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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

EnerTravel 2023. 5. 29.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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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작가 소개

1-1. 니체의 생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출생하여 1900년에 사망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목사집안의 첫아들로 태어난다. 1851년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 강의를 했던 칸디다텐 베버라는 사설 교육기관에 들어간다. 1858년, 추어 포르테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철저한 인문계 중등교육을 받는다. 이때부터 소년 니체의 고전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 문학적 능력, 음악에 대한 자질들이 표출되기 시작한다. 1864년, 본 대학에서 저명한 문헌학자 리츨의 문헌학 강의에 전념한다. 1865년 겨울학기에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고 그곳에서 니체는 리츨의 지도를 받은 문헌학 공부와 쇼펜하우어의 발견에 힘입어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늦가을에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니체를 철학적 사유로 입문하게 한다.

 

1869년 4월 스물 네 살의 니체는 바젤 대학에 고전어와 고전문헌학의 촉탁교수로 위촉되어 이후 니체는 본격적으로 철학적인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언어의 근원에 대하여>,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수사학> 등이 대표적인 글들이다. 1872년 니체의 첫 철학적 저술인 <비극의 탄생>이 출판된다. 이후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니체는 바그너라는 인물에 집중되었던 낭만적, 국가적인 문화이념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 1881년 7월에는 니체의 구술내용을 페터 가스트가 옮겨 적은 <아침놀>이 발간되고 1882년 초에 니체는 <아침놀>의 뒤를 이을 것들을 쓰기 시작하여 8월에 <즐거운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처음 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배경으로 하며, 이 작품에는 니체 후기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 1883년 여름의 ‘완전히 청명한 날들의 연속’에 힘입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가 쓰인 이후 아주 빠른 속도로 3부까지 집필된다. 1884년 1월에 4부를 완성하면서 니체는 자신이 최고의 책을 썼다고 믿었다. 1885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그의 주저가 될 책에 대한 저술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하고 그 사이 1886년 <선악의 저편>이 출판된다.

 

1887년 11월, 도덕에 대한 논쟁서인 <도덕의 계보>가 출판되고, 1887년 초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그의 건강상태는 우울증이 겹치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이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합적이고도 체계적인 해석을 내놓고 싶어하는 그의 의지는 점점 강해졌다. 이런 사유가적 의지는 1885년부터 구상되기 시작한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을 갖게 될 책을 준비하게 한다. 하지만 사유의 아나키즘이 그를 엄습하면서, 이 저술계획은 1888년 8월에 포기된다. 그 대신에 ‘가치의 전도’라는 새로운 제목하에 책을 다시 구상하고 1888년 9월 3일에 이 책을 위한 서문까지 작성하지만, 이 책도 포기하고 만다. 1889년 1월 3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니체는 쓰러지고 만다. 이후 그는 정신이상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며 바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그 사이 <우상의 황혼>,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가 출판된다. 그의 상태는 1891년부터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해서 1900년 8월 25일 정오 경에 사망한다.

 

1-2. 니체의 철학

니체는 생철학의 대표자로 실존주의의 선구자, 또 파시즘의 사상적 선구자로 말해지기도 한다. 그는 종래의 합리적 철학, 기독교 윤리 등 모든 종래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철저한 니힐리즘(nihilism)을 주장하여 생(生)의 영겁회귀(永劫回歸) 속에서 모든 생의 무가치를 주장하고, 선악의 피안에 서서 ‘약자의 도덕’에 대하여 ‘강자의 도덕’을 가지고 ‘초인(超人)’에 의해서 현실의 생을 긍정하고 살아야 함을 주장했다. 이 사상 속에는 생물진화론의 생존투쟁의 사고가 존재하고 있음과 동시에,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진행해 가는 19세기말의 사회상태를 반영하여, 노동자 계급의 격렬해져 가는 공세 앞에서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종래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대신하여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제창하였으며, 사회주의를 ‘노예도덕’으로 간주하고 지배 계급의 독재지배를 ‘군주도덕’으로 높이 내걸어 ‘권력에의 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었다.

 

책의 배경(읽기전에 공부하면 좋을 주요 개념)

 

2-1. 니힐리즘(nihilism)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 그 어원으로,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이다. 니힐리즘의 의식은 19세기 후반 F.W. 니체, M. 슈티르너, F.M. 도스토옙스키 등의 사상에 반영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급속히 퍼진 사상이다. 니힐리즘의 한 극을 이루는 것은 절망적 니힐리즘으로서 일체의 주의∙주장을 부정하고 인생에는 어떠한 의의도 없다고 규정, 찰나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과 모든 것에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쪽이 있다. 다른 또 하나의 극은 무를 무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삶과 자유에 길을 모색하는 그룹으로서, 니체(실존주의)는 후자에 속한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입장에서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그리스도교 도덕이나 불교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삶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가치의 전도를 지향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제창하였다.

 

2-2. 영원회귀

 영겁회귀(永劫回歸)라고도 하며 니체의 공상적인 관념이다. 그에 의하면, 생(生)은 원의 형상을 띠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고, 피안의 생활에 이르는 것도, 환생(還生)하여 다음 세상에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것도 모두 부정하고, 항상 동일한 것이 되풀이된다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현실의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생활하는 데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원회귀의 관념은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 등에서도 보이지만, 니체는 이것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발전의 사상에 대립시켜서 부활시켰다.

 

2-3. 염세주의

인간의 삶은 고통뿐이며 따라서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사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염세주의가 근대 이후 다시 주목 받은 것은 쇼펜하우어의 사유로부터 비롯된다. 현재의 세계를 가능한 것 중 가장 좋은 세계라고 본 라이프니츠와는 반대로, 그는 인간이 처한 세계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가장 나쁜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사유는 세계를 의지, 혹은 의지의 작용으로 파악하는 그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2-4. 초인

니체의 용어로, 인류가 자기를 뛰어넘어 그 위로 나왔을 때의 그 이상상으로서 그가 말한 용어이다.

 

2-5. 위버멘쉬

 위버멘쉬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신체적 존재이며,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다. 책에서 위버멘쉬의 개념은 힘에 의지와 허무주의 그리고 영원회귀 사유와의 정합적 구도를 완성시키는 매개개념으로 사용됐다. 위버멘쉬는 영원회귀 사유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에 의해 환하게 웃는 자로 변화된 사람이다. 자신을 위버멘쉬로서 인식하는 새로운 자의식에 의해 인간은, 영원회귀 사유를 자신의 몰락가능성을 배제하면서 견딜 수 있으며, 이때 영원회귀 사유는 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2-6. 디오니소스적 긍정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개념은 디오니소스-자그레우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의 운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어린 시절 티탄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하며, 아폴론에 의해 다시 회복되어 부활한 신이다. 따라서 그에게 죽음은 삶의 필연적 계기다. 자신을 파괴하는 고통은 새로운 자신의 창조를 위한 필연적 계기다. 그래서 죽음과 파괴는 디오니소스에게 결코 부정의 대상일 수 없다.

그는 죽음과 파괴시의 고통의 유의미함과 필연성을 인정하고, 긍정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자신의 최고 유형의 희생을 통해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곧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라는 니체의 생성에 대한 긍정 철학의 수식어이자, 설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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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3-1. 짜라투스트라의 서설

 

(1) 짜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정신적 수련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 10년 등을 보냈다. 10년 동안 한결같이 정신적 수련이 집중했으나 어느 날 그의 마음은 변했다. 그는 태양에게 자신의 긍지와 지혜가 없었더라면 10년 동안 수련하지 못했을 것이며, 현명한 자에게 무지를, 어리석은 자에게 바른 지혜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 고독 속에서 빠져나와 세상으로 나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바란다고 말하며 몰락[1]을 시작했다.

 

(2) 짜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오며 숲 속에 들어섰을 때 한 노인[2]을 만났다. 짜라투스트라가 성숙한 사상, 새로운 깨달음[3]에 눈을 뜬 것을 눈치 챈 성자는 인간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고 그들의 고뇌를 함께 나누어지며 진정 무엇인가를 주고 싶다면 그들이 원하게끔 하라고 조언한다. 성자와 짜라투스트라는 웃으며 헤어졌고 짜라투스트라는 혼자가 되어 중얼거린다. “저럴 수가 있나!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으면서 아직도 ‘신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니!”

 

(3) 짜라투스트라는 거리로 나와 광대의 줄타기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군중을 향해 초인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군중들에게 인간은 초극(超克)이 되어야 하며 인간들 중 가장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물질적 존재, 활기 없는 정신을 가진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초인은 대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한 군중들에게 신은 죽었으며 신과 함께 대지를 모독하는 자들도 죽었고, 이제는 대지를 모독하는 것과 신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모독이라고 말했다. 이에 군중들은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무시하며 비웃었고, 짜라투스트라의 말은 광대의 줄타기보다 못 한 대우를 받았다.

 

(4) 짜라투스트라는 군중들의 반응에 의아하며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그의 삶이 하나의 다리이며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고 짜라투스트라가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 변하고 몰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초인과 대지를 인식하고, 몰락하고자 하는 자들과 몰락을 향한 의지인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자들, 자유로운 정신과 마음을 지닌 자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5)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비웃는 군중들에게 ‘종말의 인간’[4]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말의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몰락을 원할 수도 자신을 경멸할 수도 없는 인간으로, 인간 가운데 존재하는 가장 경멸스럽고 극한적인 인간이다. 종말의 인간은 온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살기 힘든 곳을 떠나고 자기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몸을 비비댄다. 질병과 시기를 죄악으로 간주하고 때때로 약간의 독으로 행복을 꿈꾸기도 하며 행복한 죽음을 위해 많은 독을 마시기도 한다. 종말의 인간에게 일은 오락이기 때문에 그 오락이 자신을 피로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일을 하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원하고 모두가 똑같으며 그밖에 달리 생각하는 사람은 제 발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짜라투스트라가 종말의 인간에 대해 말하자 군중들은 그에게 고함치며 크게 혀를 찼다.

 

(6) 그때 줄타기 광대가 줄을 타기 시작했고, 그가 밧줄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줄을 이은 탑의 작은 문에서 어릿광대[5]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나이가 뛰쳐나와 재빨리 줄타기 광대[6]의 뒤를 따랐다. 어릿광대는 줄타기 광대에게 “너는 저 탑 속에 갇혀 있는 게 오히려 더 어울린다. 탑 속에 갇혀 있어야 해. 너는 너보다 뛰어난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줄타기 광대를 뛰어넘었고, 이에 줄타기 광대는 당황하여 중심을 잃고 땅으로 떨어졌다. 광대는 짜라투스트라의 옆에 떨어졌고 얼마 후 정신을 되찾아 짜라투스트라에게 악마를 막아달라며 부탁했다. 짜라투스트라는 광대에게 악마와 지옥은 존재하지 않으며 육체보다도 영혼이 먼저 죽을 것이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말한다. 그리고 자신을 짐승과 다른 바가 없다 말하는 광대에게 짜라투스트라는 모험을 천직으로 삼아 온 것은 조금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며 자신의 손으로 광대를 묻어 주겠다고 한다.

 

(7) 짜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 초인에 대해 알려주고 싶으나 인간들과 그는 멀리 떨어져 있어 그의 말은 인간들에게 전해지지 못함을 깨닫는다. [7]

 

(8) 짜라투스트라는 줄타기꾼의 시체를 메고 출발하나 곧 곡예사를 만나 “이 마을에서 떠나라”라고 경고를 받는다. 그를 무시한 채 마을 어귀까지 왔을 때 산역꾼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짜라투스트라에게 심한 조롱을 퍼부었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곧 배고픔을 느껴 어느 외딴집에 머물렀다. 외딴집의 주인인 한 노인은 짜라투스트라에게 빵과 포도주를 내놓으며 어서 당신의 동행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한다. 그 후 짜라투스트라는 길과 별빛을 따라 두 시간가량 걸었다. 그는 깊은 숲 속에 와 있음을 깨닫고 이끼로 뒤덮인 땅 위에 누워 곧 잠이 들었다.

 

(9) 잠에서 깬 짜라투스트라는 자진해서 그를 따르며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살아있는 동행자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숨어 사는 자들을 찾아 다시는 군중과 이야기하지 않고 죽은 자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1]

 

(10) 짜라투스트라가 다짐했을 때는 정오가 되어있었고 머리 위에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 독수리에는 뱀 한 마리가 먹이로서가 아니라 친구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뱀은 독수리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그는 독수리와 뱀을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2]

 

3-2. 짜라투스트라의 설교

[1부]

1부의 핵심은 신의 죽음과 위버멘쉬의 사유이다. 1부는  짜라투스트라가 얼룩소라는 마을에서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 전개된다. 총 22개의 장 중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배후 세계론자에 대하여’,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천 개를 위한 하나의 목표’. ‘창조자의 길에 대하여’, ‘나누어주는 덕에 대하여’는 핵심적인 장들이다.

 

-1.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 위버멘쉬 사유에 대한 정신적 단계의 변화

참된 자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정신적 단계는 세 가지 변화를 보인다. 자기를 버리고 타인이나 전통적 가치에 철저히 복종하는 ‘낙타의 정신’, 낙타의 정신에 철저히 복종하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는 ‘사자의 정신’, 정신과 육체가 참된 자기로 통합되는 최후의 단계 ‘어린아이의 정신’이 세 가지 변화이다.

“이와 같이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이들 가장 무거운 것 모두를 짊어지고자 한다. 그리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막으로 들어가는 낙타처럼,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가는 것이다. … 나의 형제들이여, 정신의 사자가 왜 필요한가? 체념과 경외로 가득 찬 채 무거운 짐을 진 낙타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그것은 사자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창조,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에 대해서까지도 신성한 부정을 하기 위해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 어린아이는 천진무구 그 자체이며 망각이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며, 쾌락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시원의 운동이고,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쾌락을 위해서는 신선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로부터 격리된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中

 

-2. 배후 세계론자에 대하여 :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세계관 제시

 철학적 신앙과 종교적 신앙의 공통점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며 이편의 세계와 저편의 세계, 내제세계와 초월세계, 생성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라는 이분법은 진정한 실제 세계인 이 세계를 부정하는 세계해석인 것이다. 또한 영혼과 육체를 서로 다른 것이라 나누는 것도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한 예이다.

“선과 악, 환희와 비애, 나와 너, 이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자의 눈앞에 피어오르는 다채로운 연기처럼 보였다. 조물주는 자기 자신에게서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배후 세계론자에 대하여 中

 

 

 

-3.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 이원적 인간관의 극복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의지와 나눌 수 없는 하나이다. 육체는 지성을 포괄하는 커다란 이성이며 근원적 의지이자 세계의 근원적 진상,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 인간은 확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정적 존재이며 과정의 모습은 자기 극복과정으로 나타난다.

“어린아이들은 “나는 육체이며 영혼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왜 어린아이들처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각성한 자, 통찰한 자들은 말한다. “나는 오직 육체일 뿐, 육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다만 육체의 내부에 속한 그 무엇을 나타내는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며 장난감이다. 그 배후에는 역시 ‘자기(des Selbst)’가 있다. ‘자기’도 역시 감각의 눈으로 탐구하고 정신이 귀를 기울인다. ‘본래의 자기’는 항상 귀를 기울이고 찾는다. 그것은 비교하고, 억압하고, 점령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지배하며, 또한 자아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中

 

-4. 천 개를 위한 하나의 목표 : 새로운 도덕

도덕적 가치 평가는 특정 민족의 힘에 의지의 소산이다. 따라서 특정 민족의 도덕은 일반화되거나 보편화될 수 없다. 인류가 지향해야 할 도덕 유형은 위버멘쉬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한 도덕이며 인간의 의미는 가치 평가자, 의미 창조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는 선으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거리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악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는 찬란한 영예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웃 민족끼리는 일찍이 상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각 민족의 영혼은 언제나 이웃 민족의 망상과 악의에 의심을 품어왔다. …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 사물에 나름대로 가치를 부여했다. 또한 인간은 사물의 의미를 창조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인간’, 즉 ‘평가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 지금까지 천 개의 목표가 존재해 왔다. 그것은 천의 민족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 개의 목에 씌울 멍에가 아직도 없다. 바로 그 목표 하나가 빠져 있는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천 개를 위한 하나의 목표 中

 

-5. 창조자의 길에 대하여 : 창조자의 본질적 계기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경멸을 느껴야 하며 자기 스스로를 창조의 주체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과제이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제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과 창조를 가지고서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그대가 멸망한 뒤 정의가 절뚝거리며 천천히 그대의 뒤를 따를 것이다. 나의 형제여, 나의 눈물을 가지고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자신을 초극하여 창조하기를 원하며, 그리하여 멸망해 가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의 길에 대하여 中

 

-6. 나누어 주는 덕에 대하여 : 새로운 덕

나누어 주는 덕은 짜라투스트라가 인류에게 가치를 선사하는 덕이며, 자기 지배와 자기 초극의 덕이다. 이 덕은 인간과 삶에 대지에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형제들이여, 그대들 덕의 힘으로 언제까지나 대지에 진실하라! 그대들이 나누어 주는 사랑과 지식을 대지의 의미에 바치게 하라! 나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누어 주는 덕에 대하여 中

2부는 힘에의 의지 사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형식적으로는 짜라투스트라의 설교형식보다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만남과 이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총 22개의 장 중 ‘지복의 섬’, ‘춤 곡’, ‘자기 초극에 대하여’가 핵심이 되는 장이다.

 

-1. 지복의 섬 : 행복의 조건은 신의 허구성의 증명

창조자의 본성은 힘에의 의지, 즉 창조의 의지이다. 하나의 신을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하며, 세계라고 이름 지은 것, 그것은 창조자가 창조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통찰에 입각해 4가지의 근거(인간적 해석의 허구성, 인간의 창조의지의 유의미성 확보, 신 관념의 생성, 위베멘쉬 존재)로 신에 대해 반박한다.

“그러나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내 마음을 완전히 털어놓겠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지복의 섬 中

 

-2. 춤 곡 : 지혜와 삶과의 분열과 짜라투스트라의 선택

지혜에 대한 사랑은 삶에 거리를 두게 하며 삶에 대한 사랑은 이성의 도구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3. 자기 초극에 대하여 : 힘에 대한 의지(권력에 대한 의지)

힘에 대한 의지가 삶의 근본법칙이기에, 삶은 항상 상승과 강화를 지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의지들은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삶은 언제나 자신을 ‘한없이 반복해서 초극해야 할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생산에 대한 의지나 목적을 향한 충동, 보다 높은 것∙보다 먼 것∙보다 다양한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힘에 대한 의지의 다른 표현이며 힘에 대한 의지는 가치 평가 행위의 주체이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의지나 진리의지도 힘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

“살아있는 자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 대한 의지를 더불어 발견했다. 심지어 복종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조차도 나는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 살아 있는 자를 설복시켜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은, 약자에 대하여 더한층 주인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의지이다. 주인이 됨으로써 얻는 이 기쁨을 살아 있는 자로서는 포기하기 힘든 일이다. … “보라,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한없이 반복해서 초극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대들은 분명 그것을 생산에 대한 의지나 목적을 향한 충동, 보다 높은 것∙보다 먼 것∙보다 다양한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거들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비밀인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초극에 대하여 中

 

[3부]

3부는 영원회귀 사유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영원회귀 사유에 의해 위버멘쉬 희망이 실현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는 영원회귀 사유에 의해 위버멘쉬 그리고 힘에 대한 의지 및 허무주의 극복이라는 니체의 주요 사유들이 정합적인 전체를 이루도록 한다. 총 1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환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회복되어가는 자에 대하여’에서 알레고리 형식으로 영원회귀 사유의 핵심 내용이 전개된다. 또한 영원회귀 사유 외에도 도덕비판과 짜라투스트라의 자기고백적인 해설 부분이 3부의 주요 내용을 형성한다.

 

-1. 환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 영원회귀 사유의 두 가지 기능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 반은 난쟁이이고 반은 두더지인 악령이 허무주의를 주입시켰고 용기를 통해 악령에게서 벗어났다. 짜라투스트라는 악령에게 순간과 미래는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하며 영원회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어린아이였던 유년시절에 젊은 목자(짜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목을 감싼 검은 뱀(허무주의)의 머리를 뜯어 벗어났던 환상을 떠올렸다. 짜라투스트라는 두 환상을 통해 허무주의 극복가능성과 순간의 영원성이라는 영원회귀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해 이야기했다.

 

-2. 회복되어 가는 자에 대하여 : 영원회귀 사유의 두 가지 기능

힘에의 의지는 생기존재론을 완성하고, 영원회귀 사유는 인간의 자의식의 변화와 실존양식에 대한 결단을 요구한다. 위버멘쉬적 존재로서의 자각과 그것의 실천은 영원회귀 사유가 초래할 수 있는 허무적 경험을 극복한다.

“그대는 생성 순환의 위대한 해(年)가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이 해는 순환을 마치고 다시 순환하기 위해 마치 모래시계처럼 언제나 다시 새로운 것이 되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 이제 나는 죽어 소멸해 버린다. 그리하여 나는 순식간에 무가 되고 말 것이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휘감고 있는 모든 매듭은 회귀할 것이다. 그 매듭은 나를 재창조할 것이다. 나 자신이 이들 회귀의 부분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이 태양과 함께, 이 대지와 함께, 이 독수리와 함께, 이 뱀과 함께 또다시 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삶이나 좀더 훌륭한 삶, 혹은 이와 유사한 삶으로서 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장 큰 것에서나 가장 작은 것에서나, 이 동일한 삶으로 영원히 회귀할 것이다.

다시 한번 일체 사물의 영원한 회귀를 가르치키 위해.

다시 한번 대지와 인간의 정오에 관해 이야기하고 인간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회복되어 가는 자에 대하여 中

-3. 일곱 개의 봉인 :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노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

1) 위버멘쉬

어두운 가슴속에서 천둥과 구원의 광선을 쏠 준비를 하며, “그렇다”라고 말하고, “그럼요”라고 대답하며 웃는 천둥, 예언자적인 천둥을 잉태하고 있다.

 

2) 초월적 세계가 아닌, 이 세계에 대한 긍정

만일 일찍이 내가 옛 신들이 묻혀 있는 곳[1]에 마음 편히 앉아 세계를 축복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그것을 기뻐했더라면 ㅡ 나는 잡초와 붉은 양귀비꽃처럼 즐겨 교회의 폐허 위에 올라앉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교회와 신들의 무덤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3) 창조자로서의 인간

만일 일찍이 창조의 숨결이, 그리고 우연에게 조차도 강요하여 별의 원무를 추게 하는 저 하늘의 필연으로부터 단 한 번의 숨결이라도 내게 찾아온 적이 있었다면 ㅡ … 이것은 대지는 신들의 도박장이며, 그 대지는 창조적인 새로운 언어와 신들의 주사위 놀이 때문에 떨고 있기 때문이다.

 

4) 선과 악의 본질적∙가치적 구분의 폐기

만일 나 자신이, 모든 것들이 항아리 속에서 잘 혼합되게 하는 저 구원의 소금 한 줌이라면 ㅡ 이것은 선과 악을 결합시키는 소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조미료가 되고, 또 넘치는 최후의 거품이 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5) 세계의 무한함에 대한 지각

만일 내가 바다와 바다의 본질을 지닌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분노하여 내게 반항할 때 되어 그들을 사랑한다면 ㅡ … 만일 일찍이 내가 기뻐하며, ‘해안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내게 채워졌던 족쇄가 막 풀렸다. 나의 주위에서는 무한한 것이 울부짖고, 저 멀리에서는 공간과 시간이 나를 위해 반짝이고 있다. 자, 가자! 옛 마음이여!’라고 외쳤다면 ㅡ

 

6) 자유정신과 창조를 위한 파괴

만일 나의 덕이 춤추는 자의 덕이었다면, 그리하여 내가 때때로 두 발로 황금빛 에메랄드 빛의 환희 속으로 뛰어든다면 ㅡ 만일 나의 악의가 장미꽃 언덕과 백합꽃 울타리 밑에서 웅크리고 웃는다면 ㅡ 웃음 속에는 온갖 악의가 들어 있지만, 그 악의들은 자신의 행복으로 인해 해방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무거운 것이 가벼워지고, 모든 육체가 춤을 추는 자가 되고, 모든 정신이 새가 되는 그것이 나의 알파요, 오메가라면! 실로 그것이야 말로 나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7) 표현의 제한을 갖고 있는 말이 아니라,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능력

만일 내가 자유롭게 빛이 있는 깊숙한 곳으로 헤엄쳐 갔다면, 그리하여 새의 지혜가 나의 자유로움을 찾아왔다면 ㅡ 결국 새의 지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마음껏 날뛰어라. 밖으로, 뒤로, 그대 경쾌한 자여! 노래하라!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모든 말은 무거운 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모든 말은 가벼운 자들에게는 거짓이 아닌가? 노래하라! 더 이상 말하지 말라!’

 

[4부]

4부는 앞의 세 부와는 다르게 짜라투스트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실패한 자유정신인 자들과의 연이은 만남과 대화로 구성된다. 이 구성은 총 2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4부 전체가 완성된 소설처럼 만든다.

 

-1. 제물로 바치는 꿀

짜라투스트라는 행복이라는 마음 속의 꿀을 미끼로 인간을 낚는 어부이다. 이 장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천년제국에 대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2. 고통의 비명

 위버멘쉬라는 미래의 도래를 의심하는 예언자가 등장하여 짜라투스트라를 위협하나 짜라투스트라는 반박한다.

 

3. 왕들과 나눈 대화

천민의 세계는 전통적인 자명성들과 새로운 현대적 자명성들의 혼합상태이다. 천민의 지배자였던 왕들은 강자가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왕들은 현실에서 그들의 희망지를 찾을 수 없기에 절망하고 허무 상태에 빠져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4. 거머리

 우연히 만난 ‘정신의 양심’을 가진 자는 특수분야를 탐구 대상으로 하는 전문가일 뿐 협소한 인식의 소유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들 지혜를 추구하는 학자들에 대해 머리의 생명력을 빼앗아 가는 “거머리”같은 존재라고 비유한다.

 

5. 마법사

정신의 참회자 역할을 하는 배우에 대한 비유이다. 그의 행위는 거짓이며 연극이고, 천민의 시대에서 위대한 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진정한 정신의 참회자일 수 없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과 역겨움으로 인해 허무주의자가 된다.

 

-6. 일자리를 잃은 사람

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직업마저 상실한 교황에 대한 비유이다. 교황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판관으로서의 신, 동정녀 수태나 지옥 등의 허구, 연민의 신, 자신을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 실망하여 신을 부정한다. 이에 비해 짜라투스트라는 ‘창조주’로서의 신의 본질적 모순으로 신을 부정하고 교회의 계시사상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7. 가장 추악한 인간

가장 추악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구역질을 느끼는 자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때문에 자신을 떠나려 하고, 보다 높은 것에 대한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혐오와 자기부정이 신을 살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런 인간은 자신의 모든 면을 연민으로 바라보고 동정하는 신이라는 목격자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8. 스스로 거지가 된 사람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임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여 자신의 풍요함과 마음을 나누어 주려고 가난한 자들에게 간 산상의 설교자는 자신의 계획을 실패했고 그 구토(고통)를 피해 온순한 기독교도들이 있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9. 그림자

그림자는 실패한 자유정신에 대해 비유한 것으로 그림자들은 자라투스트라를 좇을 뿐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자이며 방랑자인 자유정신이다. 이 그림자는 여러 다른 사상들에 부딪히면 허무주의자가 되는 운명에 있다.

 

10. 정오

정오는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간으로 허상이 없는 시간으로 비유된다. 정오는 세계의 완전성을 경험하는 최상의 시간이며 완전한 세계는 긍정의 대상이고 완전한 세계에 대한 긍정은 인간적 행복의 극치를 나타낸다.

 

11. 인사

실패한 자유정신들에 대한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자라투스트라가 그의 집인 동굴에 돌아 온 늦은 오후 어디선가 커다란 고통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이는 짜라투스트라가 만났던 모든 종류의 허무주의자들의 외침이었다. 허무주의자들은 짜라투스트라가 기대하던 “웃는 사자”(창조적 기쁨을 누리는 의지적 존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동경과 권태, 역겨움,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허무주의자의 모습이었다.

 

12. 만찬

실패한 자유정신들은 옛 자명성을 되찾고 싶어 하고, 짜라투스트라는 빵과 포도주를 원하는 이들에게 전사와 정복자의 양식인 양을 제공한다. 그리고 보다 높은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13. 보다 높은 인간에 대하여

1) 보다 높은 인간은 모든 평등이념을 거부한다.

2) 보다 높은 인간은 신의 죽음 이후에 등장하며, 위버멘쉬를 준비하는 자이다.

3) 보다 높은 인간은 위버멘쉬라는 목표를 위해 인간의 모습을 경멸하는 자이다.

4) 보다 높은 인간은 신을 부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고 있는 자이다.

5) 보다 높은 인간은 위버멘쉬의 최선을 위해 최악을 사용할 줄 아는 자이다.

6) 보다 높은 인간은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할 뿐 인간을 위해 괴로워하지 않는 자이다.

7) 보다 높은 인간은 자유정신을 가진다

8) 천민들은 올바름과 정직함에 대해 무지한 상태이며 현대의 사회는 천민들의 사회이다.

9) 8)의 이야기에 이어 천민들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10) 보다 높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11) 보다 높은 인간은 이웃을 위해 창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12) 보다 높은 인간은 아이를 낳은 자는 자기 영혼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13) 보다 높은 인간은 옛날의 덕에서 벗어나야 한다

14) 보다 높은 인간들의 실패는 그들이 실패자인 것이 아니라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15) 보다 높은 인간들이 실패한 자유정신이더라도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으며 계속해서 도전해야 한다.

16) 보다 높은 인간은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

17) 보다 높은 인간은 자기 극복의 춤을 춰야 한다.

18) 보다 높은 인간은 이 세상에서 웃을 수 있는 존재인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

19) 짜라투스트라는 보다 높은 인간에게 현대의 천민들의 비애를 잊고 춤추는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20) 보다 높은 인간이 실패작일지라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사자의 웃음”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14. 우수의 노래

보다 높은 인간들은 실패한 자유정신이며 이들은 진리를 찾지 못한 채 단지 시인이나 광대의 역할을 한다.

 

15. 과학에 대하여

학자는 학문에 대해 환상이나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운, 확실한 앎을 추구하고 인간의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건축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짜라투스트라는 학문이란 삶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의지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16. 사막의 딸들 사이에서

허무주의자가 사막의 딸들 사이에서 지은 오래된 후식의 노래를 부른다.

 

17. 각성

짜라투스트라는 실패한 자유정신들이 짜라투스트라의 양식을 받아 허무적 권태와 구토를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들이 다시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되고 옛 신 대신에 이제는 당나귀로 비유되는 새로운 우상들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18. 당나귀의 축제

새로운 우상을 출현시킨 자는 신 부정에 실패했던 ‘가장 추악한 인간’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신은 인간에게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들의 우상숭배 자체에 대해 혐오하지만 초월적인 신 자체를 거부하고 지상적인 신을 찾는 것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짜라투스트라의 사상에 좀 더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가장 추악한 인간’은 짜라투스트라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이에 짜라투스트라는 진정한 숭배와 긍정의 대상은 인간과 삶 그리고 세계 자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며, 생성법칙의 지배를 받는 모든 것은 그것의 영원회귀를 바랄 만큼 긍정과 찬미의 대상이라는 것으로 매 순간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20. 징후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마지막 죄가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한 동정임을 깨닫고, 그들에 대한 동정에서 벗어나 “사자의 웃음”을 짓는 완전한 성숙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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