이 정보를 왜적은 알지 못했다. 간첩의 활동이 중지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징비록 2권

 

1. 12월 명나라에서는 대 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제독 이여송을 대장으로, 낙상지, 오유충, 왕필적 등을 휘하로 한 4만의 군사를 압록강을 건너게 하여 파견하였다. 심유경이 돌아간 후 왜적들은 약속대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50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속았다고 생각하였다. 12월 초, 심유경이 다시 와서는 평양성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그러나 어떤 내용을 주고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명나라 대군은 안주에 병영을 설치했다. 류성룡은 제독 이여송을 찾아가 평양성의 지형과 군의 배치 내용, 공격 통로 등을 알려주었다.

 

2. 이여송이 부총병 사대수를 순안에 보내 왜적과 만나게 하였다.

사대수가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고 심유경 또한 도착해 있다.”라고 말하자 왜적들은 기뻐하였다. 1593 선조 26년 정월, 왜적은 요시츠가사에게 20여 명의 병사를 붙여 주고는 심유경을 맞도록 했다. 사대수는 이들과 술을 마셨는데 복병을 동원하자 나머지 병사들을 대부분 살해하였다. 오직 세 명만이 제 나라 진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때서야 왜적들은 명나라 대군이 파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3. 제독 이여송이 평양성을 포위하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공략했다.

왜적은 불화살에 대항하였으나 성 안이 불로 가득 차 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낙상지, 오유충 등은 직접 성을 기어올라 왜적을 공격하였고 왜적은 내성으로 후퇴하였다. 왜적은 흙벽을 쌓은 후 벌집처럼 수많은 구멍을 뚫어 그곳을 통해 조총을 쏘았으며 밤에 얼어붙은 대동강을 이용해 모두 도망쳐 나갔다.

 

4. 왜군을 순식간에 물리칠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

류성룡은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과 김경로에게 왜적이 후퇴할 길목을 막고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이시언은 즉시 떠났지만 김경로는 머뭇거려 독촉을 하여 겨우 중화로 떠났다. 고니시 유기 나가, 요시토시, 겐소, 시게노부 등 왜장들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밤을 새워 도망쳤다. 왜군의 병사들은 몸이 많이 상한 채로 행군하였으나 그들을 공격하는 조선의 군사는 하나도 없었다. 오직 이시언만이 그들을 뒤쫓았으나 겨우 뒤에 쳐져 가는 녀석들만 잡아 죽였을 뿐이었다. 만일 조선의 병사들이 왜장들을 사로잡았다면, 서울의 왜군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고 함경도에 있는 기토 기요마사 또한 퇴로가 막혀 한강 이남의 왜적들 또한 연달아 무너졌을 것이다. 류성룡은 비통해하며 김경로의 목을 벨 것을 임금에게 청했지만 제독 이여송의 공문 덕에 목숨을 건졌다.

 

5. 명나라 군대가 여석령 고개에서 왜적과 마주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1월 24일 서울로 도망친 왜적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성룡은 하루라도 빨리 진군할 것을 건의했으나 제독이 계속 머뭇거려 여러 날 만에 겨우 파주에 닿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사대수가 고언백과 수백의 병사를 이끌고 정세 파악에 나섰다가 여석령 고개에서 적과 맞부딪쳐 적 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제독은 혼자서 기병 천여 명만을 거느린 채 고개로 향했는데, 당시 적은 여석령 고개에 대군을 숨겨 두고 몇 백 명만 고개 위로 보낸 상황이었다. 이를 본 제독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산 너머에 숨어있던 수만의 적이 나타나 명나라 군사들을 포위했다. 왜적들은 3,4척이나 되는 긴 칼로 명나라 군사들을 상대했다. 결국 크게 패하고 만 제독은 풀이 죽어 밤이면 자신이 아끼던 부하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남몰래 울었다

 

6. 명나라 장수 중 장세작이란 자가 앞장서 철군을 주장하였다.

조선 측에서 물러서지 않자 그는 화난 표정으로 순변사 이빈에게 발길질을 하였다. 왜적이 온 산에 불을 질러 말에게 먹일 풀이 남아 있지 않아 만여 필의 말이 며칠 사이에 죽어 나갔다. 류성룡은, “명군이 물러나면 왜적의 기세가 등등해질 것이고 백성들 또한 놀라서 흩어지게 되면 임진강 북쪽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니 부디 좀 더 주둔하면서 형세를 판단한 후에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 하였으나, 제독은 말로만 알겠다고 하고 개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임진강을 지키는 부대는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 관승선의 병사 수백 명밖에 남지 않았다.

 

7. 류성룡이 날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진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독은 변명만 하고 시간만 끌었다. 그들이 개성에 머문 지 여러 날이 지나자 군량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은 군량이 바닥났다는 것을 핑계로 제독에게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제독이 화를 내며 류성룡과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들여 큰소리로 문책하였다. 류성룡은 나라의 모습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제독이 민망했는지 자기 휘하의 장수에게 화살을 돌렸고 적을 모두 섬멸하기 전까지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 강화로부터 군량난을 해결하였고 그날 저녁 제독과 류성룡 등은 새로운 작전에 대해 의논했다.

 

8. 제독 이여송이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그가 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고 전했다. 제독 이여송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려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개경은 왕필적이 맡게 되었다. 제독은 접반사 이덕형에게 모두 임진강 북쪽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조선의 장수들이 각각 행주, 파주, 해유령, 임진강, 동파에 머무르고 있어 그 틈을 노려 왜적이 공격을 해올까 두려워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류성룡은 제독에게 물러나서는 안될 다섯 가지 이유를 설명하며 명나라 군대가 철군하는 것을 반대했다.

 

9.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적을 크게 물리친 이후로 왜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권율은 수원의 독성산성에 진을 쳤고 이를 본 적들은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명나라 구원병이 서울을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한강을 건너와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서울의 왜적들은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성의 뒤는 강물이어서 달아날 곳이 없자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었다. 왜적들이 부대를 셋으로 나눠 번갈아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결국 돌아가고 말았다. 권율은 임진강에 도착하여 김명원과 합세했다. 소식을 들은 류성룡은 홀로 파주산성으로 향해 요충지를 살핀 후 권율과 순변사 이빈에게 명하여 그곳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적을 지키도록 했다. 또한 이시언은 해유령을, 나머지 의병장들 또한 숨어있다 적이 오면 나가 싸우도록 지시했다. 적은 성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어 많은 양의 말을 잃었다.

 

10. 또다시 왜적을 기습할 기회가 있었으나, 시행하지 못했다.

권율이 파주산성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왜적들은 원수를 갚으려고 광탄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파주산성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지형 파악에 익숙했던 그들이 그곳 지형이 매우 험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류성룡은 왕필적에게 남부에서 만 명의 군사로 강화로부터 한강 남쪽으로 나아가 왜적을 기습할 전략을 전했다. 왕필적은 정찰대를 보내 살핀 뒤 2,3천 명이면 충분히 쳐부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제독 이여송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1. 호서지방의 곡식 1만 석을 보내 백성의 굶주림을 달랬다.

왜적이 서울을 점령한 지 2년째, 온 국토가 쑥밭이 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는 것은 다반사였다. 유성룡은 호서에 머물고 있던 지사 김찬에게 공문을 띄워 남원 등지의 곡식 1만 석을 영남 지방으로 보내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지시하여 백성들의 굶주림을 달랬다.

 

12. 유격대장 심유경이 서울에 들어가 적에게 후퇴를 권유했다.

4월 7일, 제독 이여송이 평양에서 나와 개성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용산에 머물고 있는 조선의 진영에 왜적의 편지가 전해졌다. 내용은 강화를 청하는 것이었다. 심유경이 적진으로 들어가 적에게 후퇴를 권유하였고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류성룡은 강화를 맺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며 어서 공격하라는 뜻을 보였으나 제독은 이에 말뿐이었다. 유성룡은 강화에 반대하였다. 4월 19일, 제독이 대군을 거느리고 동파에 와서는 사대수의 막사에 머물렀다. 왜적이 서울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서울로 진입하기 위함이었다.

 

13. 4월 20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중국 병사들이 도성으로 들어왔으나 왜적들은 전날 이미 빠져나간 후였다. 건물은 모두 없어져 버렸고, 북쪽에 자리 잡았던 종묘와 종루, 대궐 등은 하나도 남김없이 재로 변해 있었다. 류성룡은 제독에게 가 왜적들이 멀리는 못 갔을 것이니 한시바삐 군사를 일으켜 추격해 달라 하였다. 그리고 즉시 한강으로 가 일전에 이빈을 통해 모아둔 배 80척을 확인하여 제독에게 알렸다. 잠시 후 이 여백이 만여 군사를 이끌고 강변으로 나와 강을 건넜는데 절반쯤 건넜을 때 갑자기 발병이 낫다는 핑계로 되돌아 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제독은 류성룡의 뜻에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려우니 그런 거짓 행동을 했다.

 

14. 적들은 느긋하게 후퇴하였다.

4월 23일 류성룡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고 5월에는 제독이 문경까지 적을 뒤쫓아 내려갔지만 다시 돌아왔다. 적들이 내려간 지 이미 수십 일이 지난 후였기에 별 성과가 없었다. 적들은 느긋하게 후퇴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 군사들은 적이 나타나면 피하기만 할 뿐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다.

 

15. 서울에서 물러난 적들이 해안가에 진을 쳤다.

왜적은 울산부터 거제에 이르는 지역에 무려 16곳에 진을 쳤다. 바다를 건널 뜻은 없어 보였다. 명나라에서는 유정을 지휘관으로 5천 군사를 보내 성주 팔 거에 진을 치도록 했으며 우리 군사들도 경주, 선상 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대치만 할 뿐 공격하지는 않았다. 제독은 심유경을 시켜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 돌아가도록 설득했고, 6월이 되자 왜적은 임해군과 순화군과 수행인원들을 석방하고 심유경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주성을 포위하고 설쳐댔다. 포위 8일이 되던 날,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이때 6만 명에 이르는 우리 병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적들은 부산으로 돌아가 명나라의 강화 통지를 받으면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16. 심유경은 왜장 고니시 도부와 함께 항복 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문서가 고니시 유기 나가 등이 거짓으로 만든 가짜라고 의심했다. 심유경 또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강화가 저들의 본심이 아님을 판단했다.

그는 데리고 온 고니시 도부를 요동에 머무르게 한 뒤 회답을 주지 않았다.

 

17. 유정의 군대가 제 나라로 떠나버렸다.

당시 제독과 여러 장수들은 귀국하고, 유정과 오유충, 왕필적 등의 부대 만여 명만이 팔 거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선 전역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고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유정의 군대는 서울로 돌아와 열흘 남짓 머무르더니 제 나라로 떠나버렸다. 그러나 왜적들은 여전히 바닷가에 머무르며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아 민심이 흉흉해졌다.

 

18. 10월이 되자 임금이 서울로 돌아왔고, 12월에는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그는 황제의 공문을 전했다. 공문의 내용은 ‘황제께서 그대의 나라를 침입한 왜적을 상대로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까지 되찾았으며 왕자와 수행 대신들을 석방하고 영토를 되찾게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황제의 재산과 병사, 마필의 손실이 있었다. 이처럼 조선을 위해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더 이상 군사와 식량을 조달할 수 없다. 다행히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며 봉공을 요청하고 있으니 우리 조정에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신하 되기를 허락하고 조선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 다시는 그대 나라를 침략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왜적에게 봉공을 청하게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아 불가하다며 현재의 상황을 중국에 상세하게 알리고 결과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따라서 사신 허욱을 명나라에 파견하였다.

 

19. 을미년 1595 4월, 명나라의 재촉에도 왜적은 핑계를 대며 철수하지 않았다.

심유경은 왜장 고니시 도부에게 약속을 지키면 황제로 하여금 즉시 봉을 내리겠다 하였다. 이는 봉작만 받고 조공은 요구하지 말 것과, 한 사람의 병사도 부산에 머무르지 말 것, 그리고 향후 영구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이었다. 고니시 도부가 약속을 지키겠다 하여 명나라에서는 이종성과 양방형을 일본에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하라 명 하였다. 두 사람은 가는 길에 왜적에게 빨리 바다를 건너 돌아갈 것을 재촉했으나 왜적은 상사를 보낼 것을 요청하며 철수하지 않았다.

 

20. 일본에 간 사신 일행은 국서를 전달하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심유경은 두 사신을 부산에 남겨둔 채 혼자 유기 나가와 일본에 갔다가 얼마 후 돌아왔다. 그리곤 양방형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갔는데 왜적이 조선의 문관출신 사신도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황신을 같이 보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들이 조선의 왕자를 되돌려 보냈는데 당연히 왕자가 와서 사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일 것인데 일개 벼슬아치를 사신으로 보냈다며 화를 냈다. 결국 임금의 국서를 전달하지 못한 채 사신 일행은 되돌아오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봉공 이상을 요구하며 반드시 왕자가 사의를 표해야만 철군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명나라 군사가 다시 파견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21. 이순신이 하옥된 사이 한산도에서 수군이 패하게 되어 원균과 이억기가 전사했다.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고 고니시가의 계략에 빠져 결국 이순신은 하옥되었고 원균이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이 시행한 제도를 모두 바꾸고 이순신이 신임하던 장수와 병사들을 모두 쫓아냈으며 술을 마셔댔다. 그때 왜적이 쳐들어와 서둘러 출전하게 되었으나 4백여의 군산을 잃게 되었다. 또한 밤에 연단 기습으로 인해 한산도에서 패하게 되었다. 따라서 왜적은 서쪽을 향해 나아갔고 남해, 순천을 함락시키고 육지로 올라갔다.

 

22. 조정에서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여 뒷일을 수습토록 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에서 전라도로 향하면서 고니시가 거느리고 오는 해군과 합세해 남원을 치고자 했다. 조정은 한산도가 적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새로 파견되었던 명나라 장수 양원은 남원싸움에서 왜적들과 싸우다 도망쳤고 수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오직 김효의라는 사람만이 살아 나와 그곳 상황을 자세히 알렸다.

 

23.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왜장마다 시를 잡아 죽였다.

이순신은 진도에 도착해 남아있는 12척의 배로 적장마다 시의 200척을 상대로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물리쳤다. 얼마 후 명나라의 진린이 내려와 이순신과 합세하게 되었는데 그는 성격이 포악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왜적이 습격하였을 때 처치한 것을 진린의 공을 돌린 이후로는 그에게 감복하여 무슨 일이든 이순신과 협의하며 일을 처리하고 그를 따랐다.

 

24. 1598년 10월, 이순신이 적의 구원병을 크게 물리쳤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고니시는 순천 예교에 성을 쌓고 지키고 있었는데 유정의 군대가 공격하자 고니시는 사천에 머물고 있던 시마쓰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때 이순신이 시마쓰를 공격하여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우고 수많은 왜적을 죽였으며 도망치는 왜적을 노량까지 뒤쫓았다. 그러나 총알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또한 백성들도 길가에 나와 울부짖었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바다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노후 잡기

 

1. 녹후잡기에는 류성룡이 왜란이 벌어지기 전 이상한 조짐들이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1588 무자년에는 한강의 물이 3일 동안 붉은 모습을 띄기도 하였고, 1591 신묘년에는 죽산 태평원 뒤에 쓰러져 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났다. 또 통진현에서 쓰러진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섰다. 동해에서 잡히던 물고기가 서해에서 잡히는 일이 벌어졌고 도성 안에 항상 검은 기운이 퍼져 있었다고 한다. 류성룡은 하늘이 간절히 알려 주었으나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고 기록했다.

 

2. 류성룡은 왜적의 교활함과 조선의 허술함 또한 분석하여 기록하였다.

백 년에 걸친 태평성대로 인해 백성들은 전쟁을 잊고 지내다 갑자기 왜적의 침입을 맞게 되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당시 적은 파죽지세로 몰아닥쳐 불과 10일 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쳤으니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을 써 볼 겨를이 없었으며 용감한 장수라 하더라도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4만의 군사로 평양성을 함락시키자 곳곳에 퍼져있던 적들이 모두 기운을 잃어 서울을 점령하고 있었더라도 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전국의 의병들이 활동하자 적들은 서로 통신이 두절되어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뛰어난 장수가 하나만 있었더라면 길게 이어져있던 적의 전선을 끊어 단절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평양성에서도 그들의 대군을 무찌를 수 있었을 것이다.

왜적은 전투에도 익숙했고 무기 또한 좋았다. 그러나 험준한 산이나 우거진 숲을 적에 앞서 선점한 후에 매목 하고 기습을 가했기 때문에 비록 조총을 가진 적이라 하더라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지형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정해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립과 이일 등이 이러한 계책을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숲을 활용해 궁수 수천 명을 매복시켜 놓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합지졸을 데리고 험준한 숲을 떠나 평탄한 들판에서 대적했으니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쓴다.

 

감상 

가) 감상

줄곧 임진왜란은 기습으로 인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며 조총과 활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하자면 당연히 총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류성룡의 전란의 기록과 여러 자료들을 살피면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당시의 조선과 주변 국가들의 정세를 통해 왜란의 발발 이유와 그 과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역사공부에 흥미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나) 조선은 어떻게 단 10일 만에 왜적에게 직선 대로를 내어줄 수 있었나

전해지는 유명한 장수들로는 이순신, 권율, 신립 등이 있다. 물론 이들은 각개 전선에서 맡은 바 활약을 보였다. 의병과 스님들 역시 크고 작은 활약을 했다. 그런데 상당수의 장수들은 머리가 다 풀어질 정도로 도망치기 바빴다. 적군이 몰려오는 모습에 성을 버리고 자신이 아끼던 애첩을 챙겨 도망가는 모습, 적군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전령에도 불구하고 안일한 태도로 결국 기습을 허락하고야 말았던 모습, 왜란이 발발하자 저 멀리 의주로 피신 가기 바빠 백성을 살피지 않았던 우두머리의 모습이 바로 그 반증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명나라가 조선이 왜의 앞잡이라는 의심을 하였을까.

 

다) 류성룡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류성룡이 주변 사람들을 다루는 모습이었다. 역시 고위 관료를 지낸 관록답게 그는 장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주변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무엇보다도 반란을 일으키려던 민심을 수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며, 명나라의 군사들을 먹일 군량미를 조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신분에 따라 파격적인 포상제를 실시하기도 하였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병을 양성하고 군사기구 개편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병조에서 이를 실시하지 않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류성룡이란 자가 어떻게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관으로서 역임했는지 알 수 있었으며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

 

라) 자료마다 조금씩 다른 기록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에 있을 당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침탈하여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인심을 크게 잃었으며, 왜군이 함경도까지 진격하자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 이에 분노한 함경도 백성들이 왕자들의 도주로를 일일이 써 붙여 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신하들을 잡아다 직접 적에게 바쳤다고 나와 있다. 반면 징비록에는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적에게 팔아넘겼다고 하였는데, 두 자료를 통해 조금씩 기록하는 바가 다름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징비록은 류성룡의 주관이 들어간 수필이기 때문에, 보다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마) 나라의 안위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대선이 한창일 때 ‘뽑아봤자 다 똑같은 놈들인데 투표를 왜 하느냐’고 비아냥거리던 사람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는 하나, 아직 국민의식은 그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것임이 분명했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 했다. 과거 조선의 백성들은 지도자를 뽑을 능력도 권한도 없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저마다 주권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목소리를 높일 능력이 있다. 임진왜란처럼, 혹은 최근의 최순실 게이트 사건처럼 과거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항상 후일에 대비해야 하며, 적어도 나라의 안위를 위한다면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정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젊은이들이 항상 국내외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자꾸만 사라져 가는 역사보존에 힘쓰며 잘못된 행위에 대해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을 ‘아는 힘’을 기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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