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작가와 책 소개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 점이 바로 러시아 도시문학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위치를 굳히게 하는 한편, 훗날의 토양주의(러시아 메시아니즘)의 주장에서 엿보이는 바와 같은 농민이상화의 경향마저 그에게서 싹트게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특히 W.스콧의 환상적이며 낭만적인 전기와 역사소설에 흥미를 느꼈다.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다음에는 공병국에 근무했으나, 싫증을 느껴 1년 남짓 있다가 퇴직했는데, 때마침 번역 출간된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가 호평을 받은 데 힘을 얻어, 직업작가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은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중편으로서,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을 기치로 하였던 당시 비평계의 거물인 V.G.벨린스키에게 인정되어, 24세의 무명작가는 일약 새로운 고골리라는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곧 이어 발표한《분신》(1846)과 《주부》(1847) 등은 벨린스키로부터 심리주의로의 병적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어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무렵부터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백야》(1848) 《네트치카 네즈바노바》(1849) 등의 가작을 씀으로써, 인간의 정열의 여러 모습을 탐구하는 한편, F.M.C.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M.V.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로 접근해 갔다. 이 시기의 혁명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창작활동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1849년 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좌되어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그가 인도주의자 ․공상적 혁명가에서 변모하여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 ․인종사상의 제창자로 사상적 전신을 하게 되는 시기였다. 출옥 후 5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는 동안 M.이사에바와 결혼하고, 1859년 말 10년 만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이 허락되었다. 귀환 후 농노해방을 눈앞에 두고 고조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형인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를 창간, 시사문제를 집필하는 한편, 시베리아 옥중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하고 참신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과, 그의 전기 창작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대받은 사람들》(1861)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으로의 복귀를 확고하게 하였다.
그 다음의 수년간은 농노해방 뒤에 야기된 정치적 반동과 사회적 환멸의 한 시대로서, 또한 그의 개인생활에도 중대한 사건이 겹친 시기였다. 즉, 1862년의 그의 첫 서유럽 여행, 애인 스슬로바와의 이상한 연애체험, 1864년의 그의 아내와 형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의 문학상의 전기가 되었으며, 후기의 대작들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일반에게 인정되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864년 잡지 《에포하》를 발행했으나 완전히 실패하여 그는 거액의 빚만 짊어지게 되어 생활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외유에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그의 만년의 10년간은 장편 《미성년》(1875)과 그의 생애를 통한 사색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79~1880) 이외에도, 1873년 이후 시사적 수상과 문예평론 ․단편 등을 포함한 자유형식의 문집 《작가의 일기》를 썼다. 그가 죽기 반년쯤 전 푸슈킨의 동상제막식에서 행한 기념강연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불우했던 그의 만년을 장식해 주었다.
《죄와 벌》로 시작되는 그의 후기의 대작은 시대의 첨단적인 사회적 ․사상적 ․정치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점에 그의 특색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론적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에 있어서의 인간을 추구한 《죄와 벌》, 조화와 화해를 초래할 아름다운 인간 미슈킨 공작의 패배를 묘사한 《백치》, 네차예프 사건에서 소재를 얻어 혁명의 조직과 사상의 병리를 묘사한 《악령》, 청년의 야심적 생태를 다룬 《미성년》, 존속살해범을 주제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결시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각 작품에서 다룬 소재가 다르면서도 총체적으로는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의 양극적인 인물상인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각기 《백치》의 미슈킨 공작, 《악령》의 스타브로긴으로 계승되며, 나아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조시마 장로와 이반의 대결로 발전하는 것 등이 한 예로서, 그의 작품세계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긍정과 부정의 상극을 작가 자신과 더불어 체현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상극의 생생함을 폴리포닉한 로망 형식 속에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었던 점에서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학과 사상에 끼친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지만, 특히 현저한 것으로는 F.W.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자에 이르는 사상의 계보를 들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온갖 적극성을 부정하는 수난의 철학을 신봉하는 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반동작가로 규정하여 왔으나, 근자에 이런 견해는 다소 약화되어 그의 저작집 등도 새로 출판이 허용되게 되었다.
내용요약
현대의 그리스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책 속에서 스스로 밝혔듯 “현대의 그리스도”라는 주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책 중에서 나오는 이반의 극시에서와 같이 유토피아를 지망하는 사회주의와 그리스도교에서의 끝없는 사랑을 융합한 논리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 이상으로 아름답고, 깊고, 자비롭고, 총명하고, 용기 있고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령, 그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진리의 밖에 있다고 말할지라도, 또 진정 진리가 그리스도의 밖에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진리와 더불어 있다고 하기보다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머물러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작가해설에서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는 평생을 두고 그리스도적 인간상을 흠모해 온 것이다. 과연 진리란 어떤 것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진리보다도 더욱더 완전한 것을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인 표드로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는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평생동안 남의집 식사에 초대받거나 부잣집 식객만을 노리며 살아온 소지주로서 육체적 쾌락과 치부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인물로서 반미치광이 적인 면모와 성격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한 예리함을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종의 어릿광대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체면 따위는 생각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남들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출세를 위한 한 방안으로 그 고장 지주의 딸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와의 결혼을 하게 되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예상한 대로 파탄에 이르게 된다. 결국 아젤다이다는 세살 짜리 아들을 남편의 손에 맡기고는 어느 가난뱅이 교사와 함께 집을 나가 버린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아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미챠)는 아버지의 성격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아들로 충동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의 소유자로서 방종한 생활을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고결하고 공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하인 그리고리의 손에서 자라다가 결국 아젤다이다의 사촌인 미우소프의 관심으로 그를 후견인으로 하여 미우소프의 집에서 자라게 되다. 드미트리는 자기 앞으로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라서 방탕한 생활로 많은 돈을 낭비하여 결국 아버지 앞으로 얼마간의 빚까지 짊어지게 되고 만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표드로는 열 여섯의 유태인 처녀 소피야 이바노브나와 두 번째의 결혼을 하게 된다. 변덕이 심하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며 괴롭히는 양육자 보로호바 장군의 늙은 미망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표드로와 결혼한 소피야는 아내가 있는 대도 난잡한 여자들을 집에 불러들여 난장판을 벌이는 등, 표드로에게 인간이하로 무시 받으며 살게 된다.
결국 클리쿠샤라고 불리는 일종의 부인성 정신병에 걸려 고생하던 그녀는 표도르에게 두 아들 이반과 알렉세이를 낳아주고는, 알렉세이가 네살때 세상을 떠나고 만다. 물론 불행한 이 소피야가 죽은 뒤에도 표드로의 방탕한 생활을 변할 줄을 몰랐고 당연히 두 아들 이반과 알렉세이는 형 미챠와 똑같은 운명에 빠져 머슴방에서 처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석달동안이나 머슴의 손에서 자라다가 다행히도 소피야의 양육자인 장군부인의 눈에 띄게 되어 이후 그녀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장군부인의 사후 그녀의 상속자 예핌 페트로비치 폴레노프의 손에서 자라난 두 형제는 당연히 정상적인 정서를 가질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반은 대학 2년동안 스스로 밥벌이를 하면서 공부를 해야 했고 이후 각 신문의 편집자들과 친분을 맺게 되면서 여러 전문서적에 대한 자신의 독특하고도 신랄한 비평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기억되게 된다. 양육자 예핌이 특별히 귀여워했던 막내아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 (알료샤)는 성인이 된 이반이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살게 되기 1년 전부터 이미 그 마을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겨우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성모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평생동안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과묵하고 소탈한 성품의 그는 급우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심지어 아버지조차 그에게만은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진실하고도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알료샤는 또한 다른 청년들과 같이 자기 진리의 조속한 성취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신과 영생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자마자 영생을 위해 살고 싶다. 어중간한 타협 따위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 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성경의 “그대가 완전해지기를 원할진대 그대가 소유한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를 지니라.”라는 글귀를 읽고 알료샤는 나는 ‘모든 것’대신 2루블만 내고 ‘그를 따르는’ 대신에 미사에만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 ‘모든 것이냐, 아니면 2루블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그는 고향의 수도원을 찾아와 조시마 장로를 만난다. 알료샤를 몹시 사랑하여 자기의 암자에 받아들인 이 조시마 장로는 이 수도원을 융성하게 한 장본인이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한껏 받는 신비스러움과 지적, 인격적 완성을 고루 보여주는 인물로 자기 특유의 그 정신적인 특성으로 알료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여러해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고백과 번뇌와 하소연을 듣고 충고와 위로의 말을 해주었던 조시마 장로는 가족들의 모임이 있기 전 그를 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신앙 때문에 번민하는 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조시마 장로는 인간의 신앙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기계적으로 가지게 된 신앙에 대한 신념을 얻고자 괴로워하는 여지주 호흘라코바 부인에게 사랑을 실천에 옮기도록 조언한다. 그는 “개개의 인간에 대한 증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이 더욱더 열렬해 진다”라고 고백했던 어떤 의사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면서 그 부인이 그에 대해 그토록 상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많은 것을 행한 셈이라고 위로한다.
호흘라코바 부인과 함께 온 부인의 딸 리즈는 알료샤를 사모하여 나중에 사람을 통해 사랑의 편지를 그에게 전하여 알료샤를 당황하게 만들게 된다. 자신에게 남은 재산이 없다는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드미트리와 아버지 표도르간의 재산 분배와 상속 문제가 심각해짐을 인식한 아버지의 제의로 조시마 장로의 수도원으로 가족 모두 모이게 된다. 여기에 자유주의자이며 자유 사상가인 동시에 무신론자인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미우소프도 참석한다. 늦게 도착한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를 기다리던 일행은 이곳에서 주로 이반 표도로비치와 두 수도사 파이시 신부와 이오시프 신부 그리고 미우소프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을 하게 된다. 그들은 조시마 장로의 앞에서 교회와 국가라는 개념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파이시 신부는 교회야말로 진정한 왕국이며 군림할 사명의 띄고 있다고 주장하나 이반은 침착하고도 열의 있게 국가와 교회와의 타협은 완전하고도 순수한 본질로 보아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우소프는 파이시 신부의 주장, 즉 종국에 가서는 국가가 반드시 교회와 하나가 되리라는 말에 대해서 한없이 먼 훗날의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조시마 장로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계율은 범죄자 자신의 양심에 깃들여져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회, 즉 교회의 아들로서의 자기의 죄를 자각할 때 비로소 범죄자는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란 신앙의 총체이다. 그래서 형식과 제도로 일관된 국가는 교회와 비교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비대해지는 교회가 가지는 제도와 계급은 순수한 의미로서의 교회가 아닐 것이다. 체면과 같은 외형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며 지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을 학대하며 심지어는 그것에 희열을 느끼며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해 안도를 느끼는 표도르와 체면 따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자만심에 가득찬 미우소프는 약간의 성격적 대립을 보여주지만 그들 모두 불완전한 인간을 나타낸다.
드미트리와 아버지 표도르의 사이에서 중재 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반은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성경의 소유자로 자만심에 가득차 그 아버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또한 아버지와의 비슷한 면모를 보여준다.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며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드미트리는 세 형제 중 아버지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결국 이들의 수도원 방문은 애초의 목적에는 별 도움없이 오히려 화합이 아니라 서로에게 악영향을 미친 방문으로 끝나게 된다. 또 아버지와 드미트리는 그루셴카라는 한 여자로 갈등이 심화된다. 조시마 장로앞에서 서로에게 욕을 하며 극렬한 대립을 벌이고 있던 두 사람은 갑자기 장로가 일어서서 드미트리에게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정중하게 절을 하는 바람에 당황해 버린다. 놀란 드미트리는 별안간 뛰쳐나가 버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당황하여 밖으로 나온다. 미우소프는 이반과 함께 수도원장의 점심초대에 응하기 위해 들어가다가 자신이 벌인 논쟁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이 표도르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집에 돌아간 줄 알았던 다시 돌아와 표도르는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면서까지 수도사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며 모욕하고 알료샤까지 집으로 돌아오라고 시키고는 난폭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을 부축하는 알료샤에게 연로한 조시마 장로는 가족들이 돌아간 뒤 자신의 죽음이 며칠밖에 남지 았았음을 예언하며 수도원을 떠나라고 말한다. 그는 알료샤가 아직 오래 방랑해야 할 운명이며 가서 형님들의 곁에 있어주라고 충고한다.
알료샤는 수도원을 나와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으로 향하던 중 드미트리와 만나게 된다. 드미트리는 알료샤에게 도움을 청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드미트리가 견습사관으로 있을때 카테리나의 아버지 중령이 공금 횡령으로 곤경에 처해있을 때 자신을 무시했던 카테리나에게 그것을 미끼로 앙갚음을 하려고 그녀를 유인하지만 그녀를 보자 마음을 바꾸어 아무 목적 없이 그녀를 도와 주고 후에 그녀의 청혼에 응하여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고향에 돌아온 드미트리는 어린 나이에 남자에게 버림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나이 많은 상인 삼소노프의 정부이기까지 한 그루셴카에게 깊이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또한 그녀에게 깊이 빠져 서로에 대해 더욱 공격적으로 된다. 그루셴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동시에 순수한 카테리나를 배신했다는 사실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히며 열렬한 마음의 참회의 뜻을 보인 드미트리는 자신이 착복한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돈 3천 루블을 갚고 그녀와의 관계를 매듭짓기 위해 알료샤에게 대신 아버지에게 돈을 요구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알료샤가 돈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루셴카가 그 집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한 드미트리가 집안으로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둣발로 걷어차며 난동을 피운다.
결국 드미트리는 돈을 얻지 못하고 게다가 알료샤가 드미트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카테리나의 집에 갔을 때 그루셴카가 그 집에서 카테리나를 모욕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철저한 무신론자이면서 냉소적인 성격의 이반은 카테리나를 위로하기 위해 만났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나 카테리나는 이반을 이해하면서도 드미트리를 잊지 못한다. 드미트리는 아버지가 그루셴카에게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한 것을 알고 아버지와 거리의 미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그루셴카가 오지 않는지 집을 감시한다.
냉소적이고 비뚤어진 성격의 스메르쟈코프는 드미트리에게 그루셴카가 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표도르와 자신만이 알고있는 암호를 가르쳐주고는 자신이 만일 간질병의 발작을 일으키고 또 그리고리와 그의 부인이 잠들게 되면 표도르는 혼자 있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리자베타(리즈)의 편지에 대답하기 위해 호흘라코바 부인의 집에 가던 알료샤는 거리에서 여섯명의 소년들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던 일류샤라는 소년을 보호하다가 오히려 그 소년이 던진 돌에 맞고 또 손가락을 물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중에 그는 일류샤가 형 드미트리가 술을 마시다가 싸움을 벌여 수염을 끌고 다니는 창피를 준 스네기료프 2등 대위의 아들임을 알고 그를 위로하게 된다. 호흘라코바 부인의 집에 리즈를 만난 알료샤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다. 리즈의 집에서 카테리나와 이반을 만난 알료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반은 지배욕이 있는 카테리나와 결혼해도 결코 행복해 질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받는다. 카테리나는 알료샤에게 자신이 드미트리를 증오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엾게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일생동안 그의 행복의 도구가 되겠다고 고백한다.
결국 이반은 괴로운 마음으로 알료샤에게 드미트리에 대한 카테리나의 사랑은 자학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모스크바로 떠나버리겠다고 말하고 알료샤는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에 슬퍼한다. 알료샤는 드미트리를 걱정하는 카테리나의 부탁으로 드미트리에게 모욕을 받은 스네리료프 대위에게 사과의 뜻으로 2백 루블을 전해주기 위해서 그 집을 찾아간다. 그는 병든 아내와 무뚝뚝한 큰딸, 곱사등이에 앉은뱅이인 작은 딸을 데리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스네리료프 대위에게 돈을 건네지만 대위는 처음 뛸듯이 기뻐하다가 자신과 가족들의 자존심을 생각해내고 갑자기 돈을 내팽개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알료샤는 다시 가서 이젠 그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돈을 줄수 있게 되어 오히려 기뻐한다. 정말로 알료샤는 나중에 다시 그에게 가서 돈을 전해준다. 막내 아들인 일류샤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어 절망에 빠진 스네리료프 대위는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카테리나의 도움을 받게 된다.
드미트리의 배반과 이반과의 이별로 히스테릭한 상태에 빠지게 된 카테리나는 무서운 고열로 괴로와하고 뭔가 무서운 재난이 닥쳐올것만 같은 예감에 알료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드미트리를 다시 만나야 겠다고 생각한다. 드미트리를 찾던 알료샤는 여행을 떠나기 전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이반의 부름을 받는다. 스스로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이반은 알료샤가 하는 카테리나와 드미트리에 대한 질문을 피하며 그에게 신에 대한 문제를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계, 신의 세계를 절대로 인정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두뇌로는 신의 문제,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문제는 엄두도 낼수 없다며 언젠가 먼 앞날에는 인간 세계의 모든 고통이 아물고 영원한 조화의 순간에 말할수 없는 고귀한 현상이 출현해서, 그것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넘쳐흘러 모든 사람의 불평을 풀어주고 인간이 모든 악행과 그들이 서로 흘리게 했던 피를 보상해주고 인간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런 것들을 변호하기에 충분하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세계를 허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알료샤에게 세상에는 인간을 용서해줄 자격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자신이 지은 극시를 그에게 들려준다. 그의 극시에서 등장하는 15세기의 다시 등장한 그리스도를 심문하는 늙은 심문관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한 악마가 했던 세 가지 질문의 불합리성을 주장하며 다시 올 선택받은 자들은 다만 자기 자신을 구원했을 뿐이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했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에게 화형을 언도한다. 알료샤는 그의 자유론에 흥분하여 이반이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소리치지만, 이반은 침착하게 자신의 극시의 끝을 맺는다.
늙은 심문관이 말을 마치자 얼마동안 침묵을 지키던 죄수는 말없이 심문관에게 다가와서 아흔살의 그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그것이 그 죄수의 대답의 전부였고 심문관은 문을 열어젖히고는 죄수를 향해 “자 어서 나가, 그리고 다신 오지 말아라... 영원히” 이렇게 말하고는 그를 ‘어둠의 광장’으로 내보낸다. 이반은 자신을 위하여 슬퍼해주는 동생에게 자신이 세상의 그런 지옥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알료샤를 상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할수 있으며 알료샤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신은 흡족하고 삶에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알료샤는 떠나는 이반의 뒷모습에서 기묘한 인상을 받는다.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알료샤가 조시마장로를 만나 이반형만을 만났다고 얘기하자 장로는 서둘러서 드미트리를 찾아보도록 말한다. 그는 자신이 드미트리에게 절을 한것은 드미트리가 앞으로 겪어야할 무서운 고난 앞에 머리를 숙였던 것이라고 말하며 꼭 형님들의 곁에 있어줄 것을 당부한다.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에게 그가 수도원 담 밖으로 나가서 속세에서도 수도사처럼 살게 될 것이며 그의 적들조차도 그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장로는 또한 알료샤가 자신에게 있어 왜 그처럼이나 사랑스러운지 그 이유는, 자신을 수도사라는 보람있는 길로 들어서게 해주었으며 불과 열 일곱살의 어린 나이로 자신의 앞에서 병으로 죽어간 형이 알렉세이와 정신적으로 너무나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조시마 장로의 형 마르켈은 처음에는 신 따윈 절대로 없다고 욕을 하며 비웃기만 했었으나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수명이 1년도 채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성당엘 나가게 된다. 마르켈은 이후 변화를 일으켜 자신이 이세상 자기 주위의 모든 아름다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지 못하고 혼자만 치욕 속에서 살아온 것에 대해 후회하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비록 내가 모든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나를 용서해 줄 거에요. 이것이 천국이지요. 나는 지금 천국에 있는 게 아닐 까요?”라고 고백한다.
조시마 장로 즉, 어린 지노비는 자라서 새로운 교육을 받으면서 어릴 적 형에게서 받은 모든 인상을 잊고서는 음주, 방탕, 만용으로 가득한 어리석은 젊은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이후 어떤 젊은 지주의 약혼녀를 유혹하다가 그 지주와 결투를 하게 되나 그 전날 별다른 이유 없이 시종을 잔인하게 후려쳐서 피투성이를 만든 일로 인해 형 마르켈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그토록 잔인하게 때렸다는 것과 자신이 이 모든 일에 대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번민하게 되고 결국 다음날의 결투에서 상대방이 총을 쏜 후 총을 버리며 큰소리로 감사하며 그에게 용서를 빈다.
지노비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제대신청을 하고 기다리던 중 자신의 결투에 대한 얘기를 듣고 찾아온 한 낯선 손님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이 14년 전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돈 많은 미망인을 살해하고 그녀의 하인의 범죄로 위장해 놓았던 사실을 그에게 고백하고 지노비에게 “어서 내 영혼을 결정해 주십시오”라고 소리친다.
지노비는 그에게 가서 자백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오랫동안 번민하다가 자신의 생일날 모든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며칠 뒤 병으로 죽게 된다. 지노비는 마지막으로 감격과 기쁨의 마음으로 가득한 그를 만나고는 5개월 뒤 수도사의 길을 들어서게 된다. 조시마 장로는 모든 수도사와 알료샤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고는 마지막으로 수도사의 의의와 종속의 관계, 또 기도, 사랑, 타계와의 접촉, 최후의 신앙, 지옥의 불에 대한 담화를 들려준 뒤 황홀감에 빠진 듯 대지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기쁜 마음으로 숨을 거둔다. 슬픈 마음으로 조시마 장로의 장례를 치르는 중 수도사들은 자연을 초월한 급속한 부패로 조시마 장로의 시신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당황해 한다. 곧 조시마 장로의 명성을 시기하는 자들이 의기 양양하게 ‘이건 하느님의 심판이 인간의 심판과는 다른 것’이라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니기 시작한다.
알료샤는 무엇 때문에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하는지 괴로워하지만 결국 장로의 사랑은 자신의 사랑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것임을 깨닫고 더이상 장로의 시신의 부패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조시마 장로의 관앞에서 기도를 한뒤 밖으로 나와 참을수 없는 환희로 대지를 포옹한다. 그 후 일생동안 알료샤는 이 순간을 “그때 누군가가 내 영혼을 찾아 주었던 것”이라고 상기한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장례가 끝난 뒤 ‘속세로 나가라’라는 장로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 수도원을 나온다. 알료샤는 그루셴카를 찾아갔다가 그녀가 5년 간이나 사랑해 왔던 장교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루셴카는 그 사실을 드미트리에게도 말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아버지 표도르라는 연적에게 정신이 팔린 드미트리는 그 일을 곧 잊고 만다.
드미트리는 알료샤를 만나 그루셴카가 카테리나를 모욕한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자신이 비열한 사내라는 것을 자인하고 만일 그것으로 카테리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풀어줄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돈을 갚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돈이 급해진 미챠(드미트리)는 삼소노프와 다른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유산으로서 아버지에게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삼림을 3천 루블에 사줄 것을 부탁하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미챠는 다시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그루셴카)를 찾아가지만 하녀로부터 그녀가 나갔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에게 찾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미칠 것 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간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마침 정말로 스메르쟈코프가 간질병 발작을 일으키고 늙은 하인 그리고리와 부인도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있었다. 미챠는 그루셴카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미칠 것처럼 분노하여 방으로 뛰어든다. 담장을 넘어 달아나던 미챠는 잠이 깨서 쫓아온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노인을 놋공이로 후려쳐서 큰 상처를 입히고는 그루셴카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그는 그루셴카의 하녀 페냐로부터 그루셴카가 5년 전의 바로 그 장교를 만나러 모크로예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망연자실한다.
친구 칼가노프를 만나 사정하여 권총을 빌린 미챠는 자살할 결심을 하고 다시 모크로예로 달려가 그루셴카와 일행인 폴란드인 장교를 만난다. 그는 마치 미친 듯이 흥분하여 돈을 마구 써대기 시작한다. 그는 폴란드인 장교에게 그루셴카를 잊고 떠난다면 3천루블을 주겠다고까지 말하여 그를 화나게 만든다. 그러나 폴란드인 장교는 카드놀이에서 속임수를 쓰는 등 비열한 짓을 거듭하고 그루셴카는 그제서야 자신이 미챠만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용서를 빈다.
한편 피에 젖은 미챠를 보고 놀랐던 그루셴카의 하녀의 고발로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죽음과 그리고리의 부상이 알려지고 곧 경찰들이 파견되어 미챠가 체포된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방에서 그가 그루셴카에게 주려고 봉투에 넣어 두었던 3천 루블이 없어진 사실이 밝혀지고 미챠가 의심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챠가 그날 낮까지 돈이 없어서 모크로예로 갈 여비까지 빌렸던 사실이 밝혀지나 미챠는 끝까지 자신이 쓴 돈은 예전에 카테리나에게서 받은 돈중 절반인 1천 5백 루블이었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미챠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루셴카만이 미챠를 끝까지 변호하고 미챠는 결국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알료샤는 병을 앓는 일류샤를 계속 도와주기 위해서 그의 집을 다니면서 일류샤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하여 싸웠던 친구들을 데려다가 일류샤에게 화해를 시켜준다. 그는 일류샤의 친구 소년들로부터 존경을 얻게 되고 특히 일류샤에게 칼로 찔리는 상처까지 입었던 콜랴 크라소트킨이라는 영리하고도 어른스러운 소년과 친구가 된다. 알료샤를 정신적으로 존경하게 된 콜랴는 일류샤를 여러가지로 위로하여 기쁘게 해준다.
재판날이 다가오자 알료샤는 그루셴카의 집을 찾아간다. 미챠가 체포된후 그루셴카는 심한 병에 걸려 한달이 넘게 앓는다. 병석에서 일어난 그루셴카는 어떤 정신적 변화를 나타내어 이전의 경박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도록 변한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는 늙은 상인 삼소노프의 집에 그가 절대 오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용태를 묻는 한편 미챠에게도 면회를 매일처럼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미챠가 알료샤에게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이반이 미챠를 찾아왔다는 얘기를 해주었다고 알료샤에게 얘기 해준다. 그루셴카는 이반의 귀향 이후 미챠가 변한것 같다며 미챠를 만나달라고 부탁한다.
드미트리는 알료샤에게 그루셴카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와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이반이 찾아와서 탈출을 권했다고 말한다. 미챠는 이반이 그런 권유를 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믿고 있는 듯하다며 알료샤에게 미친듯이 자신의 죄를 믿냐고 묻는다. 결코 형님이 죄를 지었다고는 믿지 않는다고 말해준 알료샤는 불행한 형의 영혼속에 비애와 절망을 느끼고는 괴로와 한다. 알료샤는 형이 자신을 그렇게까지도 불신한데 대해 슬퍼한다. 미챠는 알료샤의 대답에 환희를 느끼며 알료샤에게 “이반을 사랑해라.”라고 말한다. 알료샤는 이반을 만나 드미트리가 절대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으며 자신은 스메르쟈코프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한다. 알료샤는 또한 이반이 이반 스스로가 아버지를 죽인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며서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아버지가 그루셴카와 결혼하여 유산을 못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무의식중에 미챠가 아버지의 죽일 것을 바라고 있었던 이반은 갑자기 끓어오르는 억제할 수 없는 어떤 상념에 이끌려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가게 된다. 스메르쟈코프는 경멸하듯이 자신보다는 오히려 이반이 미챠가 표도르를 죽이기를 바라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분노를 몸을 떨던 이반은 곧장 카테리나의 집으로 찾아가서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갔던 얘기를 그녀에게 털어놓고는 만일 범인이 드미트리가 아니라 스메르쟈코프라면 자신도 또한 공범이라고 말한다.
이에 이반에 대해 사랑을 느끼는 카챠(카테리나)는 언젠가 드미트리가 취중에 적어 보내준 편지를 보여준다. 그 편지에는 “이반이 떠나는대로.. 아버지한테 가서 머리를 부수고라도... 3천루블만은 꼭 갚겠다..”라고 적혀있어서 이반은 그 편지로 인해 미챠의 죄를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며칠 뒤 카테리나는 미챠에 대한 사랑을 되살리는 듯해서 이반으로 하여금 격렬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카테리나가 모호하게 스메르쟈코프를 만났다라고 말하며 갑자기 미챠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반뿐이라고 말하는데 격분한 그는 다시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다. 이반을 만난 스메르쟈코프는 냉소적인 태도로 자신이 표도르를 죽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교사한 것은 이반이라고 말한다. 놀라는 이반에게 자신의 간질병은 가장한 것이었다면서 그날밤 드미트리가 그루셴카가 오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돌아간 후 자신이 표도르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는 돈을 훔쳤다며 3천 루블을 내놓는다.
그는 오히려 이반에게 살인자라고 말하며 자신이 살인을 하게된 그날 밤의 자세한 상황을 말해준다. 어머니의 피를 이어 광기 어린 오만한 성격에 이반의 무신론적인 영향을 받은 스메르쟈코프는 영악하게 만일 이반이 자신의 죄를 밝힌다면 법정에서는 믿어주지는 않더라도 항간에서는 믿을 테고 그렇게 되면 이반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이반은 분노하여 법정에서 스메르쟈코프를 고발할 것이라고 말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러나 이미 중풍성 섬망증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고 그 병으로 인해 이반은 환각을 보게 된다. 이반은 환각속에서 악마를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된다. 악마는 “양심이라! 양심이 뭔가? 양심이란 나 자신이 만들어 내는 거야.... 아버지를 죽인건 나요, 내 사주를 받고 하인이 아버지를 죽인거야라고 자백하러 가겠단 말이지”라고 말하면서 이반을 괴롭힌다. 이때 알료샤가 뛰어 들어 스메르쟈코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알료샤는 이반에게서 악마를 만난 얘기를 듣고 그를 위로한다. 알료샤는 이반이 자신이 결정한 결심에서 오는 고뇌와 깊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음을 깨닫고 비통한 마음으로 이반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곧 드미트리의 재판날이 다가왔고 사건 자체뿐만이 아니라 유명한 변호사인 페쥬코비치와 지방검사 이폴리트 키릴로비치의 대결로 이 재판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드미트리는 뜻밖에도 화려한 맞춤 프록코트를 입고 나와 배심원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고 재판 도중에도 소리를 지르는 등 흥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끝까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과 모르크예의 사람들의 미챠에 대해 불리한 증언들이 계속 이어졌고 그리고리까지도 결정적으로 미챠가 표도르를 죽인 것이 틀림없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료샤가 미챠가 그 사건이 있기 전 1천 5백루블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억을 되살려 내고 이어서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분명하게 자신이 피고의 처가 될 여자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하인 스메르쟈코프가 포도르를 죽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이어서 악화된 병에도 불구하고 출두한 이반은 갈등 끝에 스메르쟈코프에게서 되찾아온 3천 루블을 보여주며 자신의 교사로 스메르쟈코프가 살인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섬망증에 걸린 그의 말은 신뢰성이 없었고 게다가 그의 갑작스러운 자백으로 충격을 받은 카테리나가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미챠가 자신에게 보냈던 예의 그 편지를 공개하고 만다. 그녀는 이반이 줄곧 형의 죄를 덜어주려고 애썼으며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없었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다고 말하며 그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러자 이번엔 그루셴카가 벌떡 일어나 미챠에게로 달려가며 카챠를 욕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또 미챠가 그녀를 애타게 찾아 이로 인해 오히려 재판정이 엉망이 되고 만다. 검사 이폴리트 키릴로비치는 최후논고에서 피고 드미트리 표드로비치에 대한 성격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범죄이전 그가 처해있던 경제적인 궁핍과 아버지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의 감정을 증거로 제시한다. 그는 또한 불행하고도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있는 까라마조프 일가에 대해 러시아 현대의 지식계급에 공통되는 어떤 근본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표드로 파블로비치가 경박하기 이를데 없는 어릿광대이며 냉소가에 호색한이었다면서 또한 이반과 알료샤까지 까라마조프가의 성격적인 특징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극단적인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피고가 카테리나로부터 3천루블을 받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까라마조프적인 요소를 들추어낸다. 그는 친부살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정당화시킴으로써 러시아인의 광란적 방약무인의 질주를 자극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페쥬코비치는 냉정하게 심리해부의 남용과 악용을 비판하고는 강탈당했다는 3천 루블이라는 돈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또한 그는 모든 증거들이 다 피고를 유죄를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친부살해의 끔찍한 사건의 당사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한다. 즉 포도르는 스스로 아버지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는 드미트리가 거칠기는 하지만 참으로 고결한 마음의 소유자로서 그 마음이 사랑을 느끼는 순간 그는 신과 인간의 자비로움을 깨닫게 될 것이며 후회와 타는 듯이 고통스러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와 변호사의 최후 논고가 끝나고 사람들은 페쥬코비치 변호사의 말에 폭풍후같은 환희를 터트리며 드미트리의 무죄를 확신했으나 뜻밖에도 배심원들은 드미트리의 살인과 절도에 대해 유죄를 선언한다.
방청석에서 일어난 무서운 혼란속에서도 선고를 들은 미챠는 갑자기 일어나서 찢어지는 듯한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이 아버지의 피에 대해서는 죄가 없음을 호소하며 카챠에게 용서한다고 외친다. 그루셴카는 드미트리의 유죄선고를 듣고 큰소리로 통곡한다. 재판이 끝난 후 이반과 알료샤는 미챠에게 탈옥할 것을 권하고 미챠는 그루셴카와 함께 미국으로 탈주할 것을 꿈꾼다. 알료샤는 모든 일이 끝난 후 불행한 소년 일류샤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소년들에게 용감하고도 착하고 친절했던 일류샤를 기억할것을 당부한다. 알료샤의 인품에 감격한 소년들은 마지막으로 모두 함께 “까라마조프 만세”를 외친다.
이 장면은 사실 급박한 전개를 보이던 미챠의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적 인간상과 현세에서의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한 소설의 주제로 삼았던 도스토예프스키를 생각한다면 이 장면은 아주 다르게 해석이 된다. 그리스도적 면모를 보이는 알료샤와 그를 따르는 12명의 소년들은 마치 그리스도와 12명의 사도들과 같다. 수도원을 나온 알료샤는 세상에 온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조시마 장로의 말대로 그는 불행한 사건을 겪는 미챠와 이반의 곁에 있어 주었다. 또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화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이야기의 전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적인 요소와 그에 대한 신앙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 의해 이끌어져 나가는 세상을 결코 허용할 수 없었던 이반과의 토론을 통해 이반의 사상을 보여준다. 그는 이반의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해했고 그의 사상을 비난하면서도 그를 사랑했다.
이반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스메르쟈코프는 여기서 유다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인으로서 자랐고 미친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반항적인 면모를 보여왔고 하인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치밀하게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모든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는 이반과의 논쟁에서 박해자에게 잡혀 신자이냐 아니냐를 대답하기를 강요받는 그리스도교가 만일 신자가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이미 그는 그리스도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궤변을 펼친다. 신자라는 사실을 거부한 그리스도교는 이미 이교도와 같으므로 그에게 파문의 죄를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스메르쟈코프가 자살까지 하게된 이유는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는 그 바로 직전까지 이반을 경멸적으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그는 이반을 잘알고 있는 듯이 법정에선 그의 말을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었다. 그런 스메르쟈코프가 갑자기 ‘누구에게도 죄를 돌리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의 의지와 소원에 따라’ 생명을 끊었다는 사실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로인해 드미트리의 무죄가 증명될 수 없었음은 사실이다. 사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반은 이제까지 그가 철저하게 가지고 있었던 무신론이 약간은 흔들리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이반이 느꼈던 오만한 결심에서 오는 고뇌와 깊은 양심의 가책은 그가 믿지 않았던 신과 그 진리가 아직도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던 그의 마음을 정복해 가고 있었던 데서만이 올수 있었던 것이다. 이반이 그런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 드미트리는 또다른 갈등을 겪고 있었던 듯 하다. 그는 자신이 겪게된 시련으로 인해 그루셴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방탕하며 호색한 같아 보였던 드미트리였지만 한 여인에게 자신을 던지면서까지 사랑을 보여줬던 보이지 않는 고결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죽였다는 끔찍한 사실만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부인한다. 그는 자신이 다치게 한 하인 그리고리에 대해 엄청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고 자신이 배신한 여자인 카테리나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 책은 좀 읽기에 어려운 책이었다. 줄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인물들의 뜻밖의 행동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게다가 부분 부분 나오는 등장인물간의 신에 대한 논쟁부분은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반과 알료샤의 논쟁부분은 상당히 흥미 있었다. 철저한 그리스도교적인 사회인 서구의 러시아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반은 신앙이 아니라 과학에 더욱더 흥미가 있었고 그의 무신론은 약간 특이한 듯 싶었다. 그는 신앙은 인정하고 그리스도는 기본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 세상을 인정할 수가 없기에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극시에서 현세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알료샤를 여러면으로 흥분하게 만들정도로 비약적인 무신론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후 스메르쟈코프로 인해 드러나게 된 자신의 마음속의 죄로 인해 갈등하게 된다. 알료샤는 그런 그를 보면서 “하느님은 승리하신다”라고 확신하게 된다.
서구적인 신앙관, 아니 시대가 달라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한 여러 등장인물들은 이해하기가 힘들면서도 뭔가 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는 듯 했다.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 벌을 받게 된 드미트리와 마음속으로 지은 죄에 대해 번민하는 이반.. 그리고 실제로 죄를 지은 스메르쟈코프는 뜻밖에도 자살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료샤는 소년들에게 자신과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용감한 소년 일류샤을 기억해 줄 것을 당부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간직되었던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마음의 양식이며 그 추억만큼 미래의 생활을 위해서 숭고하고 강렬하고 건전하고 유익한 것은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알료샤는 마치 자신과 두 형들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두형의 불행한 현재를...
긴 호흡, 깊은 사유, 시공을 초월한 시대정신
방대한 분량도 대작의 요건 중 하나인가? 촘촘하고 빈틈없는 글자들과 판형, 그리고 녹록치 않은 양이 시작부터 나를 버겁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말도 독서를 더디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초심자에게 무엇을 안겨줄 것인가? 완독에 거의 3주가 걸렸다. 덕분에 독서를 위한 호흡이 좀 더 길어 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소설은 과연 가벼운 글 쓰기도 부담없는 글읽기도 아니다'라는 점을 확실하게 새겨 준다. 소설, 나아가 문학작품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당대인들로 규정되는 그 시대와 시대정신의 반영이자 우리들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초역사적, 본원적 질문에 대한 탐구와 모색, 이해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전자의 맥락에서 발견하는 특수성과 후자에 대한 보편적 해답들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 작품과 작가의 이해를 위해 나름대로 근대(주로 19세기) 러시아문학의 계보를 간추려 본 것도 작은 소득이다. 푸쉬킨과 고골에서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거쳐 체호프와 고리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러시아적 전통과 토양속에서 이들이 빚어 낸 문학작품들은 과연 동시대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인의 공감속에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 가지 느낌, 도스토예프스키도 '러시아인들은 철학자들'이라고 자부심 넘치게 피력하고 있는 데, 어쩌면 (환경결정론적 편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북극에 가까운 춥고 매서운 기후가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와 사유를 풍부하고 깊이있게 축적시키고 단련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진정한 러시아 인들은 철학가들이기 때문이지(p.1027)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시대를 거친, 19세기 후반(농노해방과 그 이후) 러시아 사회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작가는 '까라마조프 적(的)'이라는 표현을 여러차례 등장시킨다( 호색한과 탐욕과 유로지비, 하느님으로부터 정욕을 선물받은 벌레, 광적이고도 채 다듬어지지 않은 대지의 힘, 아주 극단적인 모순, 서로 다른 두 심연, 머리 위에 있는 있는 천상의 심연과 우리들 발 밑에 있는 가장 저열하고 악취나는 타락의 심연..). 더구나 프랑스를 필두로 한 유럽 절대왕정과 그를 둘러싼 상류사회의 출구없는 퇴폐와 허영, 쾌락의 탐닉과 방황,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바야흐로 수면 위로 부상하려는 거역할 수 없는 사회변혁의 기운들, 이를 반영하는 사상과 인식, 감정과 정서들의 대립과 대결의 임박함은 알게 모르게 그 때를 사는 사람들에게 감지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시대는 단지 까라마조프 뿐만아니라 사회가 온통 히스테리적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요즘 정신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p.1008) - 오오, 우리 러시아 인들은 모두 극단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선과 악의 놀라운 혼합체인 것입니다.(p.1218) - 미친 듯이 달리는 삼두마차, 방종과 질주, 개화와 문명을 위해 광포하게 질주하는 환영, 그 불안의 소리((p.1260)
이 작품을 통해 표출되는 작가의 사상, 인생관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신(神)과 인간(人間)의 문제이다. 과연 신(神)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교회의 사회재판과 그 권리의 범위문제(p.116)"가 가지는 내포와 외연속에서 작가의 인식을 살필 수 있을 것같다. 역시 그 압권은 제5권 찬반론 중의 "대심문관"편이다. 박상륭(죽음의 한 연구)이 떠오르고 이문열(사람의 아들)이 그보다는 조금 덜 뚜렷이 떠오른다. 그것은 곧 영생에 대한 믿음을 인간으로부터 박탈해 버리면 당장 사랑뿐 아니라 인류 생활을 지속시키는 모든 활력이 고갈되고 말 것이라는 입장에서 그 반대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는 이른바 지질학적 변동이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념만을 파괴하면 되는 걸, 만일 인류가 한 사람씩 하느님을 거부한다면, 과거의 모든 세계관과 도덕률은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는 거야. 인신(人神)이 등장하는 거야. 인간은 거대한 신적 자존심으로 위대해 질 것이며 스스로의 의지와 과학으로 무한히 자연을 정복하면서 그때마다 그로 인해 커다란 희열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천국의 희열에 대한 과거의 희망을 보상해 줄 수도 있겠지.......(p.1133참조)
두 번째로, 이 작품의 모티브이자 핵심 골격인 '친부살해'사건-그것도 돈과 여자를 매개로 한-의 변론을 통해 호소하고자 한 윤리(倫理)와 가족(家族)의 가치문제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무너진 윤리에 대한 비판과 그 복원에 대한 상투적 호소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부모와 자식, 가족에 있어 교육문제를 중요하게 제시한다. 아름다운 추억이 우리를 커다란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아름다운 추억, 특히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추억들은 미래 생활에 숭고하고도 강렬한 그리고 유익하고도 아주 건전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그런 추억들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면, 그 추억은 언젠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p.1351)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마도 그러하였던 것이고 나 또한 그러할 것이다.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구원과 희망의 메세지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 작가이지 무신론자가 아니다. 문학평론가들조차도(꼰스딴찐 모출스끼처럼)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낸 주인공들에 매혹되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윤색한 경우가 없지 않다고 나는 본다.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이반 까라마조프의 <대심문관>의 전설을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에 걸쳐 신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증명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만 보아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스뜨로프스끼 처럼 파지티브한 공산당 팸플릿 같은 소설을 썼다면 그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서 빛난다. 사실,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의 신비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예수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왜 사람들 앞에 휘황찬란하게 재림해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돌 한 조각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주기만 해도 수 천명은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심문관은 묻는다: 왜 악마의 유혹을 거절해야만 하나? 그 기적으로 더 많은 민중을 구원할 수 있을텐데? 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 구원하는 것 아니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의 입을 통해서 그가 피를 토하며 고민했던 문제를 고백한다; 신이 살아있다면 죄 없는 인간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만 할까?; 그래서 이반은 대심문관의 입을 빌려 죄 없는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기적을 베풀고, 마침내 지상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전설 속에서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이 틀렸다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대심문관>의 이야기 속에 다 들어있다. 예수의 침묵이야말로 가장 우렁찬 웅변인 것이다. 욕정과 돈 때문에 가족이 서로를 배신하는 지옥같은 속세 속에서, 기적과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자유의지에 의해서 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수라는 것을 웅변한다.
더 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의 이야기 속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실패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예견해낸다. 기적에 의해 지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환상을 민중들에게 심어주고 기독교와 너무나도 흡사한 비전을 제시하는 파쇼야말로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것이다. 사실, 돌이 빵으로 바뀌는 기적은 대심문관 같은 사람들의 손에서가 아니라 민중 자신들의 손에서 일어난 것의 눈속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속에서 보지 않았던가. 하나 더 지적하자면, 위의 분은 아이들의 등장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셨는데, 아이들이 나옴으로써 <까라마조프..>의 비전은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평론가들에 따라서는 마지막에 아이들과 알료샤가 모여 화해하는 장면을, 시쳇말로 촌티나는, 신파조의 장면이 아니냐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도스토예프스키가 심사숙고 끝에 집어넣은 장면임에 분명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항상 생활고에 쪼들렸기 때문에 부유했던 다른 러시아 작가들처럼 퇴고를 해볼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인쇄가 되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집필한 것을 깨닫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까라마조프..>를 쓸 당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그는 분명히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퇴고를 거듭했을 것이다. 알료샤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를 속세로 보낸다. 그러나 그 자신도 자신이 떠나는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파계의 힌트는 조시마 장로의 형이 죽어가면서 남긴 이 한마디 말에 들어있다:"산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어요!.." 이 짧은 한 마디야말로 <까라마조프..>의 주제를 단숨에 설명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버지 까라마조프는 살해당하고, 드미트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극의 길을 걷게 되고, 이반은 병을 얻어 쓰러지고- 이 증오와 광기의 지옥도 속에서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희망은 바로 아이들의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렇다. 수도원에서 다른 신도들의 죄를 위해 기도하고 독야청청하는 것도 하나의 위대한 삶일 수 있다. 그러나 속세에서 서로를 구원하려고 애쓰고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정말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들에게서 구원의 희망을 보고 인간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소설의 인물들 이반과 라끼찐에 어쩔 수 없이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들과 몹시 닮았기 때문이다. 이반은 어떤가 무신론자인 그는 자신의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단,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라끼찐은 기회주의자였다. 내가 라끼찐의 이야기에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라끼찐이 성인들을 깔아 뭉게고, 그들을 타락시키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소설은 이 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매우 즐거워하지. 난 소설의 이 문장에 몇 번씩 줄을 그었는지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과 라끼찐을 통해 나 자신과 많은 머리만 존재하는 가슴이 없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가혹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알료샤를 닮아야 한다. 그는 이반, 라끼찐 보다 지식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알료샤는 하나님을 가슴으로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것이 알료샤의 행동으로 나타나 주위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 자신의 말로 남들을 훈화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묵묵히 행동만을 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사랑을 담아서 말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의 대부분의 인물들을 보자. 그들은 매우 추악하고 비열하며 비겁하다. 소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을 조소하기도 하며 욕하기도 하며 꾸짖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비록 소설이 파국으로 끝났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했듯이 그 추악한 소설 속 인물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파국으로 끝났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소설 속 주인공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느낄 수 있게 장치해 놓았다. 삶이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는 듯이.
그렇다면 고통이란 무엇인가. 소설 속 알료샤의 한 대사를 보자.물론, 부자보다 가난 한 것이 몇 백배 더 낮지. 도스토예프스키는 불행과 악덕, 범죄 속에 빠져있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다른 선한 어떤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고통이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하나의 문과도 같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겸손함과 소설적 기교를 말하고 싶다. 그는 하루키와는 틀리게 자신이 세상에서 얻은 진리와 교훈을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더 겸손하게 그것을 자랑하지도 뽐내지도 않으며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깨닫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독자들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담긴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감상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우선 강하게 뇌리에 남는 점은 작가의 대단한 내공이다. 방대한 작품속에 씨줄과 날줄로 짜여진 수많은 사건과 만남과 대화들은 정작 아주 짧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펼쳐진 것들이다. 이러한 수많은 장면들과 파편들을 입체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조립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대단히 세밀하면서 지칠줄 모르는 성격과 심리묘사는 다름 사람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돋보인다.
이 책을 읽은 나도 좀 변해야겠다. 계산 적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가장 충실했던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결국에는 이루어냈던 미챠를 닮아야 한다. 소설을 읽은 후에 느끼는 점이지만 하나님과 가장 친했던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가장 많이 귀를 기울였던 사람은 미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자신이 죽기 전에 이 명작을 남겼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진정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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