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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EnerTravel 2023. 9. 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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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간디 자서전』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책의 배경

『간디 자서전』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1922년 53살 간디는 같이 일하는 몇몇 분의 권유에 따라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하자마자 뭄바이에서 폭동이 일어나 자서전은 중단되었고 그 후 연달아서 사건이 일어나 간디는 6년형을 받고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같이 감옥에 들어간 사람 중 하나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자서전을 완성하라고 했지만, 간디는 이미 자신의 공부를 위해 순서를 짜놓았기 때문에 다른 일들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1925년 56살이 된 간디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잡지 <나바지반>에 자서전을 연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매주 한 장씩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다른 자서전들과는 다르게 간디의 수많은 진리실험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간디의 생애 자체가 그러한 실험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자서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래서 간디의 자서전에는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것이다.

 

저자 소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간디는 아버지에게서는 고집스러움, 청렴결백한 태도, 실용적 감각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신앙심, 헌신성, 금욕주의를 물려받았다. 간디는 열세 살이 되던 해 카스투르바이라는 소녀와 결혼했다. 1887년 18살의 간디는 아메다바드라는 도시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으나 19살에 영국으로 가 21살에 변호사 자격을 얻어 인도로 돌아왔다. 변호사가 되어 첫 소송에서 실수한 간디는 남아프리카 소송 사건으로 24살에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서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1년 기한을 생각하고 떠난 남아프리카에서 간디는 무려 22년을 살았고 남아프리카로 떠날 때 영국 없는 인도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영국식 생각이 들어찼던 젊은 변호사였다. 그러나 22년 후 1915년 46살에 인도로 돌아올 때 간디는 인도 노동자의 복장을 하고, 3등석을 타는, 인도 사람들의 새로운 지도자로 변해 있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티아그라하’운동(비폭력운동)을 펼쳤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처럼 ‘아슈람(공동체)’을 만들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1920년 간디는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가 되어 ‘인도 국민회의’를 대도시 중산층부터 지방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조직이 되게 만들었다. 1921년 간디는 사람들에게 대영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영국을 거부하는 새로운 투쟁 방법을 제안 했고 실천했다. 1927년 영국이 인도인을 배제하고 ‘인도통치법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였고 간디는 다시 인도 국민회의를 이끌며 1928년까지 1년 이내에 인도에게 주권을 달라는 요구를 내걸고 인도가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전국적인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1년후 1929년 12월 31일 자정이 되자 국민회의는 인도의 독립을 선포했고 비폭력 운동 중 현장에 있던 기자에 세계에 알려지면서 인도의 독립에 대해 협상 타결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도는 독립 운동 후 오히려 자치권은 줄어들었고, 집회와 거부 운동은 금지되었고, 많은 단체들이 사라졌으며 새로운 총독이 강령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국이 불가촉천민에 대해 독립선거를 실시하려는 결정을 내렸고 간디의 노력으로 ‘하리잔(불가촉천민)들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영국에게서 독립했고 파키스탄도 독립하여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은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들은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했다. 이주 중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등의 문제로 갈등과 혼돈이 생기면서 9월 1일 간디는 종교집단의 평화를 위해 단식을 시작했고 힌두, 이슬람, 시크교 지도자들이 종교집단 간의 갈등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것을 막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하겠다는 문서에 서약을 하며 단식을 끝냈다. 1948년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라라는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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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1) 간디의 소년 시절

간디가 16살 때 간디의 아버지는 치질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 하셨다. 간디는 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면서 한 번도 소홀히 생각한 적은 없으나 그때 아내가 임신 중으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 아버지를 간호하면서도 간디의 마음은 아내의 침실 곁을 맴돌고 있었다. 아버지의 병이 악화되던 즈음 삼촌이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집에 찾아왔고 간디는 삼촌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아내에게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임종을 맞게 되었고 간디는 자신이 성적인 욕망에 정신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곁을 조금이라도 더 지킬 수 있을 것이라며 자책했다. 이후 간디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일들을 겪으면서 성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906년 37세가 되던 해 간디는 ‘브라마차리아’(금욕)를 맹세했다. 간디는 ‘브라마차리아’를 맹세한 이후 채식을 하거나 음식을 날로 먹거나 간을 하지 않는 등 미각을 조절했고 주기적으로 단식을 하며 욕구를 조절했다.

 

(2) 간디의 방황의 시간

간디의 친구 중 이슬람교를 믿는 ‘세이크 메타브’라는 소년으로 그를 만난 것은 간디 인생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세이크 메타브는 원래 둘째 형의 친구 였는데 간디와 세이크 메타브는 친하게 지냈다. 세이크 메타브는 간디에게 인도인들이 약한 민족이 된 이유는 인도인들이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며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고기를 먹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이 튼튼하고 병에 걸려도 빨리 낫는 것도 다 고기를 먹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간디에게 육식을 강요했다. 간디는 평소 몸집이 작으며 몸이 약하고 겁이 많아 세이크 메타브가 부러웠다. 그래서 그는 세이크 메타브의 제안에 따라 아무도 모르게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고기를 먹은 후 견디기 힘들었지만 간디는 고기를 먹는 것은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안정시켰고 나중에는 고기로 만든 음식들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간디는 자신이 부모님을 속이고 육식을 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간디와 세이크 메타브는 담배를 피우거나 도둑질을 하는 등 반항을 하며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가 원통해서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아 자살 할 마음을 고치고 이 자살 시도로 인해 흡연과 도둑질 습관을 끝냈다. 간디가 열다섯 살에 육식에 참석한 결과 25루피의 빚을 지게 되었고 간디는 빚을 갚기 위해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간디는 자신의 죄를 견디지 못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통해 죄를 고백한다.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간디의 편지를 찢어버리고는 간디를 다독여줬다. 간디는 이 일로 아버지가 간디에 대한 사랑을 더 크게 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간디에게 ‘아힘사’에 대한 살아 있는 교육이었다고 말한다.

 

(3) 간디의 성장의 시간

이웃이면서 고문이 되어주는 ‘마브지 다베’의 제안에 따라 간디는 영국에 가서 변호사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간디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들에게서 영국에 간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힌두교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간디는 어머니께 술과 여자와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영국 유학을 허락 받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영국행 배를 타기 위해 뭄바이로 갔다. 뭄바이에 머무는 동안 간디의 계급의 사람들에게 간디가 영국으로 떠나 그들의 종교를 더럽힐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유는 간디의 어머니처럼 간디가 영국에 가면 술과 고기를 먹는 등 종교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디의 영국행을 문제로 간디의 계급의 총회가 열렸고 총회에서는 간디의 유학을 금지했다. 유학에 어려움이 생겨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변호사가 배로 영국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간디는 친구에게 뱃삯과 약간의 여비를 빌려 뭄바이를 떠나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 간 간디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음식이었다. 고기는 먹을 수 없는 데다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영국식 삶은 채소는 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끄러워서 빵을 두세 조각 이상 달라고 하지 못했다.

간디가 다닌 ‘이너 템플’이라는 대학원은 강의 몇 개를 듣고, 12학기를 채우고, 시험을 통과하고, 스물한 살이 되면 변호사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간디는 시간이 많았고 채식 식당에서 『채식주의를 위하여』라는 책을 사서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아 스스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간디에게 채식주의를 퍼뜨리는 것은 사명이 되었고 간디의 채식주의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커졌다. 음식에 대한 실험은 간디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간디는 고기를 먹을 수는 없지만 영국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고 세련된 행동을 해서 채식으로 생기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을 보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신사가 되겠다는 헛된 꿈을 꿨다는 것을 깨달은 간디는 몇 년 후 다시 학생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시 돌아온 간디는 공부에 집중하면서도 채식주의 단체의 회원이 되어 채식주의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간디는 한동안 녹말로 된 음식은 안 먹고 빵과 과일만 먹어보기도 하고, 치즈와 우유와 달걀만 먹어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간디는 이런 실험을 통해 진짜 맛은 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식주의에 대한 활동을 열심히 해 나가자 간디는 단체의 집행위원으로 뽑혔고 간디는 단체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어떻게 하면 간디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간디는 자신의 경험이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침묵’은 정신적 훈련의 한 부분이란 것을 깨달았다.

간디는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종교인들과도 사귀면서 종교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그 중 『바가바드 기타』는 ‘신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 힌두교의 중요한 경전으로 영국의 친구들에 의해서 읽게 되었고 간디는 그 속에서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었다. 간디는 어떤 기독교인의 권유로 『성경』도 읽었는데 간디는 구약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신약은 마음에 들어 했고 『성경』과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일해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끝내 ‘버리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최고 경지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강하게 울려왔다고 한다. 간디는 이후 종교 서적을 더 많이 읽고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시험 공부로 다른 것을 할 여유가 없어 깊게 접할 수 없었다. 이렇게 3년을 보내고 마침내 1891년 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자격을 얻었고,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

 

(4) 남아프리카의 쿨리 변호사

간디의 형은 간디가 돈을 많이 버는 유명한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고, 간디에게 소송사건을 얻어주려고 최선을 다하여 뭄바이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하나 차려줬다. 간디는 처음으로 작은 사건을 하나 맡게 되지만 법정에 서자 긴장이 되어 첫 사건을 망치게 된다. 그 이후로 간디는 용기가 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사건도 맡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남아프리카에 갈 때까지 법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다 압둘라 회사’에서 남아프리카의 소송사건을 의뢰해 왔다. 비행기 1등석 여비와 105파운드가 보수의 전부였고 변호사에 대한 대우라기보다 회사의 말단 직원에게 주는 수준이었으나 간디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남아프리카로 갔다. ‘다다 압둘라 회사’의 ‘압둘라 셰드’는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온지 사흘째 되던 날 더반의 법정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때 간디가 법정에 들어가 변호인 옆에 앉자 판사가 간디를 바라보며 간디에게 터번을 벗으라고 했고 간디는 그 말을 거절하고 법정을 나왔다. 인도인들 중 이슬람교 풍속을 지키는 사람만이 터번을 쓰고 나머지 인도인들은 법정에 들어가면 터번을 벗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는 자신이 법정에서 터번을 쓴 것은 인도인으로써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했고 그 문제가 여러 신문에 다뤄지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사건에 대한 준비를 해서 트란스발의 ‘프리토리아’로 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더반을 떠나면서 쿨리[1]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은 간디는 우여곡절 끝에 프리토리아에 도착한 후 인도인들을 모았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정부와 이야기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했으며 간디는 그것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고난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단체에서는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 했고 그 결과 프리토리아에서 간디가 모르는 인도인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속사정까지 낱낱이 알게 되었다.

 

(5) 간디 바이

간디가 맡은 다다 압둘라 회사의 소송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간디는 법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또 간디는 소송을 통해 변호사의 진정한 역할은 서로 갈라선 양쪽을 화합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송이 끝나고 간디는 인도로 돌아가기 위해 처음 도착했던 더반으로 갔을 때 우연히 신문에 ‘인도인의 선거권’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그 내용은 나탈의회에 제출된 법에 대한 것으로 나탈 의원 선거에서 인도인의 선거권을 빼앗아 버린다는 것이었다. 간디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간디는 한 인도인의 제안으로 남아프리카에 한 달간 더 머무르며 투표권 법안을 반대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 일은 공동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간디와 공동체는 하나이며 돈을 버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도 그들의 의무임을 깨닫게 되었다. 간디와 함께 투쟁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탄원서를 신문과 평론가 등에게 보냈고 인도의 민중들은 처음으로 남아프리카의 사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로써 영국의 신문 중에서도 그들의 요구에 찬성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법안이 거부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은 간디에게 남아프리카에 영원히 남아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간디는 상인들의 법률 업무를 간디에게 맡기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보수를 주는 것을 조건으로 나탈에 정착하기로 했다. 간디는 계속적인 시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탈 인도 국민회의’를 조직했다.

간디는 3년을 남아프리카에서 보내고 6개월 정도 인도에 가 있다가 가족을 데리고 와서 남아프리카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또 인도에 가서 남아프리카 인도인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하고 싶어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의 고통’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를 만들어 출간했다. 이 책자는 표지가 녹색으로 되어 있어 ‘녹색 팸플릿’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897년 간디가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남아프리카의 더반으로 왔을 때 간디는 ‘녹색 팸플릿’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아프리카에는 ‘쿨리’들이 살 수 있는 지역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를 ‘쿨리 구역’이라고 불렀다. 간디가 살고 있던 요하네스버그의 쿨리 구역은 99년간의 임대차 계약을 맺는 형식이었다. 시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어떤 위생 시설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그 지역에 사는 인도인들 역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어서 위생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때문에 그 구역은 비위생적인 상태로 유지 되었고 시 당국은 비위생을 이유로 그 구역을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주민들은 임대차 계약에 따라 99년 동안의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디를 자신들의 변호사로 지정했다. 간디는 이 소송에서 70건의 소송 중 한 건을 제외하고 모두 이기며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에게 ‘바이(형님)’로 불리게 되었다. 시당국으로부터 쿨리 구역의 소유권을 얻게 된 이후에도 인도인들은 그곳을 바로 떠나지 못했다. 시당국이 그들이 살기에 적당한 새 거주지를 찾아 주어야 했지만 그렇게 해줄 수 없었고 쿨리 구역에 사는 이들은 그 전보다 더 고통스럽고 불결하게 지내야 했다. 그 무렵 갑자기 흑사병이 퍼졌다. 흑사병이 발생한 곳은 요하네스 버그 교외에 있는 어느 금광으로 인도인 몇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 23명이 갑자기 전염이 되어 위독한 상태로 쿨리 구역 안에 있는 자기네 숙소로 돌아온 것이었다. 간디는 의사와 함께 그들을 간호하기 위해 갔고 세 명의 인원으로는 스물 세 명의 환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시에서는 빈 창고를 하나와 간호사 한 명을 보내주었고 빈 창고를 청소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구해와 즉석에서 임시 병원을 만들었다. 환자들 중 둘은 살아났고 나머지 스물 한 사람은 창고 안에서 죽고 말았으며 쿨리 구역에 살던 주민들은 특별 열차로 새로운 천막촌에 살게 되었다.

 

(6) 가정에서의 진리 실험

남아프리카에 가족을 데리고 온 간디는 아이들을 교육시킬 학교를 보내야 했지만 마땅한 학교가 없었고 그 점에 대해 아이들은 모두 간디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자식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부모와의 접촉에서 얻어지는 경험의 교육과 그들이 생활에서 보여주는 소박함과 봉사의 정신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부모들의 생활 변화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수동적인 학문 교육을 받느니 차라리 자유를 위하여 무식한 채로 돌을 깨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아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흔적은 간디의 젊은 시절 교육하지 못해 큰 아들 하릴랄이 잘못된 길로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간디의 사업은 성공적으로 발전해 갔지만 간디는 항상 자신의 생활을 한층 더 소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세탁을 하거나 이발을 하는 등 사소한 것들부터 소박한 생활을 시작했고 물질의 소유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변화해 갔다. 간디는 영국의 작가이자 예술가인 ‘러스킨’이 쓴 『나중에 온 이에게도』라는 책을 읽은 후 러스킨의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간디는 위 책의 교훈을 개인의 선은 전체의 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변호사라는 직업도 이발사의 직업과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노동의 생활이 보람있는 생활이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간디는 러스킨의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피닉스라는 곳에 땅을 구해 조그만 마을을 만들고 <인디언 오피니언>을 인쇄하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간디는 이미 간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러스킨의 교훈에 비추어 자신의 생활을 더 엄격하게 검토했다. 또한 겉으로 나타난 변화보다는 내적인 변화가 많았고 모든 육체노동을 몸소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직접 빵을 만들어 먹거나 하인의 일을 돕고, 굳이 하인을 기다려 일을 시키지 않고 직접 하는 등 육체노동을 몸소 하도록 가르쳤다. 이것이 아이들에게는 좋은 교육이 되었고, 간디는 아이들의 학문교육에 대해 무관심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희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간디의 아내는 자주 출혈을 했다. 이에 수술을 하게 되었고 몸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마취제를 쓰지 않고 수술을 하게 되었고 아내는 그것을 버텨냈다. 그러나 아내의 병은 악화되었고 의사의 처방으로 아내는 간디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고기즙을 먹게 되었다. 간디는 크게 화냈고 아내는 간디에게 죽을지언정 절대 고기즙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내가 쇠약해져 병원에 있어야 했으나 간디는 아내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고 아내는 여러 날을 먹지 못해 살가죽과 뼈만 남았지만 간디의 물 치료법으로 서서히 회복되었다. 아내의 몸은 서서히 회복되었지만 물 치료법만으로는 낫지 않았고 또 다시 출혈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간디는 아내에게 소금과 콩류를 먹지 말라고 했고, 자신도 함께 소금과 콩류를 먹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아내는 빨리 회복되었다. 간디는 이 일을 가정에서의 진리 실험의 한 본보기이며 간디의 생애 가장 그리운 추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7) 남아프리카에서 사티아그라하

1906년 트란스발 정부는 여덟 살이 넘은 모든 인도인 남녀와 어린이들은 지문을 찍고 등록증을 받아야 하며, 등록증을 언제나 가지고 다니면서 보여줄 것을 요구하면 언제든지 제시해야 한다는 법을 발표했다. 이 법에 의하면 등록을 하지 않은 모든 인도인들은 트란스발에 살 수 없으며 벌금형, 금고형, 추방형 등에 처해질 수 있었다. 간디는 이 법이 트란스발에 사는 인도인들에게 모욕을 주려는 계획이며 만일 이 법안이 통과되면 남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법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간디와 사람들은 ‘지문 등록을 거부하는 맹세’를 했고 간디는 <인디언 오피니언>을 통해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만들었다. 1907년 1월 1일자로 트란스발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왕의 동의 없이도 법률을 제정할 수 있었다. 1907년 독립정부가 되자 트란스발의 식민지 장관 ‘스뫼츠 장군’은 지문등록법을 통과시켜 트란스발의 모든 인도인은 이 법에 따라 등록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사티아그라하 단체 회원들은 새로운 법률을 ‘검은 법’이라고 비판하면서 등록 거부 운동을 벌였고 간디는 등록을 거부한 죄로 결국 체포되었고 감옥을 갔다. 두 번의 감옥살이 후 풀려난 뒤 간디는 변호사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사티아그라하에 집중했다. 친구 칼렌바흐의 도움으로 요하네스버그에서 30km 떨어진 곳의 농장에 제2의 공동체 ‘톨스토이 농장’을 만들었고 그 곳에서 간디의 신념대로 간소하게 생활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국무장관이 된 스뫼츠 장군은 인도인들에게 매년 거두어 들이는 3파운드의 세금을 폐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더구나 1913년 남아프리카 연방 대법원은 이민 온 이슬람교도 남편과 결합하려는 어느 여인이 낸 재판에서 남아프리카 연방에서는 기독교식 결혼만이 인정된다는 판결을 내린다. 이 법에 의하면 힌두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의 결혼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힌두교, 이슬람교도들의 여인들은 순식간에 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법으로 인해 여자들까지 사티아그라하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3파운드의 인두세와 기독교식의 결혼만을 인정하는 법을 폐지하기 위한 파업을 벌일 것을 촉구 했다. 이후 광부들도 사티아그라하에 참여하자 광산의 주인들은 파업하는 광부 숙소의 전기와 수도를 끊어 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두들겨 맞기도 하였으나 사티아그라하에 참여하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았다. 1913년 10월 28일 간디는 남자 2037명, 여자 127명, 어린이 57명과 함께 행진을 시작했고 11월 9일 간디는 행렬의 맨 앞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사람들은 톨스토이 농장 쪽으로 행진을 계속하다 경찰에 의해 특수 열차에 실려 광산으로 보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인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헌병들이 진압에 나서 몇 명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 오래지 않아 수만 명의 계약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인도인 수천 명이 감옥에 갇혔다. 사티아그라하는 인도와 유럽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고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는 간디를 무조건 석방했다. 그리고 1914년 6월 스뫼츠 장군과 간디는 ‘비 기독교식의 결혼을 인정하고, 3파운드의 세금을 폐지한다’는 새 법률에 합의했다. 그후 간디는 남아프리카를 떠나 인도로 돌아갔다.

 

(8) 인디고의 얼룩

간디는 1915년 1월 22년 만에 인도로 돌아왔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으로 간디의 이름은 인도에까지 알려져 유명해져 있었다. 간디가 항상 존경해오던 고칼레는 간디에게 경험을 얻기 위해 1년동안 인도 각지를 여행하고 그 기간이 지날 때까지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지 말라고 하였다. 간디는 그의 말을 따라 1년간 가난뱅이 차림을 하고 3등석을 타며 인도를 여행했다. 1916년 1년간의 침묵이 끝나고 간디는 국민회의에 참석했다. 1917년 간디는 어떤 농민의 간절한 부탁에 응해 참파란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면직물을 염색하는 데 쓰는 인디고를 재배하는 농원이 많았고 참파란 주민들은 법에 의하여 자기 땅의 3/20은 땅 주인을 위해 인디고를 강제로 재배해야 했다. 이 제도는 ‘팅카디아’제도 라고 불렸다. 팅카디아는 한두 건의 재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간디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참파란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간디의 행보를 들은 지방장관들은 간디를 상대로 참파란을 떠나라는 재판을 열었고 판사들의 재판 연기로 간디는 총독과 여러 사람들에게 자세한 사항을 전보로 알리면서 팅카디아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간디는 신문이 강한 어조로 자신의 편을 든다면 정부나 농장주들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주요 신문들의 발행인에게 편지를 보내 보도할 필요가 있는 것을 직접 보냈다. 이 점이 정부나 농장주들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고 간디는 구체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많은 농민들이 진술을 하기 위해 왔고, 수천 건의 진술이 수집되었다. 간디는 참파란을 더 알게 됨에 따라 지속적인 성격의 사업은 교육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농민들은 비참할 정도로 무지했고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인디고 농장에서 일을 시켰다. 이에 간디는 동료들과 의논하여 여섯 마을에 초등학교를 열었다. 선생을 구하기 위해 대중들에게 선생으로 자원해 달라고 호소했고 아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참파란에 왔다. 간디와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은 함께 학교를 경영하고 위생 사업을 하고 병 치료를 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얻고 좋은 영향을 미쳤다. 사회 봉사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농민들의 진술은 빠르게 늘어났고 진술하러 오는 농민들의 수가 끊임없이 늘어남에 따라 농장주들은 간디의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만들었다. 간디는 동료들과 의논 끝에 조사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곳에서 진실을 확인해 농장주는 부당하게 걷은 징수금을 돌려줄 것과 팅카디아를 폐지할 것을 권고했다. 농장주들은 줄기차게 반대했지만 결국 팅카디아 제도는 폐지되었다.

 

(9) 임금투쟁에서 롤래트 법까지

간디가 참파란에 있는 동안 아메다바드로부터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이 오래 전부터 임금을 올리는 운동을 벌여왔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간디는 참파란의 팅카디아를 해결한 후 그들을 지도해주고자 아메다바드로 갔다. 아메다바드의 임금투쟁은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사람과 공장 주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남매였고 간디도 그들과 친했다. 때문에 간디는 그들과 중재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할 수 없이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계속하라고 조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집회에 낙담하고 절망하기 시작했고 간디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간디의 단식으로 서로 간에 화해의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해 파업은 간디가 단식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중지 되었고, 21일만에 해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영국인 판사 롤래트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인도의 혁명 운동과 관련된 음모를 조사 보고하라는 일을 맡겼다. 이 위원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전쟁 때와 같은 엄격한 규제를 계속하라는 건의를 했다. 간디는 롤래트법의 통과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정부는 1919년 롤래트법을 통과 시켰다. 다음날 간디는 전국적으로 하르탈(파업)을 시행하며 그 날, 전 인도의 민중들이 하루를 단식과 기도로 지내야 한다고 발표했다. 하르탈을 하기로 한 날, 전 인도와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하나같이 힘을 합쳐 완전한 하르탈을 지켰다. 이에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하르탈 행진이 철도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이해 총을 쏘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어느 곳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며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간디는 속죄의 의미로 3일간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사람들에게도 같은 의미로 단식을 하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폭력을 쓴 사람은 죄를 자백하라고 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그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간디의 제안은 양쪽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하르탈은 점차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는 순전히 진실된 사람들의 무기이고, 사티아그라하를 하는 사람들은 비폭력을 맹세한 사람이므로 하르탈이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간디는 민중들이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티아그라하를 중지해야 된다고 결심했다.

 

(10) 물레이야기 – 카디의 탄생

간디는 손베틀과 물레를 이용해 인도의 가난을 없앨 수 있다면 인도의 자치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 남아프리카에서 같이 살던 피닉스 농장의 사람들과 함께 아슈람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직접 옷감을 짜서 입기 위해 물레와 손베틀을 몇대 구했으나 아슈람 사람들 중에 베틀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아슈람 사람 중 기계에 타고난 재주가 있는 이가 있어 오래지 않아 베짜는 기술을 완전히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인도 실이 없거나 물레가 없는 등 문제가 발생했고, 그러던 중 1917년 강가벤 마즈무다르라는 부인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불가촉천민 출신의 교육도 별로 받지 못한 과부였으나 이미 불가촉천민이라는 자신의 계급을 극복하고 억압받는 계급의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간디는 그녀와 잘 알게 되면서 자신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 했고 그녀는 간디를 도와 주었다. 강가벤은 비자푸르라는 곳에서 마침내 물레를 찾아냈고 이후에도 강가벤의 도움을 받아 비자푸르에서 뽑은 실로 만든 비자푸르 카디를 만들 수 있었다.

 

(11) 간디가 자서전을 쓴 이유

간디가 자서전을 쓰는 이유는 단지 그런 일들이 간디의 진실 추구 과정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기록해 보자는 데 있다. 간디의 생활은 세상이 모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만큼 공적인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1921년 이후로는 국민회의의 지도자들과 아주 가까워져서 그들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고는 간디의 생활의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간디에게 나타난 그대로, 그리고 간디가 그곳에 도달한 방식으로 기록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이유는 이 글이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아힘사에 대한 믿음을 안겨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만일 이 글에서 진리를 실현하는 단 하나의 길이 아힘사임을 말하고 있지 않다면, 이 글을 쓰는 데 기울였던 노력은 다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간디가 아무리 진지하게 아힘사의 실천을 위해 노력해 왔다 하더라도 아직도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는 이야기다. 간디는 진리의 완전한 모습은 아힘사가 완전히 실현된 후에야 나타나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아힘사)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깨끗이 하는 것은 생활의 모든 행동을 깨끗이 하는 것이며 아무리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 해도 안에 깨끗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고, 아직도 가야 할 험난한 길이 자신의 앞에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감상

부끄럽지만 간디 자서전을 읽기 전에 나는 간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책을 읽은 후 간디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과는 조금 달랐고, 생각했던 것보다 독하고 강한 사람임을 느꼈다. 민족들의 행복과 인도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단식하고 사티아그라하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간디가 이토록 존경 받고 세계인의 위인인지를 깨달았다. 간디의 업적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물레를 이용해 직접 자신의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었다. 인도 경제의 자립적 독립을 위해 영국제 옷을 입지 않고 인도산 면을 사용해 물레로 옷을 짜 입다니, 만약에 내가 독립 운동가라 해도 옷까지 그렇게 입을 생각은 못 했을 거 같다. 독립 운동을 하는 것 조차도, 단식을 하는 것 만으로도, 민족들을 지키는 것 만으로도 힘든데 흔치 않은 재료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디의 소년시절에 간디의 성적인 욕망이나 간디가 공부를 못했다는 점 자신의 부족했던 점들도 솔직하게 적어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적었는데 이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깨달음, 경험에서 얻은 솔직함, 대담함은 간디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노력하고 실천하면 누구든지 간디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러한 간디의 모습을 통해 내가 얼마나 수동적인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반성하게 되었고, 나와 반대의 모습을 가진 간디의 모습을 통해 간디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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