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삼국유사』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책 소개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스님인 일연이 쓴 책이다. 일연은 당시까지 전해지던 과거의 기록들을 인용하여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 중 하나이다.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해 쓰여져 정제된 체재와 문장을 가진 반면,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힘으로 쓰여져 그 체재나 문장이 『삼국사기』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의 신분이 스님이라는 것과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책의 내용이 불교와 신라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함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어긋나 누락시킨 기록들도 『삼국유사』에는 온전히 수록되어 그만의 특색과 가치를 지닌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150여년 뒤에 나왔는데 그동안 고려 사람들의 의식이 변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나온 당시는 사대의식이 강했던 반면, 그 후 한족의 송나라가 망하고 몽골족의 원나라가 들어서자 사대의식이 비교적 약화되었다. 『삼국유사』는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쓰였기 때문에 일연은 이 책을 통해 고려인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더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건국신화인 단국신화가 수록되고 당시의 민속, 고어휘, 성씨록, 지명 기원, 사상, 신앙, 일화 등 한민족의 특성이 반영되었다.
『삼국유사』의 전체적인 구성은 총 5권제로 나누어져 있다. 이를 내용상으로 크게 분류하면 역사 위주의 1, 2권과 불교 위주의 3, 4, 5권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권1에는 「왕력」과 「기이」가 있는데 「왕력」에는 삼국 및 가락, 후삼국의 왕대와 연표가 실려있고 「기이」에는 고조선부터 삼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권2는 권1과 달리 편목이 따로 있지 않고 신라 문무왕 이후의 통일신라와 후백제 및 가락국기에 대한 내용이 이어진다. 권3에는 「흥법」과 「탑상」이 있는데 「흥법」은 불교를 전해준 여러 스님들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고 「탑상」에는 탑이나 불상에 얽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권4는 「의해」로 신라시대의 학승 및 율사의 전기를 모았다. 권5의 「신주」는 밀교[1] 신승의 사적을 다루었고, 「감통」은 근행감응(勤行感應)[2]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 이어진다. 「피은」은 속세를 떠나 숨어 살며 도를 닦은 스님들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이며, 마지막 「효선」은 사람들의 효행과 선행 이야기이다.
저자소개
일연의 생애
일연(一然)은 1206년(희종 2)에 태어나 1289년(충렬왕 15)까지 살던 고려 후기의 승려이다. 그는 경주 인근 장산군(현 경상북도 경산시) 삼성산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견명이었고 자는 회연(晦然),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일연이라는 이름의 뜻은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본다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담긴 이름이다. 일연이 살다간 시대는 최충헌과 최우가 집권하던 무신정권기에서 몽골과의 긴 전쟁 끝에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던 시기에 걸친 때로, 국내외 정세 변동이 급격했던 시기였다. 그는 9세에 무량사에서 학문을 닦았고 14세에 본격적으로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로 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불문을 공부하다 22세에 승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일연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본 이후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집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는 백성뿐만 아니라 왕에게도 힘이 되는 존재였다. 충렬왕은 1283년에 일연을 국존[3]에 추대하여 그의 설법을 들었다. 일연은 왕에게도 부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 아니라 외적의 침략으로 불에 타버린 대장경을 다시 새기는 작업의 완성을 기념하는 행사를 주관하는 등 여러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모습에 조정 대신들도 그에게 예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몽골의 침략
그가 살던 1206년부터 1289년까지는 고려 후기에 속한다. 고려 후기는 한마디로 ‘몽골의 고려 침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몽골에 대항하는 백성들의 수난과 고통의 삶이 이어졌다. 최 씨 무신 정권이 차츰 안정될 무렵, 중국 북쪽에서는 테무친이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가 바로 유명한 황제 중의 황제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칭기즈 칸’이다. 그는 몽골의 기병을 앞세워 금나라부터 중국, 유럽의 일부 지역까지 휩쓸었다. 고려에도 이들이 침입하였는데 그때가 바로 1231년이다. 귀주성에 있는 고려군들은 힘을 다해 성을 지켰고 몽골의 장수는 “우리 공격에 굴하지 않는 군사들은 처음 보았다.”고 하며 귀주를 포기한 후 개경을 에워싼다. 고려가 그들에게 선물을 바치고 화해를 청하자 몽골군이 물러났고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는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1232년,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몽골은 약 30년 동안 여섯 차례나 침략했다. 침략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마을이 잿더미로 변하고 죽은 백성의 수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고려의 백성들은 거세게 저항하며 나라를 지켰다. 몽골의 침략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1251년에는 몽골에 대항하는 정신을 담은 팔만대장경이 완성되었다. 1270년, 원종은 힘이 약해진 무신 정권을 끝낸다. 그러나 무신 정권의 군대로 몽골과의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삼별초는 몽골에 항복한 고려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끝까지 몽골과의 강화에 반대하였지만 결국에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무너진다.
내용 요약
1. 제2 기이
일연이 말하길, 성인이 나라를 창건하여 교화를 베풀 때에 그 누구도 괴변이나 도깨비 이야기는말하지 않았지만 제왕은 하늘이 천자가 될 자에게 주는 신비로운 표적을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음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일을 통해 탄생하였음을 밝히고자 기이편을 작성하였다. 기이편에는 고조선, 위만조선, 마한, 2부, 78국,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말갈, 발해, 이서국, 5가야,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변한, 백제, 진한, 사철 놀이택, 신라 시조 혁거세왕, 제2대 남해왕, 제3대 노례왕, 제4대 탈해왕, 김알지, 연오랑과 세오녀, 미추왕, 내물왕과 김제상, 제18대 실성왕, 지철로왕, 진흥왕, 도화녀와 비형랑, 선덕여왕, 진덕여왕, 김유신, 태종 춘추공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다.
「고조선」
옛날 환인에게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환웅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어 했다. 환인은 아들의 뜻을 알고 태백 땅에 아들을 내려 보낸다. 환인은 무리 3000명, 바람의 어른, 비의 어른, 구름의 어른과 함께 태백으로 내려와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며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이것만 먹으라고 명했다. 호랑이는 인간이 되지 못했지만 곰은 인간이 되어 그와 아이를 낳는데 이가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말갈과 발해」
통전에 따르면 발해는 원래 말갈로 그 추장 조영이 나라를 창건하고 그 이후부터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렸다고 한다. 이후 명황이 왕위 계승을 시작하고 연호를 고치니 이때가 바로 해동 지역의 강국이 되어 이 지역에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 후에 거란이 이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하게 된다.
당나라 시대의 학자인 가탐이 말하길 발해국의 압록, 남해, 부여, 추성 네 고을은 모두 고려의 옛 땅이라고 하였다. 삼국사에 따르면 백제 말년에 발해, 말갈, 신라가 백제의 땅을 갈랐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말갈과 발해가 갈라져 두 나라가 된 셈이다. 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남쪽에는 왜가, 서쪽에는 백제가 있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이를 나라의 해악으로 여겼으며 말갈의 땅은 지금의 강릉 지방인 아슬라주에 접하고 있다고 하였다.
「북부여」
고기에 따르면 기원전 59년 4월 8일에 천제가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지상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고 지은 후에 자칭 이름을 해모수라고 하였다. 그는 아들 부루를 낳았다.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옮기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생겨나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동부여」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신하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너는 이곳을 피하라. 동해 해변에 토지가 기름진 가섭원이라는 땅에 왕도를 두어라.”라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부루가 늙어서 자식이 없으니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달라고 하였다. 이에 금빛 개구리 형상의 어린아이가 큰 돌에서 나왔는데 그 아이가 ‘금와’이다.
「고구려」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 씨고 이름은 주몽이다. 처음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자리를 피하고 나서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말하길 “나는 하백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인데 아우들과 놀던 중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는 사나이가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 밑 압록강변에 두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의 말을 들었다고 꾸짖고 이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는 이를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깊이 감추었는데 햇빛이 그녀를 계속해서 비추었다. 그 후로 그녀는 태기가 있어 알 한 개를 낳으니 크기가 다섯 되는 되었다. 왕은 개와 돼지에게 이것을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고 소와 말조차 이를 피했다. 들에 알을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이를 덮어주었다. 결국 그 알은 다시 어미에게 돌아가게 되고 알을 깨고 나온 것은 아이 한 명이었다. 그 아이는 골격이나 외양이 영특하고 신비로웠으며 나이 7살에는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맞추어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출 정도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활 잘 쏘는 자, ‘주몽’이다.
금와의 7명의 아들은 항상 주몽과 놀았는데 모두 재주가 주몽을 따를 수 없었다.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하길,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일 빨리 처치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주몽에게 말을 먹이게 하였는데 주몽은 그중에 날쌘 놈은 알고 먹이를 덜 주어 여위게 만들고 굼뜬 놈은 잘 먹여서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진 놈을 자신이 타고 여윈 놈을 주몽에게 준다. 주몽의 어머니는 여러 왕자들과 신하들이 장차 주몽을 해칠 것을 알고 그에게 떠나기를 권하였다.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과 함께 엄수에 가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인데 오늘 도망을 가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쫓아온다.”고 하여 고기와 자라들이 그에게 다리를 만들어 준다. 주몽은 졸본주에 와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변한과 백제」
신라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지 19년에 변한 사람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본기에 따르면 온조가 일어난 것은 혁거세나 동명보다도 40여 년이 늦다. 그런데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 땅에 살았다는 것은 온조의 계통이 동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며 백제 땅에는 본래 변산이 있었으므로 이곳이 변한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최치원이 “변한은 백제이다.”고 한 말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
진한 땅에는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무산 대수촌, 취산 진지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6 고을이 있었다. 각 고을마다 촌장이 있었는데 차례대로 알평, 소벌도리, 구례마, 지백호, 지타, 호진이다. 이들은 사이가 좋았으며 항상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였는데 어느 날은 백성들이 모두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였다. 그들은 해결책이 왕을 두는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고 먼저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도읍을 정하기 위해 높은 산을 오르던 중 남쪽에서 반짝이는 우물가를 발견하는데 그 주위에 이상한 기운이 가득하고 흰 말 한 마리가 절을 하고 있었다. 촌장들은 그곳에서 큰 자줏빛 알 한 개를 발견하고 이를 깨니 사내아이가 있었고 그들은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 아이의 이름이 바로 ‘박혁거세’이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후 사량리에 있는 ‘알영’이라는 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촌장들은 그 아이가 박혁거세의 신붓감이라고 정하였다. 두 아이는 남산 서쪽 기슭 궁궐에서 자라 왕과 왕비가 되었다. 혁거세는 나라 이름을 ‘서라벌’(후에 계림국에서 나중에는 신라가 됨)이라고 짓고 61년 동안 다스렸다.
「수로왕」
남쪽 바닷가에 이름도, 왕도, 신하도 없는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9간이 7만 5000여 명의 백성을 다스리고 있었다. 불행한 일을 막기 위해 깨끗이 목욕하고 술을 나눠 마시는 계욕일에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가자 사람은 없는데 사람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하늘에서 내게 이곳에 내려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명령하셨다. 너희들은 지금 곧 이곳의 흙을 한 줌씩 쥐고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고 노래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목소리를 따라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상자가 내려왔다. 상자 안에는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 알은 모두 어린아이로 변하였다. 아이들은 열흘 남짓이 되자 키가 9척(약 273센티미터)가 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알에서 나온 이가 ‘수로’였는데 그는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가야국’이라고 정하였다.
수로왕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리던 어느 날 탈해왕이 찾아와 임금 자리를 두고 승부를 두자고 하였다. 탈해는 즉시 술법을 써서 매로 변했는데 이를 본 수로는 독수리로 변하였다. 탈해가 다시 참새로 변하니 수로는 새매가 되었다. 탈해는 수로에게 “제가 매가 되었을 때 임금께서는 독수리가 되어 저를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 제가 참새가 되었을 때는 새매로 변하니 저를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살려주심은 아마도 임금이 산목숨을 함부로 죽이기 싫어하는 어진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고 하며 항복하였다.
「탈해왕」
신라 제2대 남해왕 때, 배 한 척이 신라 동쪽 바닷가에 있는 아진포에 이르렀다. 아무도 그 배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고기를 잡던 할머니만 그 배를 발견하였다. 배에 다가가자 사람은 아무도 없고 큰 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상자는 길이가 6미터는 되었고 너비는 약 4미터였다. 그 상자를 여니 아주 단정한 사내아이와 그 아이의 종들 그리고 수많은 보석이 들어있었다. 아이는 자신을 소개하며 “저는 용성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는 28명의 용왕이 있었습니다. 저희 부모는 아이가 아닌 알을 낳아 알을 상자에 넣고 시종들에게 알을 보살피라고 명하였습니다. 저는 바다에 띄워졌고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나자 어디선가 붉은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이 배를 호위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렀습니다.”고 말하였다. 이 아이는 알을 깨뜨리고 세상에 나왔다는 뜻을 가진 ‘탈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탈해는 신통한 힘으로 호공의 집을 빼앗고 나중에는 왕위에 오른다.
「신문왕」
바다 한가운데 있는 산이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에는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다. 산 위에 있는 대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왕은 이를 이상히 여겼고 일관[4] 김춘질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김춘질은 문무왕이 용이 되어 김유신 장군과 함께 나라를 지켜주시며 그들이 선물을 주려고 한다고 하였다. 신문왕이 선물을 받기 위해 바다로 나가자 그 산에서 용 한 마리가 나와 옥대를 전해주었다. 용이 말하길 “산과 대나무가 갈라졌다 합쳐지는 것은 손뼉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듯이 대나무는 합쳐져야만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부디 대나무가 합쳐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부십시오. 그러면 온 나라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옥대는 돌아가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께서 만드신 것입니다.”고 하였다. 용이 말한 대로 하자 쳐들어오던 적의 군사들도 물러갔고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도 다 낫게 되었다. 또 가뭄이 들었을 때는 단비가 내리고 파도가 심할 때는 잔잔해졌다. 신문왕은 그 피리를 나라의 보물로 삼고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신무왕」
신무왕은 왕이 되기 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민애왕을 미워했다. 그는 민애왕을 죽이고자 하였고 어느 날 장보고를 불렀다. 그는 장보고에게 원수를 갚아준다면 그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하였다. 장보고는 이를 수락하고 남몰래 군사들을 훈련시켜 민애왕을 쫓아냈다. 신무왕이 왕이 되자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자 했는데 신하들은 장보고가 왕족이 아닌 천한 출신임을 주장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왕은 결국 신하들의 말을 따랐고 장보고는 신무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바다를 지킬 때 그가 왕을 해치려 한다는 소문이 돌게 된다. 신무왕은 그 소문을 듣고 장보고를 죽였다.
「무왕」
백제에는 ‘서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집이 가난해 마를 팔며 어머니를 모셨다. 서동의 어머니는 옛날에 사비(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남쪽 연못가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결혼하여 서동을 낳았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가 매우 아름답고 심성도 곱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와 결혼하고자 하였다.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 사람처럼 옷을 입은 후 신라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노래를 가르쳤다. “선화 공주님은 밤이 되면 살짝 나와서 서동님을 몰래 안고 가지요”. 노래는 궁궐까지 퍼지게 되어 진평왕은 선화 공주를 귀양 보낸다. 선화 공주는 왕비에게 금 한 말을 받아 정처 없이 떠돌다 젊은이를 만나는데 그 젊은이는 선화 공주를 잘 돌봐 주었다. 선화공주는 이자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제서야 젊은이는 자신이 서동임을 밝히게 된다. 서동은 공주에게 용서를 빌었고 공주는 하늘의 뜻이라며 서동을 용서하였다. 둘은 백제로 돌아갔고 그곳의 산에서 금을 캐며 살았다. 그들은 금과 함께 그간의 사연이 적힌 편지를 신라로 보냈고 진평왕은 이를 보고 서동을 칭찬하고 인정했다. 서동은 금을 더 많이 캐내 백제 사람들을 돕고 훗날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이 된다.
2. 제3 흥법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시기는 소수림왕 때이다. 전진의 부견은 사신과 스님인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로 보냈다. 이에 따라 초문사를 세워 순도가 지내게 하고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지내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고구려 불교의 시초이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의 불교 수용은 침류왕 때 일어났다. 인도의 스님인 마라난타는 백제 궁에 머물었고 이듬해에 새로 정한 수도인 한산주에 절을 창궐하고 10명을 중으로 두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작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불교는 눌지왕 때 처음 시작되었다. 스님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와 일선군에 머무니 그 고을 사람인 모록이 집 안에 그를 모셨다. 이때 양나라가 사신을 시켜 의복과 향을 보냈는데 묵호자가 사람들에게 향의 존재를 알렸다.
「신라본기」에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이차돈의 순교이다. 이때는 법흥왕 즉위 14년이었는데 법흥왕이 자극전에서 정무를 처리하며 말하길 “옛날 한나라 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불교가 동방으로 전파되었는데 과인이 즉위함으로부터 뭇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소멸하는 곳을 만들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은 그의 계획을 좇지 않았다. 이에 법흥왕은 매우 실망하였는데 그때 성은 박 씨이고 이름은 ‘염촉’인 자가 나타나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가 바로 이차돈이다. 왕은 그에게 “네가 할 바가 못 된다.”고 하였으나 이차돈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외다. 그릇되게 말을 전한 죄로 저를 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일에 한 사람을 희생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차돈의 뜻은 완고하였다.
왕은 그에게 ‘보살과 같은 행실’이라고 칭하며 여러 신하들을 불렀다. 그는 신하들에게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주저하고 듣지를 않는가?” 하니 신하들은 벌벌 떨며 말이 없었다. 왕은 이차돈을 불러 힐문하지만, 이차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결국 왕은 그의 목을 벤다. 그의 목을 베자마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라 빗방울처럼 떨어졌는데 모두가 슬퍼하며 그의 절개를 칭찬했다. 이차돈의 아내가 애통하여 좋은 터에 ‘자추사’라는 절을 지으니 백성들은 불공을 하면 대대로 영화롭게 된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3. 제4 탑상
「황룡사의 장륙 부처」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용궁 남쪽에 궁궐을 건축할 때 누런 용이 나타나자 왕은 궐 대신 절을 만들고 그 이름을 ‘황룡사’라고 하였다. 그 후 남쪽 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이 울주 곡포에 정박하였는데 그 배 안에는 ‘서축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의 세 불상을 만들려다가 성치하지 못하고 배에 실어 띄우면서 축원하오니 원컨대 인연 있는 땅에 닿아 석가의 존귀한 모습이 되어주소서’라는 첩문이 있었다. 배에 있던 금과 철로 장륙불상을 주조 하였더니 그 무게가 3만 5007근에 황금이 1만 198푼이 들었다. 또한 두 보살 불상에 든 철도 1만 2000근에 황금이 1만 136푼으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들은 모두 황룡사에 모셔졌으며 지금은 몽고 침입으로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이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있다.
「삼소관음과 중생사」
중국의 천자에게는 아름다운 첩이 있었다. 천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자를 불러 첩을 그리게 하였다. 그가 칙명을 받들고 그림을 그리던 중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붉은 오점이 배꼽 밑에 찍히게 되었다. 그 점을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자 그는 이것이 필시 천생으로 절로 생긴 붉은 점이라고 여겼다. 황제는 그림을 보고 옷에 감추어진 점을 어떻게 알았냐고 화내며 형벌을 내리려고 하였는데 승상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황제는 “원래 어질고 정직하다면 간밤에 내가 본 형상을 그려 올려서 맞힌다면 용서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곧 11면 관음상을 그려 바치니 황제의 꿈과 다름이 없었다.
화공은 풀려난 이후에 불교를 신봉하는 신라로 오게 된다. 신라에서 중생사의 보살화상을 그리니 온 나라 사람들이 떠받들고 공경하였다. 최은함이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는데 중생사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올렸더니 아들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석 달도 안 되어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습격하였다. 은함은 아이를 안고 절에 와서 “이웃 나라 군사가 졸지에 닥치니 어린 것이 짐이 되어 화를 면할 수 없겠습니다. 참말로 보살님이 주신 자식이라면 한없이 자비로운 힘을 빌리시와 보호하고 길러주시어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그 후 적이 물러가고 아이를 찾으러 오자 아이는 살결이 곱고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 남아있었다. 그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 기르니 지혜가 뛰어났다. 이 아이가 바로 ‘승로’인데 그는 벼슬이 정광에 이르렀다. 승로가 낭중 최숙을 낳고 숙이 낭중 제안을 낳아 자손이 끊이지 않았으며 은함은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벌족이 되었다. 이 밖에도 중생사에서 기도를 한 사람들에게는 큰 복이 따랐다고 한다.
「민장사」
우금리에 보개라는 가난한 여자가 장춘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 간 후로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보개가 민장사에 가서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리니 갑자기 장춘이 왔다. 장춘이 말하길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동무들은 다 죽고 나는 판자를 타고 오나라 해변에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이 구원하여 들에서 농사를 짓는 중에 어떤 중이 와서는 나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오는 길에 개천이 있어서 중이 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건너는 와중 갑자기 말 소리와 함께 우는 소리가 들리기에 보니 여기에 도착해 있었습니다.”고 하였다. 경덕왕은 이 소문을 듣고 땅을 절에 시주하고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신라 백월산 선천촌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살았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달랐으나 서로는 뜻이 맞아 가깝게 지냈다. 그들은 법적방이라는 절을 찾아가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둘은 승도촌으로 수양을 떠났는데 그곳은 대불전과 소불전 두 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노힐부득은 대불전 회진암에서, 달달박박은 소불전 유리광사에서 머물었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 마을로 내려와 아내와 자식들을 데르고 농사를 지으며 바쁘게 살았다. 그러던 중 그들은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속세 생활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이 스님처럼 머리만 깎고는 스님처럼 생활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진정 속세를 버리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도를 깎고자 결심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었는데 서쪽에서 하얀 빛줄기가 뻗치더니 금빛 팔이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는 꿈이었다. 그들은 이를 하늘의 계시라고 여기고 빠르게 산속으로 들어가 백월산 무등곡에서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을 정성껏 모셨다.
3년 후, 어느 여인이 찾아와 달달박박에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달달박박은 신성한 절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러나 노힐부득은 인정을 베푸는 것도 불도를 닦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며 여인을 재워줬다. 여인은 노힐부득에게 아이를 낳을 짚자리를 마련해달라 하거나 목욕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노힐부득은 주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도왔다. 여인이 아이와 목욕을 하자 물이 금빛으로 변했는데 여인은 노힐부득에게도 이 물에서 목욕하라고 했다. 그가 마지못해 그 말에 따르자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갗이 금빛으로 변했다. 이는 본래 관세음보살이 여인으로 변해 스님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달달박박은 노힐부득을 비웃어 주고자 그의 방에 찾아갔는데 노힐부득은 이미 미륵보살이 되어 있었다. 달달박박은 노힐부득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직 마음에 잡념이 남아 있어 부처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덕이 높은 스님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가엾게 여기고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고 하였다. 노힐부득이 달달박박에게 웃으며 남은 목욕물에 들어갈 것을 권하자 달달박박 또한 금빛 물에 목욕하였고 그는 아미타불이 되었다.
4. 제5 의해
「원광」
신라의 스님 원광은 부지런히 학문을 연구해 신라에 이름을 알렸으나 스스로는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의 장엄사에 가서 불교의 가르침을 듣고 도를 닦았다. 원광은 사람들에게 쉽고 재밌는 설법을 하기로 유명해졌고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당시 수나라 황제는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 진나라를 공격했는데 원광도 수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다. 수나라 장수가 원광을 죽이려는 찰나 그는 장엄사의 탑이 불타는 것을 보아 원광을 놔두고 부하들로 하여금 불을 끄라고 시켰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탑은 멀쩡했다. 장수는 스님을 구하라고 탑이 불타는 것으로 보인 것으로 여겨 원광을 풀어줬다.
원광은 항상 신라로 돌아갈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신라 진평왕은 원광이 중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음을 알고 수나라 황제에게 원광을 귀국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원광이 돌아오자 진평왕은 그와 정사를 의논하였고 원광은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원광에게 “지금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번갈아 가며 쳐들어와 매우 위태롭소. 법사께서는 수나라 황제에게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지어 주시오. 그대의 글 솜씨만이 수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소.”라고 하였다. 원광이 이 말에 따라 수나라 황제에게 글을 지어 보내자 수나라 황제는 그의 글에 감탄하여 30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했다.
원광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었고 그들에게 지켜야 할 다섯 가지를 얘기했다. 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것, 셋째는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는 것, 넷째는 싸움터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 것, 다섯째는 생물을 죽일 때 가려서 죽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속 오계이다.
「원효」
담날의 아내는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져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꾼 뒤 원효를 가졌다. 그녀는 밤나무 밑을 지날 때 산통이 오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담날의 비단옷을 바닥에 깔고 원효를 낳았다. 원효를 낳을 때는 밤나뭇골에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이 이유로 그 밤나무에는 비단을 뜻하는 ‘사라’가 붙어 사라수라는 이름이 생겼다. 원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스님이 되기 전에 자기 집을 바쳐 초개사를 세웠고 황룡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그는 45세 때, 같이 공부하던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떠나게 된다. 둘이 어떤 무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잡았는데 잠결에 목이 말랐던 원효는 옆에 놓은 그릇의 물을 마셨다. 다음날 잠에서 깬 원효는 그 물이 해골 속 고인 더러운 물임을 깨닫고 “어젯밤에는 그토록 꿀맛 같던 물이,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라는 것을 알자 토하게 되다니.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마음에 달렸구나. 내 마음이 곧 불법인데, 구태여 먼 당나라까지 가서 불도를 닦을 필요가 있는가?” 하며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온 나라를 돌며 불교의 이치를 알기 쉬운 노래로 지어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의상」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요동에서 국경을 지키는 고구려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고구려 병사들은 이들을 신라의 첩자로 몰아 가뒀는데 그들은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겨우 신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0년 후 그들은 다시 당나라로 가고자 하였고 이번에는 배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그러던 와중 당항성에서 원효가 해골물을 마신 후 마음을 바꾸어 신라로 되돌아가자 의상은 혼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다. 의상은 당나라의 이름 높은 스님인 지엄을 찾아가 제자가 되어 불법을 닦았다. 지엄은 이후 의상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떠나라고 하였다. 다시 길을 떠나게 된 의상은 당나라에 붙잡혀 있던 신라의 재상 김인문을 만나게 되었다. 김인문은 의상에게 당나라 황제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함을 알려주었다.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자신은 도술로 기도를 하여 나라를 지켰다.
5. 제6 신주
「밀본」
선덕 여왕이 병으로 앓아눕자 많은 이들이 병을 치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들 실패한 와중에 밀본이라는 스님이 좋은 일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선덕여왕은 그를 불러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밀본이 약사경을 외우자 그의 지팡이가 늙은 여우를 꿰어 침실 밖으로 떨어졌다. 그 후로 여왕의 병이 낫고 그의 이야기가 유명해졌다.
정승 벼슬 김양도가 어릴 때 입과 몸이 굳어 말도 못 하고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김양도는 자기 주위에 귀신들이 돌아다니는 모양을 보았다. 김양도의 아버지는 결국 밀본을 불렀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귀신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곧 사방에서 불법을 지키는 신들이 귀신을 잡아갔고 김양도는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는 그 후로 불교를 성심껏 믿고 흥륜사 법당에 미륵보살을 만들고 벽에는 금으로 부처님을 그렸다.
밀본이 일찍이 금곡사에 살 때, 김유신의 친척 김수천이 병에 걸렸다. 김유신은 밀본에게 김수천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여 밀본이 김수천을 살피자 김수천의 친구인 스님 ‘인혜’가 찾아왔다. 그는 밀본에게 간사하고 아첨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폭언을 하며 김수천의 병을 고칠 수 없을 것이라 소리쳤다. 그 후 인혜는 술법을 써 자랑하듯 보였다. 밀본 또한 그에게 술법을 보여주었다. 밀본이 손가락을 튕기니 인혜는 하늘에 둥둥 떠올라 얼마 후 거꾸로 떨어져 머리가 땅에 박히고 말았다. 사람들이 아무리 인혜를 당겨도 그의 머리는 땅 밖으로 나올 줄을 몰랐다. 다음날 밀본이 김수천의 부탁을 듣고 인혜를 땅에서 빼내니 그 후로 인혜는 남을 깔보거나 재주를 함부로 뽐내지 않았다.
「혜통」
신라의 스님 혜통은 인도 스님 무외를 만나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갔다. 그러나 무외는 혜통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동쪽 오랑캐 나라에서 온 사람이 어찌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혜통은 무외를 열심히 섬겼다. 오랜 시간을 섬겼는데도 무외가 자신을 무시하자 그는 시뻘건 숯불이 담긴 화로를 들고 무외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무외의 방 앞에서 화로를 머리에 얹자 그의 정수리가 터지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무외는 깜짝 놀라 혜통의 머리에서 화로를 내리고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혜통의 상처가 아물고 머리에 ‘왕’자 모양의 흉터가 생겼다. 그 후로 무외는 혜통을 가르치며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머지않아 혜통은 덕이 높은 스님이 되었다.
어느 날 당나라 공주가 병이 나자 무외는 황제에게 혜통을 추천했다. 혜통이 공주를 보자 공주를 괴롭히는 못된 용이 보였다. 혜통은 흰콩 한 말과 검은콩 한 말, 은그릇과 금그릇을 가져왔다. 그 후 흰콩 한 말을 은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흰 콩이 흰 갑옷을 입은 군사들로 변했다. 그러자 용이 뛰어나왔고 혜통은 남은 검은콩들도 검은 갑옷을 입은 군사로 변하게 했다. 결국 용은 공중으로 도망쳤고 공주는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용은 복수를 하기 위해 신라에 왔다. 혜통은 당나라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지냈지만, 신라의 사신 정공이 그에게 그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혜통은 용을 죽이기 위해 신라로 돌아오자 용은 정공에게 복수하며 그를 죽였다. 혜통은 용의 악행을 보고도 그를 달래고자 하였고 결국은 용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6. 제7 감통
「월명사의 도솔가」
신라 경덕왕 때, 하늘에 해가 둘이나 떠서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신하가 왕에게 “인연이 닿는 스님이 있다면 당장 불러들여 그 스님에게 꽃을 뿌리며 불공을 올리게 하십시오. 그러면 하늘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왕은 누각 남쪽 밭둑길을 지나는 스님을 보고 그에게 불공을 올리라 명하였다. 스님인 월명은 자신이 깨달음이 부족하여 글을 지어 불공을 드릴 수는 없으니 향가를 짓겠다고 하였다. 월명은 왕의 명령에 따라 꽃을 뿌리며 향가 도솔가를 읊었다. “오늘 꽃을 뿌리며 노래 부르니 꽃아, 너는 그 굳은 마음을 헤아려 멀리 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님을 모실지어다.” 노래가 끝나자 하늘에는 해가 하나만 남게 되었다. 월명이 지은 향가로는 ‘제망매가’도 있는데 이는 누이동생이 극락에 가는 데 드는 노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김현」
신라 때, 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풍습인 ‘탑돌이’가 있었다. 흥륜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탑돌이를 하였는데 밤이 깊어 사람들이 떠나도 김현은 남아 쉬지 않고 탑을 돌았다. 자정이 지나자 예쁜 처녀가 김현의 뒤를 따라 탑돌이를 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선녀와 같았다. 김현은 탑돌이가 끝나고 처녀를 기다렸는데 둘은 눈을 마주치자 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김현은 처녀와 함께 숲 속에서 얘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처녀가 돌아가려고 하자 김현은 고집을 부리며 그녀와 함께 있고자 하였고 억지로 그녀의 집까지 따라갔다. 처녀는 초가집 앞에서 애원하며 제발 돌아가라고 했지만 김현은 부모님을 뵙겠다고 떠나지 않았다. 처녀의 어머니가 나와 사연을 묻자 처녀가 탑돌이부터의 이야기를 하였고 어머니는 “비록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나무랄 수만도 없구나. 어서 저 젊은이를 골방에 숨겨라. 네 오라비들이 돌아와 해칠까 두렵구나.”라고 하였다. 김현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처녀에 말에 따라 골방에 숨었다.
얼마 뒤 호랑이 세 마리가 집으로 돌아와 냄새를 맡으며 먹이가 있다고 얘기했다. 처녀는 호랑이들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렀고 김현은 이를 듣고 겁에 질렸다. 그러던 와중 하늘에서 “너희들은 산 목숨을 해치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 다시는 그런 나쁜 짓을 못 하게 벌을 내려야겠다. 너희 중 하나를 죽여서 본보기로 삼겠다.”라는 말이 들렸다. 처녀는 오라버니들에게 떠나라고 하고 자신이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김현에게 자신은 사람이 아니니 다음날 자신이 성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해치면 낭군님이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김현은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알겠다고 하였다.
다음 날 성 안에 사나운 호랑이 하나가 사람들을 해치자 왕이 호랑이를 잡는 사람에게 높은 벼슬과 상금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김현은 호랑이를 만났고 호랑이는 김현에게 “제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흥륜사의 장을 바른 뒤 그 절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 저를 잊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죽었다. 김현은 이후 ‘호원사’를 짓고 그 절에서 불경을 읽으며 호랑이 처녀의 넋을 달래 주었다.
7. 제8 피은
「혜현」
혜현은 백제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수덕사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불경을 가르쳤다. 이 얘기가 널리 퍼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불경을 들으러 절에 찾아오니 그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베푸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스님들과 관청은 혜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벼슬아치들은 혜현의 설법으로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따질 줄 알게 되자 혜현을 내쫓을 계획을 세웠다. 혜현은 소란스러운 곳을 떠나 달라산으로 갔다. 그 곳은 험한 바위산이라 사람들이 오지 않았는데 몇몇 제자만이 그와 함께했다. 혜현이 죽어 바위굴에 안장되자 호랑이가 그의 주검을 먹어 치웠는데 그의 혀만은 먹지 않고 남겨 두었다. 제자들은 이를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폈던 혀이기 때문에 남겨진 것”이라 하며 깨끗한 바위 속에 모셔두었다. 시간이 지나자 혀는 돌처럼 단단히 굳었으나 그 붉은 빛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8. 제9 효선
「진정」
군인이었던 진정은 틈틈이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재산이라고는 다리가 부서진 솥 하나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찾아와 절을 짓는 데 필요하니 쇠붙이를 달라고 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솥을 선뜻 내주었다. 진정은 이를 알고도 어머니에게 정말 잘한 일이라고 하며 질 그릇에 음식을 끓여 먹으며 어머니를 모셨다. 이후 진정은 의상에게 불도를 배우고자 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를 알고 자신은 걱정 말고 지금 당장 떠나라고 하였다. 진정이 노모를 두고 가기를 망설이자 어머니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곱 되가 되는 쌀자루를 털어 밥을 지었다. 그리고는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길을 가면 그만큼 늦어진다. 그러니 이 밥 중에서 한 되는 미리 먹어 배를 채우고 나머지 여섯 되는 싸 가지고 집을 떠나라. 그러면 조금이라도 빨리 의상 법사님께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은 울며 길을 떠나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의상을 만났다. 이후 진정의 어머니가 죽자 의상은 그녀를 위해 소백산 추동에 초가집을 짓고 제자 3000명과 90일 동안 화엄경을 설법했다.
「대성」
대성은 몹시 가난하였는데 부잣집 주인인 복안이 그에게 밭을 조금 주어 겨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복안에게 매우 감사한 마음을 갖고 궂은일도 열심히 도왔다. 그러던 중 점개라는 스님이 복안에게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며 말했다. “한 가지 물건을 시주하면 나중에는 그것의 만 배를 얻게 되니 편안한 생활을 오래도록 누릴 것입니다.” 대성은 이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전하며 다음 세상에서 더 편히 살고자 하면 시주를 해야 한다고 자기네 밭을 시주하였다. 이후 대성이 죽자 재상 김문량 집에서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는데 그 내용은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 집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재상이 모량리를 찾자 실제로 대성이라는 자가 살았으며 자신의 집에서는 대성이 적힌 금붙이를 쥔 아이가 태어났다. 재상은 대성의 노모를 모셔 어린 대성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이후 대성이 커서 사냥을 하던 중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 날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죄 없는 목숨을 죽인 것에 슬퍼하며 자신을 위해 절을 세워달라는 말을 하였다. 대성은 그 날 이후로 느낀 바가 많아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고 곰을 위해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웠다.
「손순」
손순은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서 품삯을 받고 일하며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어린 아들은 철이 없어 노모의 밥을 빼앗아 먹었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자 그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손순이 아내에게 말하길 “아이는 나중에 또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면 영영 뵐 수가 없지 않소. 그러니 어머니께서 굶주림이 심하여 병이 나시기 전에 아이를…”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들은 결국 아이를 땅에 묻고자 했다. 그들이 땅을 파다 보니 돌로 만든 커디란 종이 나왔다. 아내는 손순에게 “이 돌종이 아이에게 복을 가져다 줄지도 몰라요. 그러니 제발 아이를 묻을 생각은 하지 맙시다.”라고 하였고 손순도 마음을 바꾸었다. 이들이 집에 돌아와 돌종을 치니 종의 맑은 소리가 궁까지 달했는데 흥덕왕은 그 소리를 찾아가 손순의 얘기를 듣고 그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그 후 그에게 집 한 채와 벼 50섬을 상으로 내렸다.
감상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버겁다’였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방대한 양과 한 내용, 한 내용마다 수많은 한자와 고어 때문이었다. 나는 읽는 사람도 이 방대한 양에 놀라고 질릴 정도인데 일연은 대체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쓴 것일까 감탄했다. 일연이 얼마나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의지를 전하고 싶었으면 그 노력을 들여서 이 책을 썼을지 짐작이 가 감동적이기도 했다. 책의 내용이 많은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릴 적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특히 기이편에 나오는 건국신화나 왕의 이야기들은 전래동화로 접해본 적이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이 책이 버겁다고 생각한 것과는 별개로 이 책이 갖는 의의에는 나 또한 적극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각각의 내용들은 우리 민족이 어떤 가치를 지향했고 어떤 생활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정말로 고귀한 사료일 것이다. 책의 이야기들은 저마다 신비로운 것투성이라 나는 대체 이 이야기들을 쓴 자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이 얘기들을 바탕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면 제작비가 매우 많이 들어갈 판타지 장르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극물을 쓰는 작가들이 이 책을 읽으면 한줄 한줄에서 영감을 얻을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신비롭고 재미있게 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든 또 다른 생각은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코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서동이 선화공주를 갖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 손순이 노모를 위해 아이를 묻을 생각을 했다는 것과 같은 것들이 나에게는 어떠한 물음을 던져 주었다. 그 이야기들이 결국 전하고자 하는 바는 덕과 효 같은 옳은 가치임을 나 또한 알지만, 그 결과로 향하는 과정이 과연 옳은가가 나의 고민이었다. 나는 내가 너무 삐뚤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계속 반성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학우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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