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남한산성』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저자의 생애
1948년 봄 서울 종로에서 출생, 아버지 김광주는 광복 뒤 경향신문 문화부장과 편집부 국장을 지낸 언론인이며 김구나 윤봉길과도 친분이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는 동안 그의 대필을 맡기도 하는 등 김훈은 아버지 아래서 자연스럽게 소설 수양을 해나갈 수 있었다.
1966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이나 메리셀리 등을 읽고 영문학의 낭만주의에 빠져 대학을 중퇴하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다시 영문과로 들어갔다. 군대를 다녀온 후 아버지가 사망하며 경제적인 곤란에 빠진 적이 있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했다. 신문기자 시절, 김훈은 문학기행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한국일보에 연재하는 등 문학자로서의 소질을 닦아나갔다. 그러나 1989년 돌연히 한국일보사를 퇴사하고 2년간 특별히 고정된 직업 없이 지내며 두 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1994년 겨울, 김훈이 47세일 때, 문학동네 창간호에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작가로서 데뷔한 뒤로도 김훈은 시사저널의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를 지내는 등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나 2000년 9월 27일자 한겨례21에 실린 인터뷰가 문제 되면서 시사저널을 그만두었다.
그 후, 대표작 칼의 노래 집필에 착수해 2001년에 발표했다. 칼의 노래는 곧 한국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김훈은 이 소설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로도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했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며 소설이나 에세이를 집필하고 있다.
저자의 주요 활동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다.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김훈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김훈은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라고 밝혔다. 그의 희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책 소개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인 칼의 노래와 같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김훈의 장편 소설이다.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실존 인물들의 심리와 갈등이 잘 돋보인다. 천민부터 왕까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 상황과 사건 속에서 지닌 생각과 가치관을 큰 이질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
연표
1623년(인조1년), 능양군(인조)이 광해를 폐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인조 반정)
1624년(인조2년), 인조즉위에 공을 세웠던 이괄이 2등 공신에 책록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나 진압됨
1627년(인조5년), 중립외교를 펼쳐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광해군과 달리, 인조 즉위 후 집권하게 된 서인의 친명배금정책을 택한 인조는 후금과 충돌하게 된다. 후금은 삼만병력으로 조선을 침공, 인조는 강화로 피란감.(정묘호란)
1636년(인조14년),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용골대가 청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으나,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는다. 청군이 침입하여 임금과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빈궁과 왕자들은 강화도로 피란간다.(병자호란)
1637년(인조15년), 인조는 삼전도에서 투항하고 세자 일행은 심양으로 끌려간다.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의 연호를 쓴다.
1641년(인조19년), 척화파 김상헌이 심양에 끌려가 투옥된다.
1642년(인조20년), 주화파 최명길이 심양에 끌려가 투옥된다.
1644년(인조22년),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다) 시대적 배경
이 책의 시작은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다. 그런데 이에 앞서 광해군, 선조 시절부터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알고 책을 접하면 전체적인 이해에 훨씬 수월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임금은 선조였다 이 선조는 당시 정실부인에서 난 자식은 없었다. 후궁 사이에서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을 두었으며 즉위한 지 20여 년이 지난 시기였지만 후사를 정하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후궁의 소생이었는데, 후계자만큼은 정실부인에게서 얻은 자녀로 정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전쟁 발발 후,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전쟁의 지휘권을 왕세자에게 넘기려 한다. 임해군은 너무 포악했기에 왕세자 자리는 열심히 학문에 몰두하던 광해군이 받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의병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역학을 충실히 잘 해낸다.
7년간의 전쟁 후, 선조는 피난을 떠난 왕으로서 창피함을 느꼈을 것이며 백성들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된다. 반면 다행인 점은, 무신인 이순신이나 권율은 사망하고, 유성룡같은 유능한 신하는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전쟁영웅들은 조정에 없게 된 것이다. 대신 광해군이 전장을 누비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다음 왕으로서 자질을 채워나가며 인기를 끌게 되고 결국 선조의 가장 큰 라이벌로 성장했다.
이런 가운데 광해군에게 큰 위기가 찾아온다. 선조의 정실부인이었던 의인왕후가 사망하고 새 정실부인으로 인목왕후를 맞이하며 아들을 갖게 된다. 이 아들은 영창대군이다. 광해군은 이 영창대군에게 왕세자 자리를 뺏길 뻔하지만 결국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전쟁 후 백성들의 궁핍한 상황을 잘 알았던 광해군은 전후 복구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양전사업을 하고, 허준에게 동의보감 저술을 지시하고, 경기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한다. 이런 광해군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립외교이다.
이 시기에 중국은 200년 넘게 유지한 명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관리의 부패가 심했고 왜란과의 전투에 군사력이 집중되면서 북방에 대한 견제가 소홀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북방민족이던 여진족이 힘을 키워 ‘후금’이라는 나라를 건국했고 명나라와 크게 대립했다. 이 후금은 명나라와 친하던 조선을 압박하고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 요청을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왔으므로 조선도 명나라에 강홍립장군을 파견하며 원군을 보낸다. 그러나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하고 광해군은 처벌하지 않는다. 광해군이 후금, 명 두 나라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따로 지시한걸로 추측된다. 이를 중립외교라 한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죽이게 된다. 어머니인 인목왕후는 덕수궁에 가두어뒀다. 이렇게 자신의 불안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위협이 되는 종친을 모두 제거했던 광해군은 결국 인조반정으로 유배 가게 되고 조카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며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반역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이괄의 난이다. 인조반정 때 이괄은 큰 공을 쌓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이괄은 논공행상에서 일등공신에서 제외된다. 불만을 품은 이괄은 본래 맡았던 임무인 북방의 병마절도사를 하러 가던 중 역모를 꾀하게 된다. 하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곧 집압된다.
후금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망명했는데 조선은 조선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고 군사를 원조했다. 후금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 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한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고, 후금은 형제관계로 화친을 맺을테니 명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조선과 후금은 화친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점점 세력을 키우던 후금은 국호도 청으로 바꾸고 조선과의 양국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청을 배척하자는 척화파로 나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유학을 배웠던 관리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며 척화의 입장을 택하게 되고 청나라는 쳐들어오게 되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평상시에 성 밖에서 살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성안으로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전투하는 공성전의 형식이다. 그러나 이때 청나라는 북쪽에서 중간중간에 있는 성들을 뛰어넘어 수도 한양으로 진격했다. 인조는 이 소식을 듣고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청군이 길목을 차단해 남쪽으로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또 퇴로가 차단되고,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조선군이 성안에서 식량, 물자등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이에 못 견디고 인조는 결국 항복을 선택한다. 군신관계의 요구에 응하며 청나라에 9번 절하는데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또한 세자들과 여자들을 인질로 보내게 되면서 전쟁이 끝나게 된다.
정치적 배경
임진왜란 이후, 왜적과 싸운 북인들이 크게 성장했다. 북인들은 크게 두 파로 또 나뉘었는데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나뉘었다. 소북파는 선조에게 왕세자를 영창대군으로 바꾸자고 말하지만 영창대군이 3세가 되던 해에 선조가 승하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몇 년 후, 광해군과 영창대군에게 큰 위협적인 존재인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죽음에 이르게 까지 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법적인 어머니인 인목왕후는 덕수궁에 가두어 창덕궁 출입을 못하게 한다. 어머니를 가두고 동생을 죽이는 폐모살제의 행동은 대의와 명분, 효를 강조하는 서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렇게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발생하여 서인이 집권세력이 된다. 대의와 명분, 효를 강조하는 서인정권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요시해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배금 정책을 택한다. 그렇지만 이 정책은 후금으로 하여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했다.
목차별 줄거리 요약
눈보라 - 주병력이 기병인 청은 엄청난 속도로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강들은 얼어 이들에게 더 빠른 진격을 허락했다. 안주가 무너졌다고 온 장계는 청병들이 안주를 떠난지 금세 도착했다. 적은 안주성을 함락하고 온 것이 아니라 안주성을 멀리 돌아 와 우리 군은 싸우지도 못하고 보내야 했다.
영의정 김류는 개성의 군사들을 평양으로 보내야 한다 하고 병조판서 이성구는 군사들이 당도하기 전에 평양은 이미 위태로울 거라며 임진강 이남으로 내려서 파주를 지키자고 했다. 그러나 곧 적병이 개성을 지났다고 장계가 오게 되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준비한다.
여진의 족장 누르하치는 만주의 모든 부족을 합쳐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황제의 누런 옷을 입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칸은 명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다른 부족장들의 목을 베어 명 황제에게 바쳤고, 명 황제가 상을 내리며 마음을 푼 사이에 명을 위협했다.
언강 - 늙은 누르하치가 종기로 죽고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는 형들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청이라 하고, 명령을 칙이라 했으며, 가르침을 조라 했고, 스스로 짐을 칭했다. 새로운 칸이 된 홍타이지는 요동을 차지했고, 북경을 포위하며 명의 숨통을 거의 끊었다.
이 무렵, 조선 왕에게 국서를 보냈다. 명의 연호를 버리고 명에 대한 사대를 청으로 바꾸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 군신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에선 척화론의 입김이 세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준비한다. 행렬이 막 궁을 떠났을 때, 적의 추격이 이미 파주에 들어왔고 기병 선발대는 무악재 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또 한 부대는 강화로 가는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행렬은 방향을 틀어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달아나는 자들이 많았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도착 후, 이틀 후 청의 주력이 송파나루를 건너왔다. 강은 하류까지 얼어 있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멀리서 둘러싸고 좁혀 들어왔다.
푸른 연기 - 성은 강으로 격절되었고, 강의 여울이 사나워서 적의 대병이 건너오기 어려웠다. 성벽 밖은 산줄기가 가파르고 첩첩해서 적의 기병이 다가오기 힘들었다. 지리적으로 매우 우세한 성이었다.
왕이 남은 군량이 얼마인지 물으니 관량사가 사오십일이라 대답했다. 초저녁 어둠이 새파랬고 내행전 구들을 달구는 장작불 연기가 퍼졌다. 푸른 연기가 흐린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뱃사공 - 예조판서 김상헌이 급보를 받고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갔다. 채비 후 혼자서 떠났다. 말을 타고 송파나루에 도착했다. 청병이 온다는 소식에 나루터 마을은 흩어졌다.
빈 마을에 늙은 사공이 한 명 남아있었다. 사공의 어린 딸이 김상헌에 따뜻한 마실 거리를 내어줬다. 김상헌이 사공에게 왜 떠나지 않냐고 물었다. 사공은 갈 곳도 없고 할 수 있는게 이 일뿐이라 갈 수도 없다고 했다. 김상헌이 물고기로 겨울을 나려는지 되묻자 사공은 청병에게 길을 인도해 곡식을 얻어 겨울을 날거라 한다. 김상헌은 마음이 울컥했다. 사공은 어제 어가도 사공의 도움으로 강을 건넜으나 좁쌀 한 톨 받지 못했다고 했다.
김상헌은 자신을 건너게 해주는 대신 말을 주려 했으나 사공은 필요 없다고 하며 받지 않고 그냥 건너게 해주었다. 건너고 헤어질 때 김상헌은 사공을 베고 울었다.
대장장이 - 대장장이 서날쇠는 아내와 쌍둥이 두아들이 있었는데 아내와 쌍둥이 둘을 남한산 밖, 아내의 친정으로 피신시켰다.
어가가 성안에 들어오던 날 백성들은 청병이 곧 들이 닥칠거란 걸 알았고 적막했다. 임금이 입성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가까운 고을 수령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군사들은 많지 않았고 옷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등등 군병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서날쇠는 숙련되고 노련한 대장장이었다. 자신의 대장간에서 무기, 농기등을 만들었다. 서날쇠는 밭도 있었는데 동네 사람에게 소작을 주었다.
소화가 잘된 곱고 굵은 똥을 물에 풀어서 일 년쯤 삭혀 익어내 밭에 뿌렸다. 그러면 배추 잎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았고 땅 힘을 돋우었다. 대장간 뒤뜰에 이런 똥독이 묻혀있었고 익어갔다.
청병은 성의 남문, 동문을 막았고 오래 머물 채비를 했다.
겨울비 - 겨울비가 내리자 밤새 군병들은 젖고 얼었다. 조정은 종친과 사대부들, 승려, 백성들에게 여벌의 옷을 거두어 군병들을 갈아입게 했다. 임금은 마당으로 내려가 젖은 땅에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찧었다. 임금은 오래 울고 깊이 젖었다. 세자도 나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봉우리 - 청장 용골대가 삼전도 본진을 출발해 산성 외곽을 수색 정찰했다.
정명수는 평안도 은산 관아의 세습 노비였다. 은산은 여러 제국과 왕조의 변방이었고 누구의 땅도 아니었다. 그는 노비가 왜 자식을 낳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비와 함께 묶여 매맞고, 어미와 함께 얼어서 부둥켜안고 잠드는 날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아홉 살에 얼어 죽은 여동생을 제 손으로 묻으면서 열두 살이었던 그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통나무를 나르다 비탈에서 미끄러지는 소 달구지에 치여 죽었다. 어머니는 동생의 해산 뒤끝이 덧나서 죽었다. 정명수는 그들의 죽음이 편안했다. 죽음으로써 혈육의 관계에서 놓여나는 것이 홀가분했다.
세습 노비에게 나라는 없었다. 그는 젊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눈치로 단련된 총기는 예민했고 여진말과 몽고말을 쉽게 배웠다.
청장 용골대는 조선군영에서 도망쳐온 병사들, 탐관오리의 수탈을 못 견딘 조선 유민들을 다 붙잡아 보병 부대를 편성했는데 정명수도 이에 포함됐고 용골대의 총애를 받았다.
정명수는 칸의 사신으로 오는 용골대를 받들어 몇 차례 조선을 다녀갔다. 스스로 조를 일컫는 칸의 문서를 조선에 전했다. 칸의 위엄, 용모, 인품, 소망과 근심을 자신의 말로 조선 조정에 옮겼다. 정명수는 조선의 유신들을 품계에 관계 없이 모두 김공, 이공으로 불렀다.
정명수는 조선으로 진공하는 용골대를 받들어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다. 정명수는 조선인 투항자들로 구성한 척후 부대를 스스로 지휘하며 뒤따르는 부대들의 길을 인도했다. 정명수는 정복자의 군대를 거느리고 은산으로 들어가 짓밟아버리고 싶어 용골대에게 간청했으나, 갈 길이 바쁜 용골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용골대가 성벽 외곽을 둘러보는 중 산봉우리 하나가 돌출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높지 않았지만 꼭대기가 펑퍼짐해 소규모 부대가 머물 만했고, 시야도 좋았으며, 성벽에서도 가까웠다. 칸이 삼전도 본진에 도착하면 용골대는 칸을 그 봉우리에 모셔 꼭대기에서 성안을 겨누어 화포 수십 발을 쏘아대 칸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다.
말먹이 풀 - 조선군은 성벽 언저리에서 말이 먹을 풀을 구하려 했으나 청이 이를 눈치채고 다 불태웠다. 말이 먹을 풀도 없고 군병도 굶주리기에 조선군은 말고기와 말국을 먹었다.
계집아이 - 며칠째 장계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계집아이 하나가 적의 진지로 막혀있는 남문 쪽에서 들어와 쓰러져 있는 걸 수문장이 발견해서 데려왔다. 송파나루 사공의 늦둥이 딸, 나루였다. 청병들은 이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고 군막 밖으로 끌어냈다. 왕은 예조판서 김상헌에게 아이를 조치하게 했다.
똥 - 예조판서 김상헌은 나루를 서날쇠에게 보냈다. 처자식을 성 밖으로 내보내고 홀로 된 서날쇠는 아이를 반겼다. 오랫동안 아비를 수발해온 나루는 간단한 부엌살림을 꾸렸다.
사공을 죽이고 그 딸을 거두게 되는 인연에 김상헌은 소름 돋았다. 김상헌이 서날쇠의 마당으로 들어서면 나루가 뒤란에서 나와 절했다. 김상헌이 머리를 쓰다듬으려했으나 팔이 나아가지 않았다.
김상헌이 대장간 뒤 장독이 무엇인지 물었다. 서날쇠는 똥이라하며 보여주었다. 김상헌은 성안 모든 사람들의 똥을 거두어 성첩에 쟁여뒀다가 적병이 성 뿌리에 붙어 기어오를 때 바가지로 퍼 끼얹을 생각을 했으나 서날쇠가 썩 좋지 않은 생각이라 일러 김상헌은 수긍했다.
김상헌은 서날쇠의 성첩 군역을 면해주는 대신 대장간을 가동시켰다. 서날쇠는 총, 화살 등 병기들을 고치고 만들었다.
바늘 - 병조판서 이성구가 무명으로 천막을 만들어 성첩의 눈비를 가리자고 왕께 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바늘은 작고 약해서 마땅치 않아 예조판서 김상헌이 서날쇠에게 새로 제작할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서날쇠가 실도 없음을 일깨워 주고 김상헌은 실까지 부탁하게 되며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웃으면서 곡하기 - 서문으로 청장 용골대의 문서가 들어온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문서가 딱히 왕에게 오는 것이 아니므로 아뢸 수 없고, 보낸 자가 누구인지 명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응답할 필요도 없고, 무례한 문서로 어전을 더럽히고 성심을 다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이조판서 최명길은 문서가 비록 무례하나 이적을 상대로 예를 논할 수 없으며, 임금을 향한 문서가 아니므로 왕에게 욕될 것이 없고, 보낸 자의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지 않더라도 적진에서 성안으로 들어온 문서임에 틀림 없으므로 글을 지어 응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땅히 왕에게 주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몰 후 영의정 김류가 홀로 청대한 자리에서 임금에게 문서의 일을 아뢰었다. 임금이 신료들을 불러들여 서안에 대해 들었다.
김상헌은 화친은 투항이라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서 불살라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자고 한다.
반면 최명길은 청이 성을 말려 죽이려는 건데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나아가 싸울 수 없다며 화친을 주장한다. 둘은 청과의 화친을 맺어야 할지 말지에 대해 팽팽한 설전을 벌인다. 김상헌은 이런 최명길을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한다고 비꼰다.
사다리 - 이조판서 최명길이 비밀 왕명으로 청의 진지로 들어갔다. 들어가며 청진을 살폈다. 최명길이 청장 용골대에게 청으로 돌아가길 요구했다. 용골대는 세자와 대신들을 보내고 칸의 조칙을 받으면 가겠다고 했다. 최명길은 수긍할 수 없었다.
청군이 성곽을 타고 넘어올 사다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돌아가게 된다.
밴댕이젓 - 점점 식량이 떨어져 가고 그나마 밴댕이젓이 있음을 발견하지만 이것도 적다. 성첩에서 적들이 올라오면 밑으로 던질 돌멩이들도 끝을 보인다.
소문 - 최명길이 청의 간첩이라는 소문이 돈다.
길 - 수로, 육로 등 길을 찾아보려 하지만 답이 보이지 않는다.
말 먼지 - 왕이 군사들에게 격려하며 돼지를 잡아 끓인 국과 쌀밥에 콩을 버무린 밥과 술을 힘내어 싸우자는 교시와 함께 내렸다. 또한 군사들과 신하들은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을 죽이자고 했다.
망월봉 - 삼전도 본진을 출발한 보병과 포병들이 망월봉으로 올라갔다. 용골대의 특명으로 망월봉에 길을 내고 진지를 구축하는 공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포구를 성안 행궁과 관아 쪽으로 돌려놓고 조준을 고정시켰다.
조선에서는 왕의 유지와 격서가 공포되자 다시 사기가 증진됐다. 또한 이조판서 최명길을 죽여야한다는 애기도 계속해서 나왔다.
돼지기름 - 왕과 대신들은 최명길을 찾지 않았다. 수어사 이시백이 최명길을 사형시킬 거란 소문이 돌았다. 이시백과 최명길은 동문수학한 벗이었다. 어느 날 이시백이 최명길을 불렀고 이시백은 돼지기름으로 병사들 환부에 발라주고 있었다. 최명길과 이시백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했다. 이시백은 최명길이 사형 당할 일은 없을 거라 했다.
격서 - 왕이 병조판서 이성구에게 격서를 보내라고 일렀지만 사람을 구하지 못해 보내지 못했다. 사대부를 보내자하니 길을 전혀 모르거나 늙어 보내지 못했고, 금군은 대궐 밖을 몰랐고, 경병은 서울 밖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백성을 보내고자 하니 그대로 튈까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별할 수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서날쇠를 찾아간다. 서날쇠는 대장장이 일을 하며 외부에도 많이 다니고 믿을 수 있었기에 김상헌이 간곡히 부탁했다. 서날쇠는 김상헌의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고 다른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왕은 문서를 맡겨 내보낸다.
서날쇠는 새벽에 일어나 성벽 배수구를 향해 갔다. 김상헌도 따라가며 배웅해주었다. 헤어지면서 서날쇠가 김상헌에 큰 절을 하고 김상헌도 맞절로 받았다.
온조의 나라 - 왕의 명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제사가 진행되었다. 영의정 김류, 이조판서 최명길, 예조판서 김상헌이 진행했다.
쇠고기 - 해가 바뀌어 왕이 동방의 예법에 따라 청군에 세찬을 보냈다. 그러나 청장 용골대는 성이 주려있으니 다시 도로 가져가서 먹으라고 하며 받지 않았다.
설날 - 칸이 삼전도에 도착하고 청장 용골대가 맞이했다. 용골대는 칸을 망월봉으로 모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마침 남한산성 안에서 조선 국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조선 임금과 신료들도 망월봉의 황기들을 보며 칸이 왔음을 알게 됐다.
물비늘 - 송파강의 물비늘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있는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설이 지나고 문안이라는 명목으로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온 사신을 칸은 만나지 않았다. 대신 투항할지 싸울지,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알리라는 문서를 보냈다.
답서 - 칸의 문서가 들어온 날,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파들은 답서를 보내지 말라했다. 왕은 김상헌에게 답서를 지어보라 권하지만 김상헌의 극심한 반대로 최명길을 통해 답서 지을 사람을 구했다.
문장가 - 정오품 교리, 정오품 정랑, 정육품 수찬이 답서를 쓰게 되었다. 이들은 나이 들어서 급제한 뒤 유배와 좌천과 파직을 거듭해온 노신들이었다. 그들의 문장은 말을 다져서 단아하고 명료했다.
이들도 면하길 바랬으나 왕은 강제했다. 정육품 수찬은 밤새 잠들지 못했고 왕에게 거절의 글을 올렸다. 왕은 이를 보고 김류를 시켜 곤장을 내렸다. 정육품 수찬이 매를 맞던 날 저녁 정오품 교리가 죽었다. 그는 문장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글이 간택되어 칸에게 보내지면 후세 대대로 이어질 치욕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다. 교리는 원래 협심증을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심장이 터져 자연사했다. 정랑이 글을 썼는데 간택되지 않을 글을 지었다.
역적 - 최명길이 결국 글을 지었다. 왕의 뜻에 따라 청으로 돌아가달라는 글이었다. 왕이 이 밀명을 내렸다는 것이 퍼지게 되었고 왕은 숨길 수 없었다. 따라서 신하들 앞에서 공개하게 되었다. 새
벽에 서날쇠가 들어왔다.
빛가루 - 서날쇠가 들어와 김상헌에게 보고하지만 칸에게 가는 국서는 이미 삼전도로 보내졌다. 서날쇠에게 격서를 전달받은 감사들, 관찰사들이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 근처에 와서 전투를 헸지만 형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국서는 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 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장 용골대가 망월봉에서 성 안으로 홍이포를 방포하도록 명했다.
홍이포 - 칸은 남한산성으로 보내는 문서를 다시 작성하게 했다. 일부 청병은 강화산성으로 향했다. 강화산성 안에는 원손과 빈궁, 왕자와 예조판서 김상헌의 형 김상용을 포함해 원로 대신들이 있었고, 피란민들이 성첩을 지켰다. 그러나 매우 밀렸고 김상용은 자살했다. 청병은 조선왕자 두명과 빈궁, 숙의 사녀들을 붙잡아 삼전도로 향했다.
반란 - 군병들은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신하들이 달랬다.
출성 - 봄이 오고 강이 녹았다. 임금은 출성할 것을 명했고, 많은 신하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왕은 반발을 들어주지 않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지만 도승지가 일찍 발견해 실패했다.
두 신하 - 청은 출성시 척화파 신하를 묶어 잡아 올 것을 요구했다. 마침 윤집과 오달제라는 신하가 자진해서 잡혀주었다. 윤집은 서른 살이었고 처와 세 아들이 남양으로 피란을 갔는데 남양이 적에게 함몰되어 생사를 모르고, 오달제는 스물일곱 살로 성 밖에 노모와 임신한 처가 있었다. 왕은 오열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앞장서고 대열은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흙 냄새 - 조선 왕은 칸에게 아홉번 절하고 세자가 따랐다.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는데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고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성안의 봄
남한산성 주변에 배치된 청병들은 빠졌고 조정이 성을 나가자 군병들은 성첩에서 내려와 누워 자거나 민촌을 기웃거리며 밥을 얻어먹었다. 이시백은 병장기를 회수하고 조총과 창을 거두어 성안 무기고에 넣었다. 민촌의 노인들은 봄나물을 캤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강화로 가 형의 유골을 수습하고 관향인 안동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서날쇠는 다시 가족과 만났고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 누구와 혼인시킬지 생각하며 웃었다.
감상 및 소감
인조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는 인조반정과, 삼전도의 굴욕이다. 역사에 관심은 조금 있었으나 따로 공부하진 않아 잘 알진 못했다. 부끄럽지만 남한산성이 인조와 관련되었는지는 이 책을 보고 알게되었다. 또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는 나라를 팔아먹는 단순 매국자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화파와 척화파는 청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일 뿐이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과는 전혀 무관했다. 또한 주화파든 척화파든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시행했던 것처럼 인조도 의리와 명분보다는 백성들을 생각해 좀 더 실리를 추구하며 중립외교정책을 택하다 친금정책을 택했으면 훨씬 더 백성들에게도 왕의 품격에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선조도 그렇고 인조도 그렇고 뛰어난 신하들이 있었지만 리더의 역량이 부족해서 나라의 위기를 잘 극복해내지 못한거 같다.(물론 국제 정세의 영향도 컸음) 이로써 리더의 영향과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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