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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기이』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EnerTravel 2023. 9. 2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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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추재기이』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책의 배경

 

조선 후기 비주류였던 71명의 하층 인물들을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를 발견한 선비의 특별한 시선을 담은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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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칭별칭- 호 추재(秋齋) 또는 경원(經畹)

시대 - 조선

출생 - 사망 1762(영조 38) ~ 1849(헌종 15)

성격 - 문인

본관 -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

저서(작품) - 추재집, 서구도올, 북행백절, 석고가, 윤석가,병치행

 

어려서부터 시로 이름이 났고 만년까지 1500여 수의 시를 창작한, 정조와 순조 연간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했으며, 여항 시단을 비롯하여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들과도 시를 통해 교유한 인물이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시에 대해 두보의 시풍에 근접한다고까지 평한 바 있다. 그러나 중인 출신으로,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벼슬을 하지 못하다가 여든셋이 되어서야 노인에 대한 예우로 진사시에 급제,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사신의 보좌역으로 여섯 차례 청나라를 오가면서 중국 문인들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만년에 손자에게 필사케 하여 집필한 추재기이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조수삼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저작이다. 지은 책으로는 연상소해(聯床小諧), 추재시초(秋齋詩抄), 추재집(秋齋集)등이 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했으며 정이조(丁彛祚)·이단 전(李亶佃)·강진(姜溍)·조희룡(趙熙龍)·김낙서(金洛瑞)·장혼(張混)·박윤묵(朴允默)등 여항시인과 사귀었다. 그리고 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조인영(趙寅永조만영(趙萬永한치원(韓致元남상교(南尙敎이만용(李晩用) 등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 문인과도 친하게 지냈다. 특히, 조인영·조만영은 풍양 조 씨 세도정치의 중추인물이다. 이들은 조수삼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관직에 나간 이력이 없는 조수삼의 삶은 여행으로 특징지어진다. 1789(정조 13) 이상원(李相源)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간 이래로 여섯 차례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때에 당대 중국의 일류문사인 오숭량(吳崇梁)·유희해(劉喜海)·강련(江漣)·주문한(朱文翰)등과 사귀었다. 그리고 전국에 발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국내 각지를 빠짐없이 여행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내용 요약

 

안경알 가는 절름발이

절름발이는 집이 동성東城 밖에 있었는데, 날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안경알 가는 것이 직업이었다.

 

안경알 갈고 돌아가는 발걸음 더디기만 해

동쪽 성에 뜨는 둥근달을 취해 바라보네.

하늘 보며 숨을 내쉬면 달무리가 하얘지고

구름이 흩어져 고운 달이 나타나네.

 

*<추재기이>에는 장애인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남에게 얹혀사는 존재가 아니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전문적인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경알 가는 절름발이가 특히 그렇다. 다리가 불편해서 많이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온종일 앉아서 일을 배우다 보니 안경알 가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안경은 수정을 갈아서 만들었는데, 한참 갈다가 뿌연 안경에 입김을 불면 가루가 다 흩어지면서 앞이 환하게 보였다. 어둡던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환하게 달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자기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 절름발이 안경사야말로 18세기의 전문직업인이라고 할 만하다.

 

등짐 품팔이 효자

효자의 성은 안씨인데, 어머니가 늙었다. 그는 집이 가난해 등짐을 져서 살지만, 힘이 세고 재주도 있어서 날마다 100여 전씩 벌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서 바쳤다. 그래서 부자보다도 더 나았다. 밤에는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며 얼굴빛을 편안케 하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그 뜻을 잘 받들어서 보는 이마다 감탄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걱정했다.

 

상여꾼 강 씨

영종대왕 외재궁을 원릉에 마련하고, 행차가 망우리 고개 아래 도착했다. 진흙 길이 밤비 때문에 진창에 묻혔으나 자세히 알지 못했다. 큰 상여 서북 귀퉁이의 상여꾼 40~50명이 넘어져 허리까지 묻히는 위험에 처했다. 무리 밖에 있던 군사 중에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키가 8척이 넘었다. 몸을 떨치고 뛰어들어 양손으로 상여를 높이 받쳐 들고 우뚝 서 있었다. 잠시 후 큰 상여가 위험에서 벗어나 다시 안정을 찾았다. 이미 나왔으나 강씨는 손을 들고 우뚝 선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이 막혀 죽었으나 넘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 상여꾼 강 씨 같은 사람은 충성스러운 열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조가 즉위한 해(1776614)에 장마가 한 달 넘게 지속될 때 상여 옆에 따라가기만 한 사대부들에게도 상을 베풀었지만, 목숨을 바쳐 동료 상여꾼 40~50명을 구한 강 씨의 이름은 아무 데도 없다고 한다.

 

원수 갚은 며느리

이 부인은 희천 지방 농사꾼이다. 시집온 지 5년 만에 남편이 죽고, 두 살 난 유복자가 하나 있었다. 그러다가 시아버지가 이웃 사람에게 찔려 죽었는데, 부인은 관가에 고발하지 않고 시체를 거둬 장사 지냈다. 그 뒤 2년이 지나도록 시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입 밖에 한 번도 내지 않았다. 시아버지를 죽인 자는 과부와 고아가 자기를 두려워해 원수를 갚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인은 밤마다 서릿발이 서도록 몰래 칼을 갈았으며, 칼 쓰는 법을 쉬지 않고 익혔다.

시아버지의 대상(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날에) 마침(장날 이어서) 고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부인은 칼을 몰래 꺼내 몸을 날리며 원수를 시장 바닥에서 찔렀다. 그러고는 그의 배를 찢어서 간을 꺼내 들고 돌아와 시아버지에게 제사 지냈다. 제사를 마친 뒤에 마을 사람을 불러, 관가에 가서 이 사실을 아뢰라고 했다. 관가에서 부인은 효부요, 의부요, 열 부다.”하면서 살려주었다.

 

돈을 양보하는 홍 씨와 이 씨

서울 오천의 이 씨는 대대로 부자였는데, 증손*현손에 이르러 가산을 탕진하고 홍 씨에게 집을 팔았다. 대청의 기둥 하나가 이울러 져 무너지게 되자 홍 씨가 수리했는데, 일하던 중에 은돈 3000냥이 나왔다. 이 씨의 조상이 간직하던 돈이었다. 홍 씨가 이 씨를 불러서 그 돈을 주려고 하자, 이 씨가 사양하며 이 집은 벌써 당신에게 팔았소. 그러니 이 돈도 당신 것이오.”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해 마지 않았다. 이 소문이 관가에 들리자, 관가는 조정에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이 그 돈을 두 사람이 반씩 갖게 한 뒤, 벼슬도 내렸다.

 

김오흥

김오흥은 서강에서 배를 부리는 사람이다. 힘과 용기가 남보다 뛰어나, 읍청루 처마에 올라가 기왓골에 발을 걸고서 거꾸로 가기도 했다. 제비나 참새보다도 재빨랐다. 길에서 말썽이 일어난 것을 보면 언제나 약자를 편들고 기우는 쪽을 부축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돌아보지 않았다. 호흥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옳지 못한 일을 감히 행하지 못했다.

 

팽쟁라

팽 씨는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재산이 10만 냥이나 되었건만 욕심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장사를 해 큰 이익을 얻어 보려고, 산갓을 도거리(되사거나 되팔지 않기로 약속한 거래다.) 하기로 했다. 먼저 30003000 꿰미를 들여 산갓 밭에서 거둬들인 것을 몽땅 샀다. 장안에 산갓의 씨가 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을이 되자 산갓 사라고 외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2000관을 더 사들였더니, 그제야 산갓이 달려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민간에서 세 개에 1전 하는 쓴 산갓을 누가 사랴.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산갓이 썩고 벌레가 생겨, 어쩔 수 없이 물에 내버렸다. 팽 씨는 손해를 벌충하려고 날뛰었지만, 다시 손댄 일에 낭패를 보았다. 가산을 들어먹고 빈주먹으로 나서게 되자, 병이 들어 미치고 말았다. 팽 씨네 집 사람들이 쟁라로 날을 보냈기 때문에, 시정 사람들이 '팽쟁라'라고 불렀다.

*매점매석으로 이익을 보려다 상품 선정을(꼭 필요한 물품이 아님) 잘 못 하여 낭패 봄.

*산갓 : 십자화과에 속하는 식물인데, 줄기에 신맛이 있어서 먹을 수 있었다.

 

강석기가 시줏돈을 빼앗다

강석기는 장안의 불량배다. 날마다 술 마시고 주정하며 사람을 때렸는데, 감히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한 번은 권선문을 파는 중의 바리때에 돈이 약간 쌓인 것을 보고, 그중에게 물었다.

"돈을 시주하면 극락 가우?"

"그렇지요."

"이 돈을 빼앗으면 지옥 가겠구려?"

"그렇다오."

석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스님이 받은 돈이 이처럼 많은 것을 보면, 극락 가는 길은 반드시 어깨가 걸리고 발이 밟혀서 어려울 거야. 누가 그런 고생을 한담? 나는 지옥 길을 활개 치며 걸어가겠소. 그러려면 이제 스님 돈을 집어다가 술이라도 마시고 취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고는(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쓸어 가 버렸다.

 

거꾸로 다니는 여인

손가락이 모두 붙어 물건을 쥘 수 없는 여자가 있었는데, 발가락은 가늘고 길어 바느질이나 절구질과 다듬이질을 할 때 편리했다. 걸어가야 할 때는 손바닥을 짚신에 넣어 거꾸로 서서 비틀비틀 걸었다. 밤이면 심지를 돋우고 삯바느질을 해 살림을 꾸렸다.

 

만덕

만덕은 제주 기생이다. 재산이 많았는데, 한쪽 눈에 동자가 두 개였다. 정조 임자년(1792)에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자, 만덕이 곡식 수천 석과 돈 수천 냥을 내어 그 지방 백성을 먹여 살렸다. 크게 가상히 여긴 정조가 사람을 시켜 그의 소원을 묻자, 만덕이 아뢰었다.

"만덕은 여자인 데다 천인이라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소원이라면 오직 임금님을 뵙는 것과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

 

만덕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는 의탁할 곳이 없어서 기생 노릇을 하며 살림을 했다. 조금 자라나자 관가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생 명부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생 노릇을 했지만, 여느 기생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스물 남짓 되자, 울면서 자기의 실정을 관청에 하소연했다. 관청에서도 불쌍히 여겨, 기생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뽑아서 양민으로 돌려주었다. 살림을 차려 탐라의 사내들을 머슴으로 부렸지만, 남편을 맞아들이진 않았다.

그는 물가가 오르고 내리는 것을 보다 때맞춰 내놓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하여 재산 늘리는 재주가 뛰어났고 그런 지 몇십 년이 되자 제법 부자라고 이름이 났다.

탐라에 큰 흉년이 들어 만덕이 천금을 내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를 내 굶주린 백석 1100명을 구제했고, 대게 탐라의 여인들이 바다를 건너서 육지에 오르지 못하게 한 것이 국법이었으나, 만덕의 소원을 임금께서 들어주라고 하셨다.

또한, 만덕이 임금을 뵙고 싶어 했으므로,, 내의원 의녀 신분을 갖게 했다..

 

김 씨네 아들

김 씨네 아들은 정신병을 앓아,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잠시라도 숨기고 있지를 못했다. 만약 꾹 참고 15분만 지나면 손을 들어 올리고 발버둥을 치며 크게 노해서 빠른 소리로 이러이러하다.”라고 외친다. 어떤 여종을 범하고 술 한 잔을 훔쳐도 스스로 숨기 지를 못하고 범했다, 훔쳤다.”라고 말해 사방 이웃이 모두 들었다.

 

물고기가 된 할미

할미는 본래 한양 사람이다. 몇 년 동안 병들어 누웠다가 조금 나아지자 물로 목욕하고 싶어졌다. 문을 닫고 욕조에 들어가 한동안 헤엄쳤는데,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물고기가 되어 있었다.

 

유생

유생은 남양의 선비다. 젊은 시절에 산에서 놀기를 좋아하고, 신선 이야기 하기를 즐겼다. 한 번은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을 무릅쓰고 금선대에 올라가 잤는데, 잠시 뒤에 두 노인과 한 소년이 들어왔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세 사람이 날씨가 매우 차니 술 한잔 마시는 게 어떻겠느냐?” 하더니 소매 속에서 술 한 병과 파초 잎 한 장을 꺼냈다. 잎에 싸 있는 것은 어린애 손 몇 개였고, 병 속의 술은 피같이 붉었다. 유생은 너무 놀라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세 사람이 저마다 한 잔씩 마시고는, 손을 하나씩 들고 안주로 삼았다. 그러더니 유생에게 술과 함께 손도 하나 권했다. 유생은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본래 술이나 고기를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세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먹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 먹겠소.”

드디어 다 마시고 돌아갔는데, 그들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유생이 곧 정신을 차리자, 잎 위에 남은 방울에서 꽃향기가 풍겼다. 혀를 대 보니 달고 향기로우며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제야 신선들을 못 알아보고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그가 죽던 날 문득 이 일을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복이 없다고 한탄했다.

 

송 생원

송 생원은 가난해서 아내도 집도 없었지만, 시 짓는 솜씨만은 뛰어났다. 그는 미친 척하고 돌아다녔는데, 누가 운을 부르면 곧바로 시를 읊고는 돈 한 푼을 달라고 했다. 이 돈을 손에 쥐여 주면 받았지만, 땅바닥에 던지면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가 지은 글 중에는) 같은 고향의 역졸을 보내며 지은 (아래의) 시처럼 아름다운 구절도 많았다.

천 리 타향에서 만났다가 만 리 밖으로 헤어지는데

강 언덕 성에는 꽃이 지고 부슬비만 내리네.

그러나 일찍이 전편을 마무리한 적은 없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들었다.

그는 은진 송 씨인데,, 일가친척들이 불쌍하게 여겨 집을 마련해 살게 해 주고, 다시는 떠돌지 못하게 했다.”

 

박홍

복홍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누가 그의 성을 물으면 모른다고 했고, 이름을 물으면 “복홍.”이라고 말했다. 나이는 쉰 살 남짓 되었지만 총각이었다. 날마다 성안에서 한 집씩 돌아가며 빌어먹었는데 그 차례를 잊지 않았다. 밤에는 버려진 창고에서 거적 하나를 깔고 누웠는데, 밤새 쉬지 않고 맹자를 외웠다.

 

수박 파는 늙은이

대구성 밖에서 수박을 파는 늙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해마다 맛있는 수박씨를 심었다. 수박이 익으면 따다 길가에 자리 잡고 앉아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팔았다. 수박을 팔면서도 값을 말하지 않아, 주면 받고 안 주면 안 받았다.

 

돌 깨는 사람

돌 깨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물에 갈린 오석을 내놓았다. 길이가 대여섯 치는 되고, 굵기는 팔뚝만 했다. 그는 구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왼손 집게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에 돌을 올려놓고, 가운뎃손가락으로 덮고 오른손 주먹으로 그 위를 탁 쳤다. 그러면 돌 한가운데가 부러지는데, 백번 쳐도 실수 한 번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도끼로 해 보았지만 돌은 부러지지 않았다.

그는 돌아갈 때 부러진 돌을 햇빛에 비춰 보기도 하며 거두어서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땅바닥에 그냥 버리고 갔다. 그를 안다는 사람의 말로는 그가 돌을 달려서 먹는 방법을 안다고 한다.

 

밭을 개간한 중

덕천 (오늘날 평안남도의 덕천시) 향교 가까이에 넓은 골짜기가 있었다. 땅이 비옥한데도 좋지 못한 나무와 돌덩이만 널려있어 한 치 쓸모도 없는 곳처럼 보였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나타나 골짜기 땅에 밭을 일구어 3년 뒤에는 법에 따라 곡식을 바치겠으니, 개간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아뢰어 향교의 승낙을 받았다. 그 스님은 이튿날 아침에 떡 몇 말을 싸 짊어지고, 손에 도끼 한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떡을 다 먹고 물을 마신 다음 골짜기로 들어갔다. 손으로 나무를 뽑고는 도끼로 찍고 발로 차서 밑으로 굴렸다. 한낮이 되기도 전에 나무가 우북하고 바위가 울퉁불퉁하던 땅이 어느새 평평해졌다. 뽑아낸 나무는 불에 태우고 내려왔다.

그 이튿날은 한 손으로 따비(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를 밀어 이쪽 언덕에서 저쪽 봉우리까지 갈기 시작했다. 가로세로*위아래로 따비질을 해서, 곧 수천 묘의 밭이 되었다. 스님은 그 땅에 조를 여러 섬 뿌린 다음, 옆에 움집을 세워 거처를 마련했다. 가을에 조를 1500~16001500~1600 섬이나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다음 해에도 그만큼 추수했고, 그다음 해에도 그만큼 추수해 조가 3000여 섬이나 쌓였다. 스님이 다시 관가로 가서 아뢰었다.

불제자가 농사만 짓고 있겠습니까? 불도를 닦아야지요. 밭은 향고에 바치고, 소승은 이제 돌아가려 합니다.”

그 다음날 스님은 그 마을과 인근 고을의 백성 3000여 호를 불러 모으고 호마다 조 한 섬씩을 나눠 주었다. 그러고 나서 바람같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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