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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연과학 서적 천공개물 『天工開物』 요약

EnerTravel 2023. 11. 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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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 조선시대(명청시대) 자연과학 서적 천공개물『천공개물』에 대하여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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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7세기-19세기는 광업기술이 발전하여 많은 광상들이 개발되고 광물들이 채굴되었으며 철 및 유색금속을 생산하는 기술과 그것을 가공하는 기술도 발전하여 금속제품들이 보다 질 높게 만들어졌다. 특히 18세기 이후 광업이 조선정부의 통제로부터 점자 벗어나게 되면서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설점수세 제도’와 관련이 깊다. 설점수제는 당시에 활발했던 개인들의 광업경영을 승인하고 그들로부터 광물을 세금으로 수탈하는 제도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광산의 운영권을 광산종사자들에게 허가하는 임금제하의 관설민영광업이 발달했으며 광업에 대한 봉건국가의 국가적 독점을 해체하고 개인 광업을 법적으로 승인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이후 18세기 말 19세기 전반에 덕대나 물주가 상인자본을 유치하여 자본제적 경영방식으로의 민영광업의 발전으로 이어 지는 모습을 보인다. 

본론


 1)『天工開物』에 대하여


 『天工開物』은 전대에 독립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는 다양한 기술을 집대성한 책으로 백과사전적의 체계를 갖춘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천공개물은 조선과 일본뿐 아니라 서구에까지 널리 소개되었는데 18세기를 거치며 반청일변도에서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한다는 논의의 추세에 힘입어 천공개물도 조선에 전해져 오게 되었다. 이후 북학파를 중심으로 청의 선진적 기술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수용하고 자신들의 저술이나 글속에서 이 책을 적극적으로 인용 소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천공개물이 당시 다른 저서에 비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서구과학의 분석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저자 송응성이 중국의 전통적 사유와 관련된 미신적인 소재를 이야기하는 부분도 더러 존재하지만 그 또한 동아시아인이 바라본 물상과 그것의 생산에 관한 분석적 태도에 포함 될 수 있기 때문이다. 

 『天工開物』은 크게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8개의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편목의 차례는 ‘오곡을 귀하게 여기고 금옥을 천하게 여긴다’ 는 취지하에 배열되어 각장은 해당상품을 제조하고 재배하는 과정을 정확하고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天工開物』은 명대 산업 전반을 포괄하고 있는데 분량으로 보면 직접적으로 식품과 연관되는 부분이 가장 많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인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지만 이번 강의 명이 한문학과 자연과학인 만큼 이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에 속했다고 할 수 있는 광업이라는 분야를 석회, 석탄, 유황 등 비금속광물에 대한 조선후기 당시의 인식과 지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석회


『天工開物』卷 十一 燔石

凡石灰,經火焚煉爲用. 成質之後,入水永劫不壞.億萬舟楫,億萬垣墻,窒隙防淫,是必由之.
석회는 불로 태워서 만들며 석회질이 형성되면 물에 넣어도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다. 수많은 배나 많은 담벽 등의 틈은 석회로 메워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는다. 

燔灰火料,煤灰居十九,薪灰居十一. 先取煤炭泥和做成餠,每煤餠一層,舖薪其底,灼火燔之. (중략)火力到後, 燒酥石性,亦自解散.
석회를 태우는 연료는 석탄이 10분의 9, 땔나무가 10분의 1을 차지한다. 먼저 석탄을 진흙과 짓이겨 석탄 떡을 만든다. 이 석탄 떡과 석회석을 한 층씩 교대로 쌓아 올려 그 밑에 땔나무를 깔아 불을 지펴 태운다. (중략) 불기가 충분하면 돌이 연하게 변하고 또 스스로 가루로 변한다.  

 다시 설명하자면 석회는 석회석 CaCO3를 태워서 만든다. 우선 태우면 생석회가 (CaO)가 되며 여기에 물을 넣으면 석회가 되어 중요한 건축재료로 쓰인다. 바로 석회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단단해지면서 녹지 않은 탄산칼슘(CaCO3)로 변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식으로 만든 석회를 사용하여 건축물을 견고하게 만들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승정원 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1월 16일(을묘)

上曰, 磚石碎痕處, 以石灰塗之則, 似好矣。聖肇曰, 以石灰末塡補, 則足以堅完矣。上曰, 久則成石矣
상이 이르기를,

“박석에 부서진 흔적이 있는 곳은 석회를 바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이성조가 아뢰기를,

“석회 가루를 채워 넣으면 충분히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래되면 돌같이 될 것이다.”하였다.

<임원16지>에 의하면 이시기 석회생산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석회는 궁전재건과 개인들의 가옥을 건설하는 데도 많이 사용되는 건재였기에 그 생산과 상품화 과정도 끊임없이 촉진되었다. 실제로 <화성성역의 괴> 권5 조비 석회에 따르면 18세기 말에 수원화성을 건설에 사용된 석회만 8만 6422섬의 양을 추가로 사들였다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조선후기 당시에 석회가 실로 중요한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석탄

『天工開物』卷 十一 燔石에 나타난 석탄 채굴 방법

 凡煤炭經歷久者,從士面能辨有無之色,然後掘挖. 深至五丈虛,方始得煤. 初見煤端時,毒氣灼人. 有長巨竹去中節, 尖銳其末,揷入炭中透上, 人從其下施钁拾取者.
 
석탄을 캐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지면의 토질 상태를 보고 지하의 석탄의 유무를 판별하고 난 다음에 파 들어간다. 이때 깊이가 5장쯤 되어야 석탄층이 나오게 된다. 탄층의 노두가 나타나면 독기(毒氣) 여기서 말하는 독기(毒氣)는 석탄의 생성 과정중에 생기는 기체 혼합물로서 주요성분은 메탄이며 그 밖에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혼합 가스는 색이 없고 냄새도 없으며 타기 쉽고 사람에게 해롭다. 공기속에 5%~15%가 함유되면 강력한 폭발성을 가지므로 매우 위험하다.
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 대나무통의 속을 파내고 끝을 뾰족하게 깎아 탄층에  꽂아 독기를 대나투 통을 통해 배출시킨다. 사람은 그 밑에서 괭이로 석탄을 캔다.

 석탄은 금속을 제련하든가 돌을 태우는 데 쓰인다. 『天工開物』은 석탄을 덩어리의 크기나 탈 때의 불꽃 등의 물리적 성질이나 그 용도에 따라 명매, 쇄매, 말매로 분리하였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과학적인 분류방법이라 할 수 있다. 명매는 단지 얼마의 숯으로 불을 지피면 풀무로 바람을 불러 넣지 않아도 밤낮없이 세차게 탄다. 명매의 부스러기는 깨끗한 황토와 함께 물로 이겨 떡 모양으로 만들어서 태워 활용할 수 있다. 쇄매는 탈 때 불꽃이 높이 솟는 것을 밥탄이라고 하고 밥 짓는데  주로 사용하고 불꽃이 낮은 철탄은 금속을 제련하는데 사용한다. 밀가루와 같은 말매는 진흙과 반죽하여 떡 모양으로 노에 넣어 사용한다.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천계5) 11월 14일(기미) 맑음 
 
金蓍國, 以摠戎廳言啓曰, 本廳所造軍器, 北營及仁慶宮, 開局打造, 而炭石難繼, 故其中鎌槍一千柄, 則使臣軍官前縣監黃善身, 打造於南漢山城外山谷間。鳥銃則自上年七月, 加設五冶, 訓鍊本都監與本廳, 鐵物及財力, 推移相資, 或貿或造, 先畢者, 已爲分送各官矣。其後畢造者, 及曾前貿得之物, 或分送各邑, 或留上訓鍊都監, 或留置本廳。餘竝移送南漢山城計料, 而各處所造工役, 及已畢者未畢者, 竝爲別單書啓之意, 敢啓。傳曰, 知道。

김시국이 총융청의 말로 아뢰기를“본청에서 만드는 군기(軍器)는 북영(北營) 및 인경궁(仁慶宮)에 국(局)을 개설하고 만드는데, 석탄(石炭)을 계속 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겸창(鎌槍) 1000병(柄)은 신의 군관(軍官)인 전 현감 황선신(黃善身)으로 하여금 남한산성(南漢山城) 밖 골짜기에서 만들게 하였고, 조총(鳥銃)은 작년 7월부터 야로(冶爐) 5개를 더 설치하고 훈련 본도감(訓鍊本都監)과 본청에서 철물(鐵物)과 재력(財力)을 추이(推移)해서 마련하여 혹은 구입하기도 하고 혹은 만들기도 하여 먼저 마친 것은 이미 각 관(官)에 나누어 보냈습니다. 그 뒤에 다 만든 것과 전에 구입한 물건들은 혹은 각 읍(邑)에 나누어 보내고, 혹은 훈련도감에 보관하고, 혹은 본청에 보관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남한산성으로 옮길 생각입니다. 각처의 공역(工役) 및 이미 다 만든 것과 아직 다 만들지 못한 것을 모두 별단으로 서계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4) 유황

『天工開物』卷 十一 燔石편에 나와 있는 황철광석의 제련을 통한 유황의 제조


石精感受火神,火出黃光飛走,于盂掩住,則化成液汁,靠着盂低,其液流入弦袋之中,其弦又透小眼流入冷道灰槽小池,則凝結而成硫黃矣. 
유황의 노란 증기가 구멍을 통해서 피어오르면 가스는 덮여있는 사발에 머물러 식어서 액체가 되며, 사발 바닥에서 오목한 구유로 흘러 들어간다. 구유에다 작은 구멍을 내면 냉각관을 통해서 작은 못으로 흘러들어간 후 식어 응결되어 고체의 유황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광석을 채광하여 석탄 떡으로 광석을 감싸서 쌓아 올리고, 그 바깥을 흙으로 노를 축조한다. 이러한 광석을 가열하는 과정에서 아류산가스(SO2)가 나오는데 이것을 급랭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하여 유황을 얻는다. 이시기에 생산된 유황은 주로 화약제조의 주원료로 이용되었다.

 한편 유황은 이전시기에도 생산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본격적으로 여러 도들에서 생산되었다. <임원16지>에 따르면 대표적으로 충주, 경주, 청도이외에 구례, 장성, 조창등지가 이시기에 새로 개발된 유황광산으로 꼽힌다. 이에 대해서는 1665년 6월 <여러 도들에서 모두 유황을 구워내고 있는 것만큼 함경도에서는 시험 삼아 굽도록 할 것이다>는 비변사에서 제기한 내용으로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유황생산이 확대됨으로써 17세기 후반기이후 화약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위정자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해 국방강화대책을 만드는 데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1년 경술(1670,강희 9)11-01-03[01]수어사 김좌명이 유황을 세과로 삼자고 아뢰다. 

辛卯守禦使金佐明啓曰: “硫黃煮煉之法, 今幸曉解。 嶺南左道慶州、淸道之間, 皆是大山長谷, 而多産硫黃石。 頃年全東屹爲左兵使時, 煉取千餘斤於其地。 請以兩邑所屬店戶之在其地者, 屬於本廳, 蠲其雜役, 許令煮取, 以爲歲課。” 上從之。

수어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유황(硫黃)을 제련하는 방법을 이제 다행히 터득하였습니다. 영남 좌도 경주(慶州)와 청도(淸道) 사이는 모두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황석(硫黃石)이 많이 생산됩니다. 지난번에 전동흘(全東屹)이 좌병사로 있을 때에 그곳에서 1천여 근(斤)을 제련해냈습니다. 두 고을에 소속된 점호(店戶)로서 그 지역에 있는 것을 본청에 소속시켜 잡역을 줄여주고, 유황을 제련해서 세과(歲課)를 삼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숙종 36년 경인(1710,강희 49) 11월28일 (무오) 금위영의 유황 판비의 일과 역졸로 대오를 만드는 일을 논하다

藥房入診。 都提調李頣命言: “我國舊不産硫黃, 貿用於倭國及燕京矣, 孝廟朝, 嶺南人始爲採得, 自是國中所用, 不患不足。 聞廣州渡迷津上軍器寺柴場, 有産出硫黃處云。 禁營不能多儲硫黃, 每患苟簡, 宜付本營, 俾爲採用。” 上許之。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옛부터 유황(硫黃)이 산출(産出)되지 아니하여 왜국(倭國)과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썼는데, 효종조(孝宗朝) 때 영남(嶺南) 사람이 처음으로 캐어내어 이때부터 나라 안에서 쓰는 데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듣건대 광주(廣州) 도미진(渡迷津) 위의 군기시(軍器寺) 시장(柴場)에 유황이 산출되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금영(禁營)에서 유황을 많이 저축(儲蓄)하지 못하여 매번 군색(窘塞)함을 근심하니, 마땅히 본영(本營)에 주어 캐서 쓰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감상


 현재 조선시대 광업에 대한 연구는 광업사 연구, 광업경영에 대한 연구, 유황과 같은 광물들을 연구하여 조총, 화약과 같은 당대의 화기, 무기 등으로 초점을 맞춘 연구가 많습니다. 발표 준비를 하면서 자연과학과 결부시킬 수 있는 광물 그 자체에 대한 인식 및 지식과 그 활용에 대한 자료나 선행연구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업에 대한 봉건국가의 국가적 독점이 해체되는 모습은 백성 개개인들에게 광물의 유용성이 인식되어 이를 활용하고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다고 볼 때 바로 그 자본주의적 움직임의 동기인 당시의 광물에 대한 지식에 대한 연구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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