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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이방인』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해석

EnerTravel 2023. 5. 3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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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20세기 지성의 상징 알베르 카뮈의『이방인』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해석 글입니다.

 

출처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267296

 

작가 소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1.7.~1960.1.4.)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알제리 및 이슬람과는 관련이 없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여겼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포도 농장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대전 중에 사망한 뒤,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란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알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하면서도 창작의 세계에 눈을 떠가는데, 이 시기에 장 그르니에를 만나 그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는다. 1934년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도 가입하지만 내적 갈등을 겪다 탈퇴한다. 교수가 되려고 했으나 건강 문제로 교수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고, 진보 일간지에서 기자 생활을 한다. 1942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1947년에는 칠 년여를 매달린 끝에 탈고한 페스트를 출간해 즉각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비평가상을 수상한다. 44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만, 삼 년 후인 1960년 파리로 떠나다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방법서설』내용 요약 

[1부]

 

알제에 거주하는 젊은 사무원 뫼르소는 마랭고의 양로원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서 양로원으로 간다. 바로 어머니를 보려고 했지만 양로원의 원장은 바빴으므로 그를 기다리며 문지기와 줄곧 이야기를 나눈다. 이윽고 원장을 만나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뫼르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이야기가 끝난 후 뫼르소는 어머니가 있는 영안실로 간다. 문지기가 따라 들어와 관을 열고 어머니를 보여주려 하지만 뫼르소는 거절한다. 이유를 묻는 문지기에게 뫼르소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뫼르소는 문지기가 주는 밀크커피를 받아먹고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졸다가 어머니의 양로원 친구들이 들어와 잠에서 깬다. 그들은 모두 문지기를 둘러싸고 뫼르소와 마주 앉는다. 뫼르소는 한순간, 그들이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서 거기에 와 앉아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몇몇이 울고 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영안실에서 뫼르소의 태도는 무심하고 덤덤하다. 밤이 지나갔다. 뫼르소는 원장실에서 몇 가지 서명을 하고 인부들과 원장, 간호사와 함께 시신을 운구하는 길에 오른다. 뜨거운 햇볕을 받아 아스팔트가 녹아서 갈라 터져있는 그 길에서 인부들이 뫼르소에게 어머니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만 뫼르소는 어머니의 나이도 성격도 알지 못해 짧게 대답해 넘긴다. 그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뫼르소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이제는 드러누워 실컷 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꼈을 뿐이다.

 

토요일 잠에서 깨어난 뫼르소는 전차를 타고 해수욕을 하러 가고, 그곳에서 마리 카르도나를 만난다. 이전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타이피스트인데 당시 뫼르소는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함께 해수욕을 즐긴 뒤 그날 저녁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한다. 검은 넥타이를 맨 뫼르소를 보고 마리는 매우 놀라며 상을 당했느냐고 묻지만 뫼르소는 무심하게 어제의 일이라 답한다. 그녀가 흠칫 뒤로 물러섰으나, 뫼르소는 아무런 나무람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 했다가 후회한 일을 기억하며 그만둔 것이다. 그런 말을 해 봤자 무의미한 일이라고 뫼르소는 생각한다. 어차피 사람이란 조금은 잘못이 있기 마련이니까. 마리와. 뫼르소는 함께 밤을 보냈다. 뫼르소가 눈을 떴을 땐 마리가 가버린 뒤였다. 혼자 남은 뫼르소는 테라스에서 밖을 바라보며 무료하게 하루를 보낸 뒤, 일요일이 지나갔으며 어머니의 장례식도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월요일 어머니의 나이를 묻는 사장의 물음에 뫼르소는 틀리게 대답하지 않으려 한 예순쯤 되었다고 말한다. 뫼르소는 식당에 들려 식사를 마치고 집의 층계를 올라가다가, 같은 층의 이웃에 사는 살라마니 영감을 마주친다. 영감은 팔 년 전부터 온몸이 반점과 딱지 투성이인 늙은 개와 사는데, 그 개는 영감의 아내가 죽고난 뒤 외로움에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뫼르소가 살라마노 영감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같은 층의 또 다른 이웃인 레몽이 등장한다. 동네에서는 그가 여자들을 등쳐 먹고 산다고들 한다. 뫼르소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그와 말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므로 자주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날 저녁 레몽의 제안으로 그의 집에서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 레몽은 자신이 방세를 대주고 있는 여자가 자신을 속였다며 경고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낼 계획인데 그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뫼르소는 쓰지 않을 이유도, 레몽의 마음에 들지 않는 편지를 쓸 필요도 없다는 이유로 열심히 편지를 쓴다.

 

한 주가 흘러간다. 토요일에 마리와 해수욕을 한다. 레몽의 방에서 레몽이 여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증인이 되어 달라는 레몽의 부탁을 들어주고, 외출 후 돌아오는 길에 개를 잃어버린 살라마니 영감을 만난다. 뫼르소는 방에 들어와 벽 너머로 살라마노 영감이 우는 소리를 듣고, 왜인지 엄마 생각을 한다.

 

레몽이 자신의 친구의 별장에서 오는 일요일을 보내자며 마리와 뫼르소를 초대한다. 레몽은 하루 종일 옛 정부의 오빠가 낀 아랍인들에게 미행을 당했다. 회사에서 사장이 뫼르소를 불러 파리에 설치할 출장소에 가서 근무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다. 얼마동안의 여행도 가능할 것이며 파리에서 생활이 매우 즐거울 것이라 말하지만 뫼르소는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저녁엔 마리가 찾아와 자신과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지만 뫼르소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대답한다. 자신을 사랑하느냐는 물음에는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일요일에 뫼르소, 마리, 레몽은 별장으로 간다. 마리는 뫼르소더러 초상 치르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놀린다. 별장으로 가는 길에 아랍인들에게 미행을 당한다. 별장에 도착해 레몽의 친구 마송을 만나 해수욕을 즐긴다. 별장에서 여유를 즐기다가 남자들은 다시 바다로 나오는데, 아랍인들을 마주치고 한 차례 싸움을 벌인다. 후에 뫼르소는 다시 아랍인들을 마주치고, 햇빛이 작열하는 바닷가에서 타는 듯한 태양을 느끼며 아랍인을 권총으로 죽인다.

 

[2부]

 

뫼르소는 체포되고 여러 번 심문을 받는다. 뫼르소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 사법부에서 관선 변호사를 지정해 준다.. 어머니의 장례식날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과 살인사건에 대해 변호사는 뫼르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지만 뫼르소는 변호사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뫼르소는 그 뒤로 여러 번 예심 판사를 만나고, 예심은 11개월 동안 이어진다.

 

뫼르소의 감옥 생활. 마리의 면회. 감방에서의 뫼르소의 관심사들이 소개된다.

 

다시 여름이 시작되고, 재판이 시작된다. 심문을 통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머니 시신을 보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 알려진다. 방청석이 격양되고, 뫼르소는 처음으로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리를 통해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부터 해수욕을 했으며 연애를 즐겼다는 사실도 밝혀지며, 마송과 레몽은 뫼르소를 위한 변호를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뫼르소는 마치 이방인처럼 법정에 앉아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결코 그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다. 법정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무심한 인물로,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후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덕적 원칙이 결여된 인물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검사의 눈에는, 뫼르소가 범죄를 사전에 계획했다는 것이다. 검사는 뫼르소의 냉담함을 고발하면서 여러 사실들을 추적한다. “살인죄……계획적……정상참작등의 말들이 들린다. 뫼르소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뫼르소는 형무소 부속 사제의 면회를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사제와의 면회를 하게 된다. 삶과 죽음,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뫼르소는 갑자기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사제에게 목이 터지도록 고함친다. 욕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처음으로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생각을 폭발시킨 것이다. 이후 뫼르소는 자신의 사형집행을 받아들인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뒤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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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리뷰) 

 

알베르 카뮈의 세계는 삶의 기쁨과 죽음의 전망, 빛과 가난, 왕국과 유적, 긍정과 부정 등 안과 겉의 양면이 언제나 맞물리어 공존하는 세계다. 그는 그 어느 쪽도 은폐하거나 제외하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삶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어둡고 비극적인 또 다른 면을 뚜렷하게 의식했다. 삶의 종점인 희망 없는 죽음은 그로 하여금 세상만사의 무의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방인은 바로 이 허무감의 표현인 동시에 이 허무감 앞에서의 반항을 말해준다.

우리들 각자는 최대한의 삶과 경험을 쌓아 가지만 결국 그 경험의 무용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끼고 만다. 무용함의 감정이야말로 그 경험의 가장 심오한 표현인 것이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 1934~1935년 겨울에 이미 카뮈는 친구 막스 폴 푸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렇다고 해서 비관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그는 2차 대전 직전의 여러 해 동안 인생의 부정적인 어둠을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다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안과 겉, 결혼과 같은 초기 에세이와 행복한 죽음의 집필에 몰두하는 한편 신문기자로 활약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한 잡다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1935~1939년 사이에는 알제의 극단을 이끌며 극작가, 연출가, 배우로 재능을 발휘하며 동지애의 희열을 경험한다. 피에르 앙리 시몽이 지적했듯 사르트르와 달리 카뮈에게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이러한 적극적 활동 속에서도 삶의 무용함에 대한 의식은 그 활동들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만들었다. “행동의 한복판에서 행동에 가담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행동에서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라고”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는 말했다. 부조리에 대한 의식이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삶의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의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시지프 신화는 이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카뮈는 이런 논리적인 질문과 그 대답(시지프 신화)에 앞서 우선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삶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것이 이방인이다. 카뮈는 일찍부터 사르트르의 구토에 관한 서평에서 소설이란 어떤 철학을 여러 가지 이미지들로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좋은 소설에는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들로 변해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사르트르는 시지프 신화에 표명된 철학이 이미지로 옮겨진 것이이방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서상 소설 이방인이 먼저 쓰였고 그다음에 부조리에 대한 체계적 성찰(시지프 신화)이 뒤따랐다는 사실이다. 카뮈가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그의 생각+을 예술가의 체계로 바꾸어 등식 관계로 표현하면서 그 낱말이 내포하는 조직적인 면을 배제한다고 명시한 것은 바로 소설적인 이미지가 논리적 추론과는 달리 비체계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의 모습임을 강조한 것이다.

 

요컨대 이방인은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고전적인 소설의 형식 속에 담아 놓은 소설이다. 카뮈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의미는 정확하게 말해서 1부와 2부 사이의 평행관계에 있다.”(작가수첩ⅱ』) 소설 1부는 그날그날 별 의미 없는 뫼르소의 생활을 묘사한다. 그리고 2부의 법정에서 그 생활과 행동의 의미가 해석된다. 법정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무심한 인물로,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후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덕적 원칙이 결여된 인물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그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이 불가능해짐으로써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어떤 인물인가? 작가 자신이 말했듯이 소설 전체에 걸쳐 그는 오직 삶이, 혹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제기하는 질문에 대답할 뿐이다. 그는 적게 말하는인물이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감옥 안으로 찾아온 부속 사제 앞에서 분노를 터뜨린다. 처음으로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생각을 폭발시킨 것이다. 카뮈 자신은 어떤 비평가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가운데 이 대목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예술 작품 전체에 걸쳐 계산되어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눈 밝은 비평가라면 한 인물을 묘사한 것 속에서 그 인물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자신의 비밀스러운 그 무엇을 독자에게 털어놓는 그 유일무이한 순간을 어떻게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당신은 소설의 결말 부분이 하나의 집중된 순간이며 특별한 대복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단 말입니까? 내가 묘사한 그 너무나도 산만하게 분산된 존재가 마침내 스스로를 한데 집중시키게 되는 그 특별한 대목을 말입니다.……이 책의 주인공은 결코 앞장서서 무엇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제기하는 질문이건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이건 그는 항상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그친다는 사실을 당신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그 무엇도 단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음화를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의 심오한 태도에 대해 당신이 지레짐작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책의 마지막 장면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로 그 부분을 주목하지 않은 것입니다.”(작가수첩ⅱ』,40~41)

 

카뮈와 죽음

 

카뮈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연 죽음이었다. 그가 처음 쓴 소설은 행복한 죽음이었다. 그 작품은 자연적인 죽음의식적인 죽음의 문제를 다룬 이야기였다. 이방인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즉 자연적인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왜 하필 음산한 죽음인가? 죽음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읽는 독자는 그 죽음의 이야기가 비극적이라고 느낄 수는 있어도 음산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속에 삶의 기쁨과 햇빛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선 의 문제다. 햇빛과 바다가 주는 행복감을 전신에 맛보며 수영하는 젊은 육체, 축구장에서, 연극 무대에서, 신문기자로 삶의 현장에서 매 순간 속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육체에는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내일 없는현재의 가득함, 이것을 카뮈는 희망 없는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방인에서 죽음의 문제를 분석하기 전에 카뮈의 생애와 작품 속에서 죽음이 얼마나 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죽음의 경험

카뮈의 생애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한 살도 채 되기 전인 19149월에 1차 대전이 발발했고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다. 카뮈는 그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런 기억도 아무런 감동도 없다. ……하기야 그는 흥분해서 떠났다. 마른 전투에서 두개골이 깨졌다. 장님이 되어 일주일간 사경을 헤맸단다. 그리고 면 소재지 전몰장병 위령탑에 그 이름이 새겨졌다.”(안과 겉의 산문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그의 마지막 미완 소설 최초의 인간에는 이 죽음의 이야기가 훨씬 더 소상하게 기술되고 있다.

한편, 카뮈 자신은 1930, 건강한 축구 선수로 활약하던 열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돌연 폐결핵이 발병하여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인다.(결혼,제밀라의 바람, “영원 따위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기 이렇게 자리에 누운 채 이런 말을 듣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솔직하게 말하겠고. 당신은 이제 곧 죽게 됩니다.’”) 일생동안 몇 번이나 그 병의 재발로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고 그로 인하여 대학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그의 삶의 진로가 바뀌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2차 대전 때는 군에 입대할 수도 없었다. 그 대신 독일 점령 하에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는 동안 동지들의 참혹한 죽음을 지척에서 목도했다.

 

2) 작품에 나타난 죽음

카뮈의 작품 속에서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장르별로 간단히 검토해 보자. 그의 전 작품 속에서 죽음은 시종일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로 작용한다. 초기 산문집 안과 겉의 제목부터 시사적인 에세이 영혼 속의 죽음에서 그는 프라하 여행 중 호텔 방에서 고독하게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는 사형수에 대한 언급이 적나라하다. “그렇다. 모든 것이 단순하다.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들에게 헛된 수작은 하지 말라. 사형수에 대해 그는 사회에 대한 빚을 갚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말고 이제 그의 목이 잘릴 것이다라고 하라. 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신의 운명을 두 눈으로 직시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조건에 대한 이 단도직입적 진술은 이방인의 마지막 장면을 예고한다. 두 작품에서 핵심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산문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는 새끼를 반 마리나 먹은 어미 고양이를 목격하면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기억을 말한다. 결혼, 여름에서 그는 저녁의 해 지는 모습을 우주적인 죽음으로 표현한다. “대낮의 찬란하던 제신들은 날마다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리라제밀라의 바람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른 문제에 대해서라면 세련된 의견이 분분하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만은 생각이 빈약하다”라고” 지적하면서 색깔, 죽음 같은 가장 단순한 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말한다. 죽음처럼 이해를 초월하는 단순 자명한 현실 앞에서 맛보는 감정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그는 또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면서 피에솔레 수도원을 찾아갔다가 탁자 위에 해골을 앞에 놓고 매 순간 인간의 조건을 상기하며 살았던 수도사들의 삶에 대하여 명상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진실을 직시하는 태도다.

 

그러면 소설들은 어떤가? 행복한 죽음은 메르소가 자그뢰즈를 죽이고 여행을 떠나는 자연적인 죽음과 여행에서 돌아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속에서 죽는 의식적인 죽음”, 이렇게 두 부분의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 행복의 수단인 돈을 손에 넣기 위하여 죽이는 메르소와 달리 이방인의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살인한다.페스트는 무서운 전염병(전쟁)으로 인한 집단적 죽음의 이야기다. 전락은 다리 위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익사하는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도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는 죄의식 때문에 폐업하고 암스테르담의 흐린 안갯속을 방황하는 변호사 클라망스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문제의 발단은 죽음이다. 단편집 유적과 왕국배교자에서는 포교를 위해 야만인들 세계에 들어갔던 선교사가 개종하여 새로 부임하는 신부를 죽이려고 기다린다. 그는 말한다. “죽이는 것, 바로 그게 필요한 일이다.”

이번에는 희곡 작품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칼리굴라에서 주인공인 황제는 누이요 정부인 드뤼질라가 죽자 행복을, 불멸을 가져야겠다”라고” 부르짖으며 무차별적인 범죄와 살인에 몰두한다. 운명에 대한 나름의 반항이다. 오해에서는 멀리 떠나 살던 아들이 부자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가진 돈을 뺏으려던 어머니 누이의 손에 살해당한다. 살인적인 오해를 깨달은 두 여자도 자살한다. 정의의 사람들순수한 살인자들”, 즉 정의를 위한 테러리스트들의 섬세한살인 이야기다. 계엄령은 삶과 죽음의 전권을 쥐고 만인의 죽음을 관리하는 페스트의 무서운 전체주의적 세계를 드린다.

 

특히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반항하는 인간에서는 살인과 자살에 관한 성찰에 깊이를 더한다. ‘부조리 3부작중 하나인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 된다.” 그런가 하면 반항하는 인간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에 대한 성찰이다. 대혁명 때의 왕의 처형을 신의 죽음과 결부하며 그는 죽음을 역사적인 시각에서 조명한다. “어떤 의미에서 1793년에 반항의 시대는 끝나고 혁명의 시대가 처형대 위에서 시작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카뮈 작품의 일관된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의 형식은 살인, 자살, 사형, 이 세 가지다. ‘살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죽음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인간이 타자에게 가하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희곡 칼리굴라의 살인은 황제의 광적인 권력 행사다. 계엄령에서 페스트는 정부에 기록된 명단에 따라 조직적으로 죽음을 관리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우발적으로 아랍인을 죽인다. 소설 페스트는 사람을 죽이는 전염병에 빗댄 전쟁이라는 전면적 재앙의 풍경이다. 유적과 왕국의 배교자와 행복한 죽음메르소도 살인자들이다.

자살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죽음이다. 영혼 속의 죽음에서는 어떤 여행자가 호텔 방에서 혼자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시지프 신화는 자살에 대한 성찰이다. 오해에서는 자신의 아들과 오빠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머니와 딸이 자살한다. 살인을 저지른 이방인은 사형선고를 받고 페스트의 가장 부정적인 인물 코타르는 자살을 광고하듯 자신의 방 문 앞에 이렇게 써 붙여 놓았다. “들어오시오, 나는 목매달았소.” 단편집 유적과 왕국의 배교자, 행복한 죽음자그뢰즈나 메르소의 죽음은 엄밀하게 따져 볼 때 타살일까 자살일까?

끝으로 사회가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죽음을 가하는 심판인 사형에 대하여 살펴보자. 단두대에 대한 성찰의 저자인 카뮈는 널리 알려진 사형폐지론 자다.. 단두대야말로 카뮈의 고정관념이었다. 사형 집행 장면을 구경하고자 원했던 아버지의 일화는 그의 작품의 여러 곳에 등장하고 이방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단두대는 사형수를 사로잡는 강박이다.

 

이방인의 구조

 

이방인의 구조적 특징은 1부와 2부의 대칭, 대조, 그리고 그 현격한 차이에 있다. 1부에서 뫼르소는 추억도 미래도 계획도 없이 현재의 순간에 만족하는 순진하고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인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내키면 수영을 하고 영화 구경을 하고 바닷가를 산보하고 여자와 함께 집에 와서 잔다. 그리고 또 혼자도 불평 없이 잘 지낸다. 레몽이 부탁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편지를 대필해 주고 사랑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마리가 원하면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사장이 파리지사 근무를 권하면 지금의 생활에 불만이 없고 사람이란 삶을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거부한다. 이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의 병치와 연쇄가 결국은 살인으로 인도한다.

이런 언어 이전의 세계와도 같은 그 자유롭고 무반성한 삶의 순간들이 2부에서는 살인에 따른 감옥 생활 때문에 순진성과 직접성을 상실한다. 몸이 갇혀 있으므로 욕구의 즉각적 만족이 불가능해진다. 삶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감옥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이어지고 주인공의 소외와 더불어 재판부의 논리적이고자 하는 시각을 통해 오히려 공적 사회의 연극적 면모가 드러난다. 2부의 법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재판장, 검사, 변호사, 피고, 증인 등의 역할만 있을 뿐 개인으로서의 이름이 없다. 법정은 각자가 맡은 역할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연극적 사회의 축소판인 것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1인칭 화자의 서술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의 편을 들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살인자가 사회의 피해자로 바뀌는 형국이 된다. 반면에 살해당한 아랍인은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기현상이 초래된다. 뫼르소는 1인칭 화자이며 또한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독자는 뫼르소의 눈으로 그의 행동과 현실을 바라볼 뿐 스스로 뫼르소를 볼 수는 없다. 독자는 그의 성도 모르고 생김새도 모른다. “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화자는 자기 자신의 삶과 행동과 내면을 고백하듯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3인칭처럼, 즉 남의 일처럼 무심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마음속의 감정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 육체의 움직임만을 드러내 보인다.

1부는 어머니의 죽음에서부터 살인사건을 저지르기까지 18일간의 일상적 생활이다. 오늘, 어제,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아침, 저녁 등 시간의 변화와 흐름이 뚜렷하게 표시된다. 반면에 2부의 일 년 여에 걸친 감옥 생활과 재판 과정에 있어서는 시간이 정지된 듯 개념이 흐려진다. 뫼르소는 말한다. “하루는 다른 하루로 넘쳐서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이름을 잃어버렸다. 어제 혹은 내일 같은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이리하여 시간은 낮과 밤, 계절, 하늘, 별 등에 기초한 항구성, 회귀성을 드러낸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선박회사 사무원으로서 그때그때의 일상생활을 즉흥적으로 영위한다. 그의 대타 관계는 남에게 타자의 이해와 무관한, 아니 이해 이전, 언어적 표현 이전의, 자연인의 삶이다. 반면에 살인 후 재판을 받게 되면서 그와 그의 행동들은 타자의 이해, 아니 해석의 대상이 된다. 법정은 한사코 그의 인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모든 행동의 동기를 찾아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행동, 심리적 동기, 인간성 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매달림으로써 오해에 기초한 그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1부가 뫼르소의 눈을 통해 본 개인과 사회생활의있는 그대로의자연스러운 묘사라면 2부는 타자의 눈을 통해서 보이는 뫼르소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그 그림은 동시에 재판에 대한 비판적 회화로 작용한다.

그 결과 전반부와 후반부에 있어서 뫼르소와 법정을 바라보는 독자의 태도가 달라진다. 전반부에서 독자는 우선 주인공의 기이한 태도에 당황한다. 그의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뫼르소가 순수해 보이므로 그에 대하여 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2부에서 독자는 작가의 서술 방식에 좌우되면서 화자가 자신의 운명에 무심하면 할수록, 자신의 자리에서 소외되면 될수록, 독자 스스로 살인범인 그의 편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결과 부지불식간에 뫼르소는 일종의 순교자로 변하여 법정의 희극성을 풍자하고 공적 사회를 고발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1부와 2부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면서도 과연 동일한 소설에 속하는 것인가 의문이 생길 정도로 판이한 인상을 준다.

 

이방인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적 기능

 

죽음은 이방인의 가장 뚜렷한 주제인 동시에 형식이다. , 죽음은 작품 전체에 일관성, 통일성을 부여한다. 세 가지 죽음이 전략적 지점에 배치되어 소설 형식의 기둥이 되고 있다. 즉 죽음은 소설의 처음, 한가운데, 끝에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가 죽음과 만나는 세 가지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된 소설은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의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마감된다. 사형선고라는 무자비한 메커니즘이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는 사형 집행에 대한 여러 가지 보고들과 기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 “신문들은 흔히 사회에 대하여지고 있는 부채를 운운한다. 신문에 의하면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상상력에 호소하지 못한다.” 이 말은 초기 산문집 안과 겉에서 사형이란 무엇보다 목이 잘린다는 사실임을 우회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태도를 상기시킨다. “사형 집행을 구경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 토하는 일화는 곧바로 단두대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어진다. “단두대로 올라간다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라는 식의 방향으로 상상력이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도 메카닉한 것이 모든 것을 짓눌러 버린다. 그저 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대단히 정확하게 목숨이 슬쩍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에 나타난 세 가지 죽음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자연사.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자연사의 소식은 전보의 형식을 빌려 소설 속으로 들어온다. ‘어머니는 양로원에서 사망했으므로 그 죽음은 소설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마치 소설의 끝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의 실제적인 죽음, 즉 사형 집행은 소설 밖에서 이루어지듯이. 뫼르소는 소설 속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뿐 아직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은 미래형인 자형 집행을 받는 날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 주기를 바라는 사형수의 희망으로 소설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통념상 큰 슬픔을 자아낼 것 같은 어머니의 죽음은 화자인 뫼르소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 같지 않다. 적어도 화자인 뫼르소는 자신의 슬픔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장에게 휴가를 청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 버스를 타고 멀리 가서 치러야 하는 번거로운 일, 밤샘, 장례식 등 귀찮은 절차에 불과하다. 어머니를 매장하는 날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나와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기에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살인. 뫼르소가 바닷가에서 아랍인을 죽인다. 체포된 뒤의 심문과 재판 과정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살인에는 아예 피해자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사실상의 피해자는 당시의 피식민인 아랍인이다. 그런데 재판정에는, 심지어 방청석에서마저도 아랍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순전히 백인들뿐이다. 많은 증인들이 실명으로 불려 나오지만 정작 피해자인 아랍인은 끝내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다.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싶을 뿐 피해자 자신에 대해서는 재판장, 검사, 변호사, 방청객 그 누구도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는다. 살해당한 아랍인은 뫼르소가 체포당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이는 뫼르소를 감옥과 법정으로 보내기 위한 살인일 뿐이다. (이 점을 근거로 이방인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가하는 비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법정의 재판관, 검사, 변호사에게는 피고인 뫼르소 역시 실질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법정은 유희가 벌어지는 일종의 연극 무대다. 법정으로 대표되는 공식적 사회의 연극적인 참모습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셋째, 사형. 법정은 재판을 통해 피고에게 죽음을 가하는 판결을 내린다. 이것은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타자에게 의도적으로 가하는 죽음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법정은 사형선고를 내렸을 뿐 사형 집행은 소설 밖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서 사형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소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오직 살인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아직 실행되지 않은 이 죽음, 즉 사형의 전망이 소설 속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가장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소설에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은 과거의 죽음이 아니라 미래에 닥쳐올 죽음이고 의 죽음이 아니라 의 죽음이라는 증거다. 따라서 죽음은 사실상 소설의 참다운 내용이기에 앞서 소설의 구조를 드러내는 테두리, 표적, 경계선으로서 소설에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소설의 윤곽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소설의 처음, 중간, 끝이라는 가장 전략적인 자리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소설의 1부와 2부의 출발과 결말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형식은 1부가 어머니의 죽음에서 살인으로, 2부가 살인에서 사형으로 시작되고 마감된다. 이처럼 소설은 죽음에 의하여 내적 균형을 얻고 그 1부와 2부는 서로 대칭 관계 속에 놓인다. 카뮈는 행복한 죽음집필의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적게말하면서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암시의 형식과 톤을 찾아낸 것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죽음이 소설에 고전적 균형미를 부여하는 형식적 기반이다.

첫째, ‘자연사’: 어머니의 죽음이 살인으로 인도하는 1, 1~5

둘째, ‘살인’: 1, 6

셋째, ‘사형’:살인이 사형으로 인도하는 2, 1~5

이때 16장의 살인1부의 종결점(1부가 살인으로 끝난다)이지만, 동시에 2부의 출발점(살인으로 인하여 체포, 투옥, 심문, 증인, 재판, 사형선고, 집행으로 이어진다)이다.

그러면 그 죽음들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묘사, 서술되고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텍스트의 구체적인 표현들을 바탕으로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 보기로 한다.

 

1)

어머니의 죽음은 겉보기와 달리 실제로는 자신도 모르게 뫼르소의 죄의식을 유발한다. , 그는 어머니의 죽음의 그늘밑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1부는 죽음이 던지는 암시적인 영향들로 점철되어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뫼르소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달라진 그의 시선이 모든 대상들을 변모시킨다. 그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낯설고 이상한 곳으로 변한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의 작용이 여러 곳에서 작용된다.

1장의 장례식은 어떠한가? 그것은 어렴풋하게 용해되어 끈적거리는 세계로 뫼르소에게 일종의 환각 상태를 연출해 보인다. 그가 장례 행렬의 뒤를 따를 때 견딜 수 없이 쏟아지는 햇빛의 영향, 즉 일종의 액화 현상과 검은색이 그러하다. “녹아서 갈라 터진 아스팔트”, “콜타르의 번쩍거리는 살”, “검은 반죽으로 이겨서 만든 것 같은마부의 모자 등 온통 검은색이 주조를 이룬다. 갈라진 아스팔트의 끈적거리는 검은 빛깔”, 사람들이 걸친 상복의 흐릿한 검은 빛깔”, 니스 칠한 영구차의 검은 빛깔등 단조롭기만 한 흑백 톤으로 돌변한 장례식 풍경 때문에 뫼르소는 어리둥절해한다. 한편 어머니의 시선을 지키며 밤샘을 하는 영안실의 모습은 악몽 속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노인들이 밤샘을 위하여 실내로 들어올 때의 침묵, 그러나 눈이 아플 정도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모서리 하나하나, 그리고 눈부신 빛은 그 장소를 짓누르는 침묵을 더욱 공격적이고 기괴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아무 말 없이 그 눈부신 빛 속을 슬며시 들어온노인들은 악몽이나 환각 속의 인물들인 양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 “그들의 눈은 보이지도 않고 다만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얼굴 한가운데 광채 없는 빛만 보였다.” 그들은 모두 문지기를 둘러싸고 나와 마주 앉아서 고개를 꾸벅거리고만있다. 그 이전에 이미 양로원 마당을 가로지를 때 뫼르소는 노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앵무새들이 나직하게 재잘거리는 소리 같다”라고” 느낀다. 거기다가 페레스 영감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또 어떠한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우스꽝스럽다. “검은 점들이 박힌 코 밑에서 입술이 떨리고 상당히 가느다란 흰머리털 밑으로 축 처지고 귓바퀴가 야릇하게 말린 흉한 귀를 가진 그는 장례 행렬을 따르다가 결국 꼭두각시가 해체되어 쓰러지듯기절해 버린다. 이런 모든 것은 부지불식간에 뫼르소에게 일종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죽음의 고통을 마음속에서 억압하듯 말수가 적은그는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묘사를 통해 암시할 뿐이다.

2,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항구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마리와 만났지만 함께 집으로 온 그녀가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고 나자 뫼르소는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보며 무료하게 오후를 보낸다. 그는 어머니가 죽고 난 뒤에서야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나를 깨닫는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습관, 무심함, 일상생활이 지배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겉보기에는 무심한 듯한 그의 생활은 이제부터 그 죄의식 속에서 살인 장면까지 이어진다. 우선, 마리와 자고 난 뒤 처음 찾아든 생각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여느 때처럼 셀레스트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유를 이렇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식당 사람들이 질문을 할 텐데 나는 그게 싫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어머니의 죽음에 무심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어머니가 양로원으로 간 것이 이미 삼 년 전인데도 이제아파트가 그에게는 너무커 보인다. 그의 의식에는 여전히 장례식 날의 내면적 충격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거리의 풍경이 어제의 일, 영안실 그 눈부신 빛이나 얼떨떨했던 그 느낌을 되살려 놓는다. “가로등은 젖은 도로를 비추고 전차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나는 머리털, 웃음을 띤 얼굴, 혹은 은팔찌 위에 불빛을 던지는 것이었다.”

3장에서 5장까지도 여전히 어머니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환기된다. 사무실 근무로 복귀한 3장은 뫼르소와 사장의 대화로 시작된다. 사장이 어머니의 나이를 묻자 그는 한 육십쯤되었다고 어물어물 대답한다. 이것은 심리적인 거리낌의 암시가 아닐까? 이 장에는 같은 거주지 안에 파트너를 상실한 세 남자들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뫼르소는 어머니를 잃었고 레몽의 모르긴 정부는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갔고 살라마니 영감은 개를 잃었다. 개는 그의 아내가 죽은 뒤 고독해서 키운, 이를테면 아내의 대용이다. 살라마 노는 개에 대하여 항상 여기 있는 거예요.”라고 말함으로써 뫼르소와 어머니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뫼르소가 상을 당했다고 하자 레몽은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라고” 충고한다. 그들 세 인물은 각기 비슷한 상실의 영향권 속에 있다.

14장의 살라마노와 개는 보다 직접적으로 죽은 어머니를 상기시킨다. 이 장은 개를 잃은 영감이 옆방에서 우는 소리를 들으며 뫼르소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장면으로 마감된다. “그의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러고는 벽을 통해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로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어머니의 생각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이 까닭 모를 어머니 생각이야말로 심리적 암시가 아니겠는가. 5장에서는 자동인형 같은 키 작은 여자, 살라마니 등이 환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뫼르소는 식당에서 자동인형 같은 이상한여자와 합석한다. 이 에피소드 직후에 그는 아내가 죽자 외로워서 개를 얻어 키우는 살라마노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이 에피소드는 사실상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암시로 연결된다. 개의 진짜 병은 노쇠병인데 노쇠병은 고칠 도리가 없다”라고” 살라마 노는 말하는 것이다. 자연사의 암시다. 그 말에 이어 영감은 그리고 어머니가 그 개를 몹시 귀여워했다고 말했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가엾은 자당님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죽은 뒤 필시 내가 매우 상심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과묵한화자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외적 정황을 자신의 심경이 반사되는 거울로 만든다.

결론적으로, 뫼르소의 의식의 내용이 어떤 것이건 암시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뫼르소에게 어머니는 결코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정독해 보면 우리는 화자 뫼르소의 무관심한 듯한 어조의 진술이 암암리에 어머니의 죽음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살인

16: 이 장은 세 가지 죽음의 장(11장 장례식, 16장 살인, 25장 사형선고)중에서 죽음이 현실적인 사건으로 서술되고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이하게도 죽음 그 자체는 가장 짧게 언급된 장이다. 살인은 그저 네 방의 총소리,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에 불과하다. 이 죽음은 소설의 1부와 2부 사이의 대칭 관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라는 점에서는 다른 두 가지 죽음과 동일한 기능을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른 두 죽음과 다르다. 우리는 재판 과정이나 감옥에 갇힌 뫼르소의 의식 속에서 살해당한 아랍인이나 그의 가족들은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전 공간을 굽어보는 듯한 화자의 시야 속에서 이 아랍인은 충분한 인격체로 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변호사는 빠른 어조로 나의 가해행위를 변호하고 나서, 그도 역시 나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했다.”(24, 116) 이때 변호사가 왜 상대의 가해행위에 대해서는 빠른 어조로만 지나쳐 버렸는지, 왜 뫼르소의 행동이 그 가해행위에 대한 정당방위였다고 충분히 항변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알제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타자인 아랍인을 우연히살해하게 된 백인 뫼르소에 대하여 사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도 당시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핵심이 아랍인의 살해라고 한다면 과연 르네 지라르처럼 소설의 구조적인 결함을 운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인사건으로 마감되는 이 장의 서술을 좀 더 현미경적으로 읽어보자. 그날 아침에 바닷가로 떠나기 위하여 찾아온 마리는 뫼르소에게 초상 치르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두 번째인 죽음(살인)의 장은 초상이라는 표현으로 개시된다. 의미심장한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소설의 한복판에 배치된 이 장은 소설의 11장부터 5장까지에서 보았던 것처럼 열기에 용해, 액화되어 가던 사물들이 견고하고 공격적인 광물질의 세계로 표변하는 장이다. 소설 전체의 건조한 문체에 이어 돌연 많은 은유적 표현들이 쏟아져 등장하는 것도 이 장이다. 그 중심에 공격적인 태양이 있다. 정오가 지난 바닷가의 태양은 어머니의 장례식 때처럼 사물을 액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들고 모든 물질을 쇠붙이로 변화시킨다. 바다는 칼이 되고 모래는 강철이 되고 행동은 살인이 된다. 이날 아침 화자 뫼르소는 시작부터 길에 나서자 뜨거운 햇볕에 따귀라도 맞은 느낌이라는 뜻밖의 의미심장한 은유를 동원한다. 이는 장차 해변 장면의 공격성을 예고한다. 이 장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햇빛을 반사하는 모래, 쇠붙이, , 사금파리, 권총 모두가 광물의 공격성을 드러낸다. 공격성은 사실 어머니 장례식과 해변 장면에 공통된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라고” 뫼르소는 말한다. 이 말은 이날의 상황을 어머니의 죽음과 등식 관계로 정리하는 발언이다. 다시 말해서 살인은 어머니의 죽음의 메아리이며 귀결인 동시에 이제 다가올 죽음이 제3의 죽음 즉 사형선고의 예고요 전조라는 의미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면 살인은 1부와 2부의 통로나 연결 고리로 기능한다는 뜻이 된다. 죽음 1(어머니의 죽음-처음)이 소설의 1부 전체에 어두운 죄의식의 그림자를 던지듯 뫼르소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죽음 3(사형-)은 또한 소설의 2부 전체(재판과 사형선고와 죽음에 대한 성찰)에 숙명적인 그림자를 던진다.

결론적으로 비록 죽음 2(살인)가 감옥에 갇히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원인이기는 하지만 피고 뫼르소에게 보다 깊은 영향과 흔적을 남기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죽음 1(어머니의 자연사)과 죽음 3(뫼르소의 사형)인 것이다. 살인 사건은 소설의 중심에 배치되어 미래에 다가올 죽음, 즉 사형 집행이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와 어머니의 죽음이 드리우는 죄의식의 그림자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에 불과하다. 소설 전체 구조에 있어서 살인사건의 효율적 기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 2(살인)는 죽음 1(어머니의 죽음)에서 죽음 3(사형)으로 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면서 주인공이 죽음의 그림자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랍인의 죽음이 완전히 관심에서 지워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살인 행위는 오직 살인자와만 관련이 있고 피해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불법행위에 불과해 보인다. 핵심은 화자요 주인공인 뫼르소이지 타자인 아랍인이 아닌 것이다.

 

3) 재판-사형(다가올 죽음)의 그림자-숨결

21: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뫼르소가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과 관련하여 변호사가 뫼르소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느냐?”라고 물었을 때 뫼르소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변호사는 그러면 불리한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라고” 쌀쌀맞게 경고한다. 여기서 뫼르소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자들 역시 벌써부터 재판 결과에 대하여 부정적인 예감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변호사 앞에서 뫼르소는 이런 기이한 말까지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흥분한 변호사는 급히 그 말을 가로막았고그런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다그친다.

2장에서 뫼로 소는감방이 내 집이라고 여기고 자신의 생활이 그 속에 멈춰 있음을 느낀다. 그의 운명이 결정적임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 장의 끝은 다음과 같은 불길하고 의미심장한 말로 마감된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 날, 간호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정말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형무소에서 맞는 저녁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다.” 과거의 죽음 1(장례식)의 환기인 동시에 미래의 죽음(사형선고)의 예고로 읽히는 진술이다.

3장에서 어머니의 시신 옆에서 밀크 커피를 마신 것과 관련한 심문 끝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는 무엇인가 방청석 전체를 격양시키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대한 변호사의 반응은 어떤가? “그러나 그 자신 동요된 빛이었고, 나는 사태가 나에게 결단코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자 뫼르소는 결론처럼 이장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죄 없는 수면으로도 인도해갈 수 있고 감옥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다는 듯이.” 이 서정적이고 우울한 술회1부의 개방된 삶을 의미하는 죄 없는 수면2부의 갇힌 삶을 의미하는 감옥을 서로 이어 주는 죽음의 길을 손가락질해 보인다. 이 길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4장의 사형선고는 확신으로 임박해 오는 죽음이다. 죽음은 이제 막연한 위협이 아니다. 이 시점부터 소설의 끝까지 죽음의 강박은 뫼르소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5장에서 신부가 사형수 뫼르소를 찾아온다. 신부가 기도하겠다고 하자 그때까지 별로 말이 없던 뫼르소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마침내 폭발한다. 올 것이 왔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확신, 즉 죽음에 대한 그의 확신을 토해 낸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뫼르소는 진실을 직시하며 진실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뫼르소의 전 생애, 그의 진술을 따라 독자들이 차근차근 밟아 온 그의 모든 과거는 그를 이 죽음의 확신으로 인도한다. 카뮈가 말했듯 소설가의 임무는 사형수를 단두대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첫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라고” 못 박아 말한다. 이 말은 동시에 이 소설 전체의 모든 행위들을 죽음이라는 가장 분명한 확신 속에 통합하는 구조적 발언이다. 이어서 그는 죽음 앞에서 삶의 모든 가능성들이 가지게 되는 저 기막힌 등가성을 언급한다. 소설 전편에 걸쳐 되풀이된 말,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라는 표현은 삶의 가치를 평준화하는 죽음의 어둡고 가차 없는 바람이 초래하는 결과다. 죽음의 그림자가 삶 전체를 덮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에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25134p

소설 전편에 걸쳐 짧은 단문의 회화체로 서술하던 화자 뫼르소가 자신의 입으로 토해 내는 말의 문장 구조가 상대적으로 길어지고 장황해진다. 그렇다면 이 대목이 작가에게는 매우 다듬어진 의도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불어오는 어두운 바람은 뫼르소의 의식 속에 확신으로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이 모든 가능성들을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평준화해 버린다. 어머니의 죽음에서부터 사형선고에 이르는 동안 이 어두운 바람은 여러 곳에서 이미 암시처럼 불고 있었다. 13장에서 뫼르소는 레몽의 방을 나와 어둠 속의 층계참에 잠시 서 있다. 그때 고요하고 깊숙한 층계 밑으로부터 으스스하고 음습한 바람이 올라온다. 그런가 하면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해변에서도 바다는 가쁜 숨결로 헐떡이며 그의 얼굴 위로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이처럼 텍스트의 암시적 지표들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은이방인전체의 주제인 동시에 그 형식을 지탱하는 창조적 충동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의 사형은 소설의 양쪽 끝, 즉 소설이 시작되기 전과 소설이 마감된 뒤에 어느 지점으로부터 숨결혹은 바람의 모습으로 불어와서 소설의 한복판, 살인이라는 구심점에서 서로 만난다. 또한 그와 반대로 법정은 오직 소설의 시작에 위치한 어머니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보이며 뫼르소의 행동을 해석하고 뫼르소 자신은 오직 미래에 다가올 자신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일종의 원심력운동을 나타낸다. 즉 재판부와 피고는 소설의 중심인 살인사건에서 소설의 시작과 끝 쪽으로만 향하는 힘의 방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된 힘의 운동은 서로 대칭, 균형을 이룬다. 따라서 소설의 의미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기반을 둔 1부와 2부 사이의 평행 관계로부터 산출된다고 볼 수 있다.

 

4) 결론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소설 마지막 문단의 인용이다.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 삶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 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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