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당신들의 천국』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저자소개
이청준
1939년 8월 9일 전남 장흥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에 『사상계』 신인상에 「퇴원」으로 당선되었다. 초기의 작품 「병신과 머저리」(1966), 「굴레」(1966), 「석화촌」(1968), 「매잡이」(1968) 등에서 현실과 관념, 허무와 의지 등의 대응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한다. 그는 경험적 현실을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발표한 주요 작품으로는 「소문의 벽」(1971), 「조율사」(1972), 「떠도는 말들」(1973), 「당신들의 천국」(1974), 「이어도」(1974), 「자서전들 쓰십시다」(1976), 「잔인한 도시」(1978), 「살아 있는 늪」(1979) 등이 있다. 이 소설들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정치‧사회적 메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정신의 대결관계이다. 특히 언어의 진실과 말의 자유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른바 언어사회학적 관심으로 심화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거치면서 「잔인한 도시」에서 닫힌 상황과 그것을 벗어나는 자유의 의미를 보다 정교하게 그려내기도 하고 「살아 있는 늪」에서는 현실의 모순과 그 상황성의 문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사실성의 의미보다는 상징적이고도 관념적인 속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청준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보다 궁극적인 삶의 본질적 양상에 대한 소설적 규명에 나서고 있다. 「시간의 문」(1982), 「비화밀교」(1985), 「자유의 문」(1989) 등에서 그는 인간존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의미에 집착을 보인다. 인간존재와 거기에 대응하는 예술 형식의 완결성에 대한 추구라는 새로운 테마는 예술에 대한 그의 신념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작가는 대표적인 1960년대 세대이면서도, 1970~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세계를 갱신하고 넓혀간 점이 주목된다. 그의 소설은 지적이면서도 관념적이지 않고, 세계의 불행한 측면들을 포착하면서도 그 이면을 냉정하게 응시하려 한다.
또한 그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충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어, 줄거리만을 훑어보는 식의 안이한 독법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집 『소문의 벽』후기에서 소설 쓰기를 ‘자기 구제의 몸짓’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자기를 구제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내외적 조건들에 대한 성찰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소설이라는 언어와 언어 그 자체에 관한 반성을 낳는다.
그의 소설에서 흔히 구사되는 액자소설의 기법이라든지 추리소설적인 요소, 또한 언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들은 이러한 반성적 사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3회 동인문학상을, 1978년에는 「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문학상을, 1985년에는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책의 배경
1) 4.19세대(시대적 배경)
4.19혁명은 비단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일대 사건이었다. 현대 문학사는 이 혁명이 한국 문학에 몰고 온 가장 큰 변화로 소위 ‘4.19세대’의 출범을 꼽곤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문학사상 4.19세대라 함은 ‘청년기, 특히 대학 시절 4.19를 체험하였고 식민지 시기 이후에 교육을 받아 한국어로 사유하고 그 사유를 한국어로 기록할 수 있었던 최초의 한글세대’로 정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4.19세대의 대표적 작가들이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 등이다. 그러나 물론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알다시피 바로 이듬해인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은 4.19가 꽃 피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면서, 1960~70년대 전체를 암울한 개발독재 상황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념은 이제 위로부터 주도되는 일방적 경제 개발의 논리에 의해 대체된다. 4.19세대 작가들에게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신뢰 이면의 절망과 우울이 발견되는 것도,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이 보다 심도 깊게 개인과 집단, 자유와 평등, 자아와 세계의 문제 등에 대해 탐구할 수 있었던 것도 역설적으로는 이러한 양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2) 당신들의 천국?
윗선이 국민들에게 천국을 약속하고, 그 천국을 위해 노역과 희생을 감내하게 하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 정치적 자유를 내놓게 했던 개발독재 정권의 통치 메커니즘은 그대로 조백헌 원장(이야기 속 인물)의 모습 속에 투영된다. 위로부터 주도되고 약속된 천국은 진정 주민들을 위한 ‘우리들의 천국’인가 아니면 주도하는 자의 자기만족을 위한 ‘당신들의 천국’인가?! 작가는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지극히 중요하고도 심오한 질문들을 던진다. 당시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느끼는 불편함, 우상화의 문제점, 지상낙원의 주인 등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내용 요약(줄거리)
[사자의 섬]
1. 새로운 원장과 탈출 사고
혁명이 지나고 섬 병원은 한동안 원장 없이 운영되어오다가 현역 의무 장교 조백헌(趙白憲) 대령이 새 원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선창까지 자신을 마중 나온 병원 직원들과 자동차를 못마땅해하였고, 첫 출근을 하고 나서도 부임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간밤에 일어난 두 사람의 탈출 사고 때문이다. 관례상 원장이 나설 일이 아니었으나 보건과장 이상욱은 보고를 올렸고, 원장은 부임 인사를 생략한 채 탈출 지점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출근 첫날 일정을 시작한다. 이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2. 탈출 사고의 원인
원장과 이상욱은 자동차를 이끌고 탈출 지점으로 간다. 가는 길에 섬의 경치에 감탄을 하던 원장은 이상욱에게 ‘탈출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지 물었고,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이상욱의 말에 원인을 알아내고자 한다. 그러다가 청년 둘을 만난다. 사고의 원인을 알고 있을 것 같았던 청년들은 광인처럼 악을 쓰며 묻는 원장의 모습에도 끄떡하지 않고 사라졌고, 원장은 다른 사내를 잡아 재촉하나, 사내는 냉랭하게 이야기한다.
- 당신들이 모르는 일은 우리도 모르는 일이오.
- 당신 자신이 알아보시오. 그자들이 왜 이 섬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지, 왜 당신에게 그자들이 말을 피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당신을 두려워하고 정직한 대답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당신 스스로 그것을 배워 알도록 해보시오. 아마 당신이 이 섬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오.
그 후, 돌아가는 길에 원장은 이상욱으로부터 섬 전체가 한(恨) 덩어리라는 것과 섬을 나가려는 자가 생기는 이유는 ‘공연한 소문’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뭍으로 가면 더 빨리 나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섬 병원은 완치 환자들을 오히려 내보려는 쪽에 속하고 있다는 점과 섬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자는 환자들이 아닌 ‘인간’이라고 이상욱은 말한다.
3. 건의함, 그리고 보육선생 서미연
원장은 탈출 사고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지 않고 묘한 지시를 하나 내린다. ‘모든 병사 지대 마을에 건의함을 하나씩 설치하기.’ 병원 시책에 관한 불만 혹은 요구 사항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일에 관한 결과를 미리 짐작하던 이상욱에게 보육소의 서미연 선생이 찾아와 원장의 일에 관심을 가진다. 그녀는 신념과 봉사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보육소의 일을 시작한 육지 아가씨였는데, 병원 직원들 중 이상욱한테만 의논 거리를 가지고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의논거리보다 항상 무엇인가 늘 그것 이상의 깊은 이야기를 상욱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새 원장의 조치에 관심을 모으고 있던 상욱은 그녀의 이야기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침묵 속에서 일곱 개의 건의함에 대해 이상 유무를 확인한 후, 개함을 시작하였다. 첫 번째 상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장은 당황했다. 두 번째 상자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원장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모든 상자는 텅텅 비어 있었다. 모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이상욱의 입가에선 그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가 지나가고 있었다.
4. 병
보육소 아동들의 부모 면회가 있는 날이었다. 보육소는 완충 지대로 넘어가는 직원 지대의 경계선 철조망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는데, 상욱이 도착했을 때에 이미 부모들이 철조망 뒤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서서 자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5분 동안만 가능한 ‘면회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상욱과 원장의 곁으로 보육소의 말썽쟁이 윤해원 선생이 다가온다. 그는 건강한 여자만 보면 엉뚱한 봉변을 주어서 섬에서 내몰고 싶어 하던 자였고, 서미연 선생 이전에 많은 여자들이 이 때문에 섬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심한 ‘분홍색 집착증’을 가진 사람이다. 섬에서 분홍색이나 벚꽃 소식이란 문둥병이 얼굴 근처에 첫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자주 그 벚꽃의 분홍색을 볼 수 있는 데서 연유한 말인데, 건강한 몸으로 섬에 들어와 최초로 병을 앓았던 윤해원은 보육소 아이들 가운데 발병 사고가 생겨나도 실패감에 젖기보다 활기를 되찾는다. 또한 그는 테스트 결과 문제없는 조 모 아이의 재검을 상욱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5. 사자의 섬
탈출 사고를 이해하기 시작하던 새 원장 조백헌 대령은 마침내 부임 연설을 결심하고 사람들을 모으라 지시한다. 이에 상욱은 결국 원장에게도 ‘동상’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라 추측하며 불안해했다. 그렇게 보행이 불가능한 사람을 제외하고 5천여 명의 원생들이 중앙 공원 광장에 모였다. 그곳에서 원장은 말했다. “우리는 이 섬을 다시 꾸며야겠습니다.” 한껏 상기된 채로 연설을 마친 원장과는 대조적으로 원생 대열 쪽에서는 끝까지 미동도 없이 원장이 떠나갈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날 밤, 원장은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연설의 반응에 대해 살펴보고자 부른 자리였다. 이곳에서 상욱은 30년 전에 원장과 똑같은 말을 하고, 약속을 지키는 대신 이곳에 ‘동상’을 세운 4번째 원장 일본인 주정수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이 섬에선 죽은 자들만이 말을 한다고, 사자들의 넋이 살아 있는 사자들의 섬이라고 말이다. “누구나 숨을 거두고 나서 비로소 말을 시작합니다. 사자의 섬에선 언제나 그렇듯이 사자들만이 말을 하니까요.”
6. 또 다른 탈출 사고
원장의 부임 연설이 있었던 다음 날, 중앙리 독신사에서 밤사이 자살 사고가 발생했다. 현장으로 가면서 상욱을 찾던 조백헌 원장. 그는 상욱의 경력을 궁금해했다. 30년 이상 혼자 지녀온 비밀이 있는 상욱은 기분이 섬뜩해졌고, 원장이 동상을 세우는 것을 조심스럽게 실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중앙리로 간 상욱은 자살을 한 청년 한민의 모습에 의외성을 느꼈다. 한은 이미 환자가 아니었다. 하기야 섬을 나갈 수 없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병 생활에 대해 글을 써서 응모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청년이었다. 이에 상욱은 청년이 이 섬을 자신의 낙토로 여기지 않았다고 원장에게 말한다.
이 자살사고를 원장은 자신의 부임 첫날의 탈출 사고와 같은 식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상욱은 확신했다. 낙토를 꾸미겠다는 말을 믿지 않고, 보기 좋게 자신을 배반해 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상욱은 두 사고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는 진짜 섬에서의 탈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요한 탈출 의지의 마지막 좌절’이고, 이 섬에서의 ‘귀의(歸依)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상욱은 봉우리 너머 화장터에서 피어오르는 거무스레한 연기를 바라보며 말한다. “녀석은 이제 진짜 말을 하게 되겠군. 아니 녀석은 벌써 말을 시작했어.... 언제쯤 원장은 저 사자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단 말인가”
[낙원과 동상]
7. 배반
자살 사고가 있었던 며칠 뒤, 원장은 장로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인화단결’ ‘정정당당’ ‘상호협조’ ‘재건’의 네 가지 새 병원 운영 방침을 내건 액자를 걸었다. 또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위생복, 위생장갑, 마스크까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착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병사 지대의 환경 개선을 위해 그 옛날 힘겨운 노역과 학대의 역사를 상징하고 서 있는 중앙리 벽돌 공장의 높은 굴뚝을 철거해버렸다. 그리고 분교 아이들이 본교로 와서 본교 아이들과 똑같이 수업을 받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에도 원생들은 한결같이 그저 늘 그러나 보다 하는 표정일 뿐이었다.
결국 원장은 짜증이 났고, 장로회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나 허탕을 쳤다. 이에 그는 상욱을 불렀다. 그리고 원장의 말에 벙어리들이 되어버리는 원생들의 모습은 ‘배반’이 생길 것이 두려워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상욱은 말했다. 주정수 원장의 동상은 사실 자신이 앞서서 직접 세운 것이 아닌 그가 만든 평의회가 만들어 바친 것이라는 것과 남이 아닌 자신들에 대한 ‘배반’을 걱정하고 있다.
8. 주정수 원장
오늘날까지 섬에서의 모든 시련을 감내하며 섬의 슬픈 역사의 표상인 황희백 노인을 만날까 고민을 하던 상욱은 문득 ‘동상’을 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원장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주정수 원장을 생각했다. 은밀한 동상의 꿈을 숨기고 있던 주정수 원장은 부임했을 때, 섬의 원생들에게 상당한 활기와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사람이다. 우람한 체격에 참새눈을 가졌던 그는 가늘고 세찬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원생들에게 ‘약속’의 부임 인사를 했었다. 이웃으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고 섬으로 모인 원생들이 서로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도록 새 고향을 꾸밀 것이라고!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원생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열심히들 일을 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낙원을 꾸민다는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며 섬의 공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작업은 순조로웠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낙원 설계에 자신감이 차있던 주정수 원장은 거기서 다시 제2차 시설 확장 공사를 서둘렀고, 그의 종말을 엉뚱한 비극으로 결정짓게 될 운명의 씨앗이 서서히 싹터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걷던 상욱은 어느새 치료소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9. 소년
치료소 일을 끝낸 상욱은 노인을 찾아가는 대신 또 하나의 배반의 현장이었던 구북리 돌부리 해변가로 갔다. 이 곳을 통해 섬을 빠져나간 한 소년을 떠올렸다. 문이 잠긴 컴컴한 방에서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걱정하여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소년은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어두컴컴한 이불속에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와 딱 한 사람, 밤늦게 소년의 어머니를 찾아오는 사내에게는 아직 무서움을 타지 않았다. 자신보다도 사람을 겁내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사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착각이었을까. 바로 그 사내 때문에 소년은 어머니 곁을 떠나 섬을 나가게 된다. 초가을의 어느 날, 어둠을 타고 나타난 사내는 소년을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어느 바닷가 숲 덤불 근처로 와서 소년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다시 소년을 등에 업고 마을로 돌아갔다. 이것이 연사흘 반복되었다. 그러다 3일째 되던 날,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발견한 사내는 소년을 배에 실었다. 그러다 이상하게도 소년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무서운 사내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 더러운 문둥이 새낄!’ 이튿날, 사내는 다시 소년을 바닷가 숲 속으로 데려가 영영 섬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때가 주정수 원장이 낙토 건설에 한창 열이 올라있을 때였다. 상욱은 이곳에서 소년의 귀를 통해 고깃배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10. 사토(佐虅)
상욱이 장로회를 만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원장은 묵묵히 혼자 일을 해결해나가고 있었다. 그의 첫 사업 계획은 섬 안에 축구팀을 만들어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이 사안으로 대화를 나누던 원장과 상욱의 이야기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원장은 주정수 원장 시절의 ‘사토’라는 간호수장에 관해서 상욱에게 물었다.
주정수의 시대는 곧 사토의 시대이기도 했다. 주정수는 2차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벌써 몇 가지 다른 부속 시설들을 완성시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진행되어가는 동안 섬 안에서 작업의 성격이 서서히 달라져가고 있었다. 공사 경비는 원생들의 노력 봉사에 의해 충당되기 시작했고, 1차 작업과는 달리 자발적인 열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주정수는 평의회의 기능을 한층 강화시키는 동시에 ‘상관단’을 설치하여 원생들의 치료와 작업 진행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원생들의 불만이 일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상관단의 통제는 극성스러워졌다. 결국 상관단에 대한 충성심이 입증되기를 소망하던 평의회 사람들이나 한국인 순시들이 동료 원생들의 처지를 함부로 배반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에 분노한 마을 청년들이 ‘노루 사냥’이라는 사건까지 일으켰다. 이 소란에 헐레벌떡 달려온 상관단 사람들로 인해 청년들은 감옥소에 보내졌고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때는 매정한 단종수술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때, 상관단의 총지휘자 격이었던 사람이 사토(佐虅)였다. 그는 모든 작업을 그의 무서운 가죽 채찍 아래 이루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선창 공사장의 주위에서 긴 가죽 채찍을 흔들어대며. ‘-이 더러운 문둥이 새끼들. 썩어 문드러진 몸을 아껴서 뭘 할 테냐!’ 폭언도 일삼았다. 원생들은 사토의 그림자만 봐도 치를 떨었다.
11. 귀향(歸鄕)
상욱의 책상 위에 한민 청년 앞으로 온 우편물이 놓여 있었다. 이미 포장지가 뜯긴 상태였는데, 먼저 본 누군가가 상욱에게 뒤처리를 맡긴 것 같았다. 상욱은 ‘귀향’이라는 제목이 붙은 백 장 정도의 소설 원고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장은 1930년대 초반 어느 가을날 저녁, 야간 남행 열차에서 ‘이순구’라는 사내와 ‘지영숙’이라는 여인이 만나는 것부터다. 두 사람은 이날 저녁 나란히 섬으로 들어갔다. 섬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남자 독신사, 여자 독신사로 각각 격리 수용살이가 시작된다. 그곳에서 원생들은 끼리끼리 ‘오누이’가 되어 서로 은밀한 위로를 나누는데, 이순구와 지영숙도 그런 오누이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이순구의 나팔 소리가 어두운 허공을 뚫고 흘러갈 때, 수풀 속에 숨어 몰래 듣다 울음을 터뜨린 여인이 있었다. 그는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찾았고, 그 사람은 지영숙이었다. 이날 밤 이순구와 지영숙은 두 사람 사이의 ‘오누이’를 단념하고 만다. 이어서 2장의 내용이 시작된다. 엄격한 통제와 간섭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났고 지영숙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고백하던 날, 이순구와 지영숙은 그 치열하던 사랑의 동작도 멈추고 서로의 젖은 이마만을 끝없이 비벼대기만 했다. 하지만 그 후, 두 사람은 사실이 탄로가 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백하지도 못하고 아이를 지우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흐르니, 두 사람의 비밀은 어느새 섬 전체 원생들의 비밀이 되었다. 섬사람들은 조용히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고, 두려운 눈길로 말 없는 축복을 보냈다. 그러다 무거운 진통 끝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날이 흐를수록 이순구는 더 불안해했고, 병원 부서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고자 노력했다. 이를 인정받아 병원 당국으로부터 순시원의 자리를 얻어냈다. 5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고깃배에 어린 소년을 태워 섬에서 내보내고 만다. 3장의 내용은 이순구의 배반 과정이다. 그는 동료 원생들에게 마구 신경질적인 행동을 드러내고, 병원 당국의 충성스러운 손발이 되어버린다. 한민은 여기서 ‘노루 사냥 사건’을 비로소 소개한다.
상욱은 여기서 원고를 덮었다. 그는 한민에게 어린 소년의 탈출 이야기만 해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민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제목이 귀향인지 납득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원고 끝자락에서 성년이 된 소년은 다시 섬으로 돌아와 섬 일을 신념껏 돌보는 일을 한다. 아마 그래서 ‘귀향’인 것이라고 상욱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전달되기 전 포장을 뜯고 원고를 본 사람을 알아냈다. 그 사람은 조백헌 원장이었다.
12. 빨간 유니폼의 축구팀
축구에 대한 원장의 집념은 훨씬 대단했고, 장로교와 천주교의 두 축구팀을 창설했다. 외부 코치의 지도 아래 본격적인 합숙 훈련과 양 팀 간의 친선 시합을 통해 실력을 쌓아나갔다. 한 번은 섬 밖 축구팀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장의 축구에 더 빠져들었고, 원생들의 태도와 분위기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지 원장이 원하니까 하던 축구가 모든 섬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마침내 자신이 생긴 원장은 축구팀을 섬 밖으로 끌고 나가 고흥군민 체육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도 선수권을 장악하는 등 기대 이상의 수확을 이루어냈다. 아무도 응원하지 않는 빨간 유니폼의 축구팀은 ‘문둥이도 똑같은 축구선수’라고 권총을 빼들고 외치는 장교의 힘내라는 협박 아래 열심히 뛰었다. 발가락이 마비되거나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선수들로 인해 선수 교대가 잦아 장교가 유니폼을 입고 직접 축구 시합에 참여했다. 이를 보고 관중들은 환성과 박수를 보냈다. 그 후 섬사람들이 모두 함께 「소록도의 노래」를 합창하고 함께 감격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원장은 차 위에 서서 홀로 웃고 있었다. 원장을 믿고 그에게 감사하는 섬사람들의 흥분 속에서 원장은 혼자 웃었다. 이 모습을 본 상욱은 혼자 치를 떨고 있었다.
13. 황 노인의 이야기
더 이상 원생들에게 공을 차게 하지 않고 방대한 사업 계획의 일을 시키려는 원장을 보며 상욱은 주정수 시대의 일들이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 그 당시에도 명분이나 동기에 잘못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완벽했다. 하지만 명분이라는 것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차지였다. 낙토 건설 중 하나인 공원 건설을 위해 원생들은 노예가 되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공간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곳은 섬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자랑스러운 낙원의 증거’가 되었다. 공원은 원생들에게 모셔지고 있었다. 조백헌 원장의 계획의 명분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섬사람들이 그 명분에 따를까. 큰 명분의 뒤에는 알게 모르게 늘 누군가의 동상이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이날 저녁, 상욱은 황희백 노인의 누구보다도 분명한 배반의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갔다. 황 노인은 언제나 그 배반의 내력을 되풀이 이야기했다. 상욱은 이야기를 사양하지 않았고, 황 노인 역시 왜 상욱이 무참한 배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지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계속되는 노역과 학대 때문에 윗선들의 눈치를 보고 살았던 시대. 주정수 원장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 동상을 세워 모시자고 했던 이순구. 이 때문에 시작되었던 강제나 다름없던 모금 작업. 동상을 세울 터에 화강암을 18척이나 쌓아 올린 축대의 전면에 周正秀園長像이 새겨지고. 그해 8월 20일, 마침내 동상이 완성되어 개막식이 거행되었다. 개막식에 이순구는 그의 두터운 신임으로 빠졌는데, 그때 느닷없이 이순구에게 방문하여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버린 사내가 있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손가락이 없는 불구 환자 이길용.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섬을 문둥이들이 살기 좋은 천국이라고들 말했지. ... 하지만 그 이길용이란 청년은 그렇게 믿질 않았던 모양이지....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섬의 사정을 바깥세상에 알리고 싶었다니까. 하지만 일은 물론 그가 바란 대로 될 수가 없었지.... 주정수란 사람한테 문둥이들이 저지른 행패만 보더라도 말이야. 그건 벌써 다른 문둥이들도 자기들의 천국을 참을 수 없게 된 증거였거든.”
다음 해 6월 20일, 보은 감사일이었다. 한 청년이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주정수 원장의 심장을 찔렀다. 원한 맺힌 복수극이었고, 주정수 원장은 그렇게 종말을 맞이했다. 황 노인은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었던 배반이었다고 말한다. 이순구의 일도, 주정수 원장의 일도. “...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 다시 이 섬에 치욕스러운 배반이 일어나선 안 될 테니......”
[출소록기]
14. 설득
본격적인 사업 계획을 드러내는 원장의 태도에 활기를 되찾은 듯싶던 섬사람들은 다시 냉랭하게 굳어져버렸다. 각 마을 장로 일곱 명을 불러모아놓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로들 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장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들의 주님까지 팔면서 장로들을 설득하나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더 나아가 장로들 중 가장 신망이 두텁고 영향력이 큰 황 노인이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첫 번째 장벽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설득으로 인해 또다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혼자서 필요한 공사부터 서두르기 시작했다. 바다를 막아 기름진 옥토로 만들기. 어느 정도 공사 준비를 끝낸 뒤, 원장은 장로들을 공사 예정지로 데려갔다. 천천히 말했다. “당신들은 너무 지난날의 일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버리지 않으려 함은 당신들 스스로가 문둥이로 자처하고 가련한 문둥이기를 고집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지난날의 악몽을 씻고 이젠 내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로만 받으려고 하지 마시오. 당신들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이겨 넘어서려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언제까지나 당신들을 위로만 해주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고...” 장로들의 반응을 기다려볼 생각조차 없다는 듯이 원장은 한동안 검은 하늘로 시선을 흘리고 서 있었다.
15. 선서식
다음 날 아침, 장로회가 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둥이가 아닌 사람으로 이 섬을 나가기 위해 갖은 시련을 겪어왔고 수십 년간 배반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며, 우리의 땅을 바닷속에서 건져내어 섬을 나가게 한다는 약속을 주님의 이름으로 서약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이날 원장은 당장 공개 선서식을 진행했다. 중앙리 공회당에 장로회를 포함한 2백여 명이 모여 원장의 선서식을 지켜보았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서약한 원장에게 황 노인이 한 가지 더 요청했다. “지금 원장께서 하신 서약을 우리 문둥이들의 가엾은 후손의 이름으로 한 번 더 행하게 해 주십시오.” 원장은 자신을 보다 분명하게 지켜줄 권총을 내놓으며 서약을 했다. 이어서 황 노인은 자신들도 서약을 해야 한다며 조용히 식단 앞으로 걸어 나가 원장이 손을 얹고 서약했던 성서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스스로 서약했다.
16. 폭동
선서식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리고 2개의 작업대와 일반 작업반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원장은 ‘오마도 개척단’을 설치하였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 흘러갔다. 마침내 7월 10일, 기공식 날이 찾아왔다. 교회들은 종을 울려 공사의 성공을 기원했고, 중앙리 운동장에서는 열띤 축구 경기가 벌어졌으며, 초등학교에선 어린이들의 노래와 춤 잔치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폭풍전야였다. 술에 취해 관사로 돌아온 원장이 이튿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막 첫 기동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오미도 대안 일대의 마을 사람들이 수백 명씩 작당을 해서 성난 파도처럼 공사장을 습격해 왔다. 원장이 작업 지휘 본부에 이르렀을 때, 이미 소동이 한바탕 섬을 휩쓸고 간 다음이었다. 원장은 분노 때문에 몸이 온통 부들부들 떨렸으나 침착하게 행동하며 자신을 타일렀다. 다친 사람들의 상처를 살피고 간부들에게 사고의 수습 방안을 지시했다. 그리고 홀로 배를 한 척 내어 난동의 무리를 쫓아 나섰다. 침입자들을 만난 원장은 말했다. “... 이 폭동 사태를 진입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난 지금 이 폭동 사태를 나의 권리로만 다스리려 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침입자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자신들을 몰아내고 되려 문둥이들을 들여오려고 한다고 원장을 비꼬며 질문했다. “원장님은 도대체 의사입니까, 사회사업가입니까?” 그리고 덧붙였다. ‘원장이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다. 문둥병을 앓아보지 못한 원장도 우리들처럼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훗날 일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때, 끔찍스러운 참극을 구경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처음부터 시작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이에 원장은 한 번만 더 오늘 같은 난동을 일으킨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17. 원장과 네 사람
기공식 이튿날 아침의 사건은 공사를 위해서는 전화위복의 사건이었다. 사고 소식은 섬에 있던 원생들을 크게 자극하여 자신들의 땅에 대한 새로운 집념과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제1작업대 원생들이 「소록도의 노래」를 외치며 스스로 조를 나눠 차례차례 섬을 떠나기 시작했다. 섬 역사 반세기 만의 비로소 출소록(出小鹿)의 꿈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해가 저물기 전 남은 작업대도 모두 공사장에 도착했다. 날이 밝은 이튿날 아침부터 시작된 작업에 대한 원생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다만 원생들은 열심히 일을 했던지 작업 개시 후 척 주일이 지나자 급작스레 힘이 지쳐나기 시작했다. 한 달 교대의 작업 기간을 보름으로 단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고 있음에도 원생들 쪽에서 불평을 하려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원장의 독려도 간섭도 없어도 되었고, 모든 작업이 일사불란하게 처리되고 있었다. 원장은 대만족이었다. 원장은 오마도 개척단의 부단장으로 선임된 황 노인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일이 즐거웠으며, 그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자주 경험했다. 그러나 공사 현장에서 황 노인 말고도 그의 용기를 고무시켜 준 사람이 있었으니, 윤해원 선생이었다. 그동안 윤해원은 분교 등교를 시작한 다음 그 보육소에 남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고, 또 서미연을 내쫓지 못하고 오히려 기가 질려 여자를 멀리하고 있었다. 그는 서미연이란 여인에게서 증오 대신 정직한 사랑의 욕망을 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원장을 더 흐뭇하고 놀라게 한 것은 섬을 탈출해 나간 축구팀의 한 사람이 제 발로 다시 공사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유길상이라는 청년은 섬을 떠나버린 배신자였는데 어느 날 공사장으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었고, 원장은 그 청년을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워했다. 이렇게 모두가 원장을 돕고 있는 와중에 보건과장 이상욱만이 아직도 태도가 분명하지 않았다. 원장의 지시는 성실하게 이행하되,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열심히 일을 했다. ‘와르르 쿵-’ 밤낮이 바뀌는 것도 잊고. 하루하루 손발이 헐고. 얼굴과 등덜미의 피부들이 온통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다.
18. 경고
결국 보름 만에 1개 작업대 교대를 단행해야 했다. 원생들의 작업열 때문에 병약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여 작업의 능률이 눈에 띄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 보름이 지난 다음에도 똑같은 교대 행사가 이루어졌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작업이 꾸준히 진해되어 갔다. 하지만 바다가 어느새 차가운 회색빛으로 식어가는 9월로 접어들자 원장은 불안했다. 바다 밑에선 도시 작업을 한 흔적이 나타나질 않았다. 말없이 끈질기게 돌을 져 나르는 원생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바다마저 두려워졌다. 원장은 돌을 던져도 하얀 거품만 솟아오르는 바다가 두려웠고 그 자신 또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부로 가장하여 공사장에서 일하던 C일보에서 온 기자 이정태를 발견했다. 원장이 알지 못하는 곳까지 무엇 하나 빠뜨림 없이 속속들이 다 취재를 끝내놓은 이 기자는 원장과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황 노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황 노인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원장에게 이 기자는 말했다. “... 그 노인이 어쩌다 자신의 옛날 일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것은 바로 이 섬 안에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리라는 어김없는 예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너무 믿으려 하지 마십시오. 전 벌써 황 장로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19. 잔혹함
한 달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물밑에서는 여전히 돌둑이 솟아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작업 능률은 떨어져 갔다. 원생들도, 원장도 지쳤다. 그리고 원장은 황 노인이 언제 그의 과거를 말할지 알 수 없기에 두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사고가 발생했다. 변을 당해 몸이 온통 피투성이로 물들어버린 인부는 급히 구호소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것은 흔히 있어온 사고였고, 시작에 불과했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구호소가 있는 곳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더 넘은 골짜기 쪽에서 들려왔다. 불길함에 발걸음을 옮기던 원장은 굳어버렸다. 피투성이 인부가 여자의 작은 몸을 겁탈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굳은 원장 대신 황 노인이 달려들어 사내를 여자로부터 떼어놓았다. 소리를 지르며 여인을 놓치려 하지 않던 사내는 ‘문둥이가 마지막으로 한 번 사람노릇을 해보고 죽고 싶었다.’고 말하며 바다는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절규했다.
다음 날, 마침내 황 장로가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겁탈당한 여인의 마을 청년들이 원장을 찾아와 책벌이 재판을 통한 법적 제재가 아닌 본인들이 직접 보복을 하겠다고 청한 다음이었다. 황 장로가 소년이었을 적이었다. 살집 좋은 아낙을 만나 밥을 얻어먹기 위해 밤마다 그녀와 몸을 부대꼈고, 그러다 아낙이 사내 패거리에 끼여 지내자 일이 없어 사내들이 시키는 일을 했다. 유랑민의 떼가 밤을 새우고 떠나간 자리에 숨이 끊어져 남아있는 젊은 여인들의 위치를 사내들에게 알려주거나 그들이 여인의 몸에 괴상한 장난을 치는 동안, 시체의 뻣뻣한 두 다리를 벌려 붙잡고 멍청하게 앉아있기도 했다. 그러다 소년은 사내들이 문둥이임을 알아채고 떠났다. 하지만 소년의 몸에 이미 붉은 반점이 솟아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주막집의 주동(酒童) 노릇을 하던 어느 날, 사내의 손길이 없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주막집주인의 밤색시가 소년을 찾아왔다. 불쑥 장난기가 오른 소년은 색시에게 자신이 문둥병이 있다고 말했다. 색시는 도망쳤고 소년은 부엌칼을 들고 쫓아다녔다. 이를 들으며 원장은 끝나기를 바라며 절규했고, 황 장로는 덧붙였다. “문둥이는 누가 겁을 먹은 걸 보면 공연히 심술이 사나워져서 점점 더 추악하고 난폭한 꼴을 보인다지 않았는가 말이야.... 문둥이끼리라면 절대로 서로 겁을 먹을 일은 없으니까 말야. ... 원장은 그저 앞으로도 뱃심 좋게 우리 문둥이들을 부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겁먹지 말고 죽도록 일을 부리라 이 말이지.” 그리고 끝으로 문둥이들은 남을 위해 일하는 법이 없다고 황 장로는 말했다.
20. 하얀 돌둑
겨울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긴 겨울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원장에게는 사람과 사람끼리의 싸움이 더 힘겨웠다. 원생들, 황 장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쪽 모두 이 싸움에서 자신을 더 오래 견딜 수 있는 쪽은 누구인지 판가름내기 위해 끈질긴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결국 바다도 없고 추위도 없고 종국에는 상대방마저 문제가 되지 않는 자기 의지와의 싸움이었다. 그 길고 쓰라린 싸움에도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남해 바다가 냉기를 벗기 시작한 2월 하순 무렵, 원장은 작업 지휘소를 들러 나오다가 바다의 이상한 변화를 보았다. 산을 내려와 배를 탔다. 그리고 원장은 숨이 막힐 듯했다. 그의 눈앞에 하얀 돌 줄기가 환상처럼 길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한두 길 물밑까지 마침내 진짜 돌둑이 솟아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작업선의 원생들은 조 원장의 배를 뒤따르며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댔다. “조 원장 만세!” “오마도 개척단 만세!” 오랜만에 「소록도의 노래」를 합창했다.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와중에 냉정을 잃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황 장로였다. 그는 원장에게 앞장서서 둑을 건너라는 이상한 제안을 했다. 그렇게 원장을 시작으로 모두가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했다. 드디어 바다를 이겼다. 그것은 바다보다도 더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5천 문둥이의 영혼을 되살려낸 개선의 행진이었다. 차가운 바닷물 속의 행진이었다.
[배반 1]
21. 시발(始發)
투석 작업이 일단락되고 솟아오른 돌둑 위로 흙을 돋워 올리는 성토 작업이 시작되었다. 돌둑은 거센 파도를 견디면서 하루하루 안쪽 벽이 두꺼워져 갔다. 일을 한 만큼 작업성과가 눈에 보였다. 사기는 높아졌고, 작업 진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러던 7월의 어느 날이었다. 태풍철이 시작될 시기였다. 모두 걱정을 하면서도 대비책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단지 태풍철로 접어들기 전에 방둑을 튼튼하게 만들거나 큰 바람이 일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거의 다 넘겨가고 있는가 싶던 9월 초순, 라디오 뉴스에서 태풍 소식이 가차 없이 전해져 왔다. 원장이 뜬눈으로 밤을 지키며 빌었으나, 그런 바람을 비웃듯이 자정 이후로 세찬 바람기에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사장 원생들은 사흘 밤낮을 잠 한숨 자지 않고 폭풍 속에서 방둑을 지키며 바람이 물러가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결국 방둑은 흔적도 없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배반극의 첫 시발(始發)이었다. 이 엄청난 자연의 배반에 원장은 원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랬다. 원장은 자신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올랐고, 자연의 횡포를 견뎌 이겨내고 난 자신의 모습을 보고자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원생들은 따르지 않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고흥 땅에 들어선 원장은 심상치 않은 소문 하나를 듣게 된다. ‘오래지 않아 소록도 병원장이 갈리어 지금의 조 원장은 곧 섬을 떠나게 되리라.’ 소문의 표적은 원장이 아니라 오마도 간척 사업장이 목적이었다. 섬 밖 사람들이 사업장을 빼앗고자 하는 것이었다. 바다가 농토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제 육지 사람들도 확인했다. 섬으로 돌아온 원장은 이를 원생들에게 말해주며, 방둑을 다시 솟아오르게 만들자고 했다.
22. 귀신 소동
공사를 중단했던 섬사람들이 다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또 한 해가 바뀌어갈 무렵 사라졌던 방둑이 다시 솟아올라왔다. 하지만 열흘도 지나지 않아 다시 가라앉아버렸다. 그럼에도 인내심을 발휘하며 원생들은 일을 했고, 김칫국을 마시던 사람들만 난처해졌다. 그러면서 원장과 공사장에 대한 반갑잖은 소문들이 더욱 활기를 더해갔다. 사태가 제법 심각했다. 원장은 곧 대응책을 마련했다. 장로회로 하여금 원생들의 새로운 여론을 발의시키도록 유도했다. 투석 작업은 계속되었고,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점차 자연과의 싸움 자체에 대한 원생들의 집념이 쌓여갔다. 하지만 싸움이 계속되면 먼저 지치는 것은 인간들이다. 그러다 보면 터무니없는 곳에까지 의지의 손길을 뻗치게 마련인데, 한 번은 채토장의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작업 인부 열 명이 한꺼번에 깔려버린 사고가 있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나오자 작업장의 사기는 급속도로 저하되었고, 기력이 다한 원생들 사이에서 미신과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귀신들이 방해를 놓고 있는 한, 일은 몇 해를 더 끌어가더라도 사람만 자꾸 상하게 할 뿐이야.” 원생들의 귀신 공포증이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던 중, 마침내 원생들의 소문 속 끔찍스러운 음모의 정체가 드러났다. 어느 날 저녁, 원장의 오마도 작업 지휘 막사로 상욱이 살인극을 저지르려던 인부 세 사람을 끌고 들어왔다. 죽이려던 이유가 방둑이 가라앉는 것을 단순한 침하 현상으로 보지 않고 ‘오마도 바다귀신’ 때문이라 그들에게 다섯 명의 산목숨을 바치기 위해서였단다. 이 일로 원장은 지시문을 작성했다. 어느 때보다도 강경하고 혹독한 협박이 곁들인 일종의 선전 포고문과도 같은.
23. 제물
침하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고, 원생들은 불평 없이 일을 했다. 사고가 일어난 날도 공사장 원생들은 동요의 빛이 없었다. 어느 날, 다시 채토장 붕괴 사고가 일어나 흙더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체가 나왔다. 오마도 물귀신이 생사람을 원한다면 벌써 네 명, 이제 한 명 남았다. 그럼에도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공사장은 평온했다. 자연의 횡포에 이은 인간들의 두 번째 배반극의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원장은 섬 관사로 돌아온 날, 병원 직원이 헐레벌떡 다가와 몸을 피하라고 했다. 오마도 물귀신의 마지막 제물로 원장을 바치고자 원생들이 횃불과 공구들을 하나씩 움켜쥐고 찾아오고 있었다. 그 급박함 속 황 노인이 원장 앞에 나타났다. 원생들은 일시에 소란을 멈추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황 노인은 이야기를 했다. ‘섬을 문둥이들의 천국으로 만드는 것은 ’ 주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원장이 약속을 어떻게 지켜주는가를 지켜보러 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 문둥이들이 일을 하며 피를 흘린 만큼 원장은 자신의 일을 위해 피를 흘린 일이 없었다고 하자, 원장이 자신에게 총을 쏘라 권했고, 이에 황 노인은 ‘원장의 약속은 스스로 지키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본인에게 직접 쏘라는 말이었다. 이에 원장은 권총을 황 장로 앞으로 던지며 정확하게 쏘라 말했다. 황 장로가 총을 집으려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서 있던 그때, 어둠 속에서 상욱이 나타나 소리쳤다. “무엇이 두려워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원장과 원생들 모두에게 욕을 하던 상욱을 보며 황 장로는 오늘은 탄환을 아껴두자고 하며 언덕길을 내려갔고, 그 뒤를 원생들이 소리 없이 뒤따랐다. 상욱도. 원장만이 우두커니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며 오마도로 건너가는 원생들의 횃불을 넋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24. 빼앗기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중, 오마도 간척 사업장으로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원장을 찾아왔다. 그들의 소속은 대한정착사업개발회, 도(道) 당국 관계 부서의 의뢰에 따라 실적 평가와 기술 조사를 위해서랬다. 원장은 이것이 자신들의 사업장을 빼앗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인지했다. 도청 쪽에서 자신들을 향해 자상하게 관심을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선거철’이 진행되면서 투표권이 생긴 섬사람들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선거구 안의 투표 결과는 원생들의 것만으로 결판나지 않고, 호시탐탐 사업장을 탐내는 섬 바깥사람들이 자신들이 지닌 표 수의 위력을 내세우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윗선에서 그 누구도 도움이 되는 자가 없었고, 원장이 마지막 기대로 걸어볼 곳은 섬사람들뿐이었다. 급히 장로회 사람들을 만나 모든 사정에 대해 자극적인 소리를 덧붙이며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장로들은 입에 바른 격려나 위로 말 한마디 없이 담담한 얼굴로 나가버렸으나, 원장의 기대와 호소가 결코 부질없는 헛수고는 아니었다. 오마도 공사장에 사업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원생들의 집념과 복수심으로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무서운 작업열이 폭발했다. 원장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바깥에서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 원장은 마산에 있는 어떤 국립 요양원으로 발령이 났고, 새로운 원장의 병원 부임이 확정되었다.
[배반 2]
25. 섬을 떠나 주세요
원장은 전임일 이전까지 한시라도 빨리 작업을 끝내고자 했다. 그리고 황 장로에게 자신이 섬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는 것과 원생들 손으로 오마도 간척 공사가 마무리 지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장이 병원 원장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인 3월 6일로 절강제 날짜를 정했다. 오마도 사업장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더불어 원장의 전임설까지 알려지니 원생들의 작업열에 또 한 차례의 점화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욱이 원장을 찾아왔다. 사실 원장은 섬사람들의 습격을 당했을 당시와 그 후 상욱의 모습 때문에 그를 방 안으로 들여앉히고 나서도 계속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상욱은 원생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장의 전임 발령 취소하라는 청원 서명 작업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한 마디로 원장에게 섬을 떠나 달라는 말이다. 원장이 생각이 없더라도 원생들 사이에서 동상을 세울 준비를 끝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욱은 바라고 있었다. 동상이 세워지더라도 원장만을 위한 동상이 아닌 섬 5천 명의 환자 자신들을 위한 동상이 될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장이 섬을 떠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과 원장으로 해서 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모두 이루어져버리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며 상욱은 원장에게 섬을 떠나 달라고 말했다.
26. 탈출, 그리고 질투
원장은 상욱의 뜻대로 작업 계획표나 자신의 생각을 변경할 의사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 뒤, 상욱은 홀연히 섬을 떠났다. 옛날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구북리 돌부리 해변가의 차가운 밤바닷물로 뛰어들어 그로서 목숨까지 함께 내걸어야 했을 이상한 방법으로 불편스럽게 섬을 나갔다. 상욱은 입원 환자가 아닌 병원 요원으로 언제든지 떳떳하게 나루를 건널 수 있었음에도 내력 깊은 돌부리 해변가를 통해 섬을 나갔다. 또 하나의 ‘탈출 사건’이었다. 상욱의 탈출은 언제라도 섬을 버리고 떠나갈 수 있는 건강인으로서 섬을 빠져 달아났다는 고약한 여운을 남겼고, 전임 발령 취소 청원 서명 운동을 중지시키자 원생들은 원장의 일거일동에 색안경을 쓰고 보기 시작했다. 와중에 서미연과의 사이가 제법 바람직스럽게 무르익어가던 윤해원의 건강인들에 대한 질투가 폭발하며 병적인 분홍색 집착증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서미연은 결혼이 허공의 꿈으로 사라져 버린 순간에도 윤해원이 건강인들에 대한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리겠다고... 그녀의 내력을 고백하며 윤해원의 맹목적인 질투를 녹여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원장의 조언에 대해 대답했다. 어쨌든 상욱의 탈출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의 탈출극이 계기가 되어 섬 안은 이제 그런 식의 불신과 반발들로 또 한 번의 엄청난 파괴를 꿈꾸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원장은 전임 날짜만을 기다릴 수도, 섬을 그냥 떠나버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
27. 무관심
원장에게 전화 통지문이 한 통 하달되어 왔다. ‘새 원장 부임 시 오마도 사업장 업무 인계를 위한 사전 준비를 모두 끝내놓으라.‘ ’ 공사 실적 평가반을 파견할 시 이들의 업무 수행에 만유감 없는 협조를 바란다.‘ 공사 실적 평가반이 앞서 개발회 사람들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장으로서도 이제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손을 쓸 여지가 없는 형편이었다. 상부의 명령에 맞서 싸울 길이 없었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 마냥 원생들에게 간곡히 자숙을 당부했다. 원장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원생들은 무관심했다. 이를테면 오마도를 지키든 빼앗기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이와 달리 문제는 평가반 사람들의 횡포였다. 원장은 그들에게는 공정도 평가를 끝내도록 주문하고, 자체 평가반 요원을 구성하여 나름대로의 기술적 기준을 마련하며 진행해 나갔다. 시간이 흘러 2월 하순경이 되자, 양쪽 평가반에서 내놓은 공사 실적 평가는 놀라웠다. 원장 지휘하의 개척단 평가반은 83%, 개발회 소속 평가반은 40%. 원장은 개발회 쪽의 평가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양쪽의 입장이 상충하고 있는 와중에 원장의 기분을 더 허망스럽게 만드는 것은 원생들의 태도였다. 섬에 관련된 그 어떠한 일에도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엿보이지 않고 있었고, 아무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원생들의 그런 침묵과 무반응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던 원장으로서도 이번만은 서운했고 허탈했고 두려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원장은 자신의 처지만 점점 더 초라해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28. 사랑
전임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3월 초순의 어느 날, 원장은 작업 지휘소가 있는 오마 고지 둔덕으로 올라가 묵묵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망연스런 심정으로 헛된 상념들을 좇고 있을 때, 황 장로가 찾아왔다. 그는 말했다. 소박하고 겸손한 위인이었던 원장이 지금은 화려하게 섬을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탈출 사고 전날에 상욱이 자신을 찾아와서 동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고. 그러면서 모두가 자기 맘 깊은 곳에 각자 나름의 동상을 지을 꿈을 지니고 있는 와중에 원장만이 남의 손으로 지으려 하지 않았기에 원생들이 스스로 원장의 동상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를 상욱은 원장의 동상에 종이 되는 길이라고 용납을 하려 들지 않으려 했었으나 자신은 점점 원상의 동상이 무섭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듣고 있던 원장은 자신이 왜 용서받지 못한 몸으로 섬을 떠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의 심경을 황 장로에게 털어놓았다. 그것이 자신들이 하느님과 사람의 역사를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황 장로는 답했다.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지 못해 미움과 의심으로 행할 수밖에 없었다. 섬사람들은 그 어떤 사랑도 없이 ‘자유’로 행함밖에 없었다. 자유보다도 귀하고 값진 사랑이란 것을 행하지 못했다. 자유보다는 사랑이고, 사랑을 하면 자유를 얻는다. 문둥이들은 믿음 없이 억지 자유만을 하자니 불신과 미움만이 번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다시 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황 장로는 끝으로 덧붙였다. “지금 와서 보면 원장이 이 섬에서 행해온 것은 모두가 사랑으로 해서였던 게란 말이야. 그 원장을, 원장과 함께 사랑으로 행할 수 없었던 못난 문둥이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게야.... 그건 아마 모처럼 이 섬에 남겨진 사랑의 동상이 될 게야.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이 섬에선 그래도 처음으로 제 손으로 제가 지어 지니게 될 그런 동상, 아무도 목을 매어 끌어내리고 싶어 할 자가 없는, 이 섬이 우리 문둥이들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오래오래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단 하나의 사랑의 동상으로 말씀야......”
[천국의 울타리]
29. 돌아왔다
원장이 섬을 떠나간 지도 7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강산이 절반은 훨씬 변했어야 할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섬은 변화가 없었다. 바뀌고 변한 것은 사람들뿐이었다. 오마도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이른 봄에 섬에는 낯익은 손님, 『C일보』의 이정태 기자가 찾아왔다. 벚꽃 피는 봄을 맞아 건강인 처녀와 음성 병력자 총각 사이에 드물게 보는 혼인 잔치를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진짜 방문의 목적은 두 남녀의 중매인 겸 후견인 노릇을 해온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로 조백헌 원장이었다. 마산 쪽 병원 일이 맞지 않던 중, 그보다 한 발 앞서 섬을 버리고 갔던 상욱의 편지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개인 조백헌’의 신분으로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지 벌써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상태였고, 모처럼 만난 이정태 기자를 조 원장은 반갑게 맞이했다.
30. 미치다
이정태 기자와 조 원장은 술귀신들처럼 술잔을 비워대기 시작했다. 이정태가 보기에 원장은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유쾌하고 호탕스러워졌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로 원장이 유쾌해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이 기자는 알고 있었다. 원장의 광기 속에서 그의 소망과 외로움이 보였다. 술이 적당히 취한 원장은 이정태를 이 형이라 부르며 고목나무뿌리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원장의 곁에 아무도 없어서 싸움에 지치고 나면 혼자서라도 말을 해야 해서 고목나무뿌리와 말을 한다고 말이다. 그를 보며 이정태는 마침내 참고 있던 한마디를 뱉어버리고 말았다. “원장님은 이제 무엇엔가 잔뜩 미쳐가고 계신 것 같군요.” 그리고 오히려 이런 원장의 모습을 개인적으로 다행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정태는 섬과 원장에 대해 이상하게 거북한 빚을 한 가지 가지고 있었다. 오마도 공사를 시작했을 당시, 이정태는 원생들이 무섭게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원장의 말과 반대인 공사는 결국 성공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글을 작성했었다. 공사가 잘 되지 않은 지금, 이것은 이정태의 난처한 숙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숙제를 풀 수 있는 방법 즉, 글 안에서 원장을 구해줄 방법이 이정태는 떠올랐다.
31. 실패
원장은 섬의 모습을 보며 어떤 모습으로 실패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라고 이정태에게 섬 안내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정태가 본 섬은 듣기보다 평화롭고, 생각으로 알기보단 행복해 보였다. 외관이 변한 것은 아니나, 섬사람들의 풍속과 생활 질서가 변했다. 건강 지대와 병사 지대를 갈라놓은 철조망이 사라져 있었다. 휴게실에서도, 나룻배에서도, 모든 곳에서 원생들과 건강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 모든 변화는 현재 병원 원장이 건강인들의 병에 대한 이해와 선입견을 씻어주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조 원장은 말했다. 섬은 실상 이제까지 수십 년 동안 ‘원장’ 한 사람의 일사불란한 통제와 규제에 의해 다스려져 왔다. 하지만 지금 통제가 아닌 조화에 의해서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고 있었다. 이 섬을 지금까지 지탱해 온 획일적인 지배 질서로부터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해방의 징후였다. 그렇기에 이번 서미연과 윤해원의 결혼 잔치가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건강인과 원생 사이의 정식 결혼이었다. 이 둘을 거의 이어준 것이 조 원장이었다. 하지만 요즘 윤해원이 혼인식 전에 단종수술을 시켜주지 않는다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조르고 있었다. 원장은 이를 해줄 수도 안 해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윤해원의 이 반발이 뿌리 깊은 불신과 섬에 대한 절망감을 내포하고 있어 수술을 해준다면 현실의 실패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병원의 참상을 보여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섬의 깊은 현실을 이정태에게 보여주었다. 모든 기관이 마비된 환자, 하나의 눈이나 하나의 귀로 모든 지각 활동을 대신하는 사람들, 안면이 흔적도 없이 짓물러버린 사람들...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기도하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에서 이정태는 형언하기 어려운 이상스러운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후손들을 위해 신경 써야 하는 미래보다 당장의 현실이 그들의 삶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가 절실한 섬의 참모습이자 현실의 실패였다.
32. 상욱의 편지
섬 안내가 끝나고 난 후, 이정태는 섬의 첫 밤을 조 원장이 미리 정해준 구라회관 숙소에서 혼자 지냈다. 그리고 혼자서 다시 숙소를 나가려던 참에, 어떻게 알았는지 원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다. 이정태가 혼일 할 서미연과 윤해원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음을 알고 원장이 막은 것이다. 그 둘의 결합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환자와 건강인의 구분을 염두에 둔 선입견의 소산이라는 식으로 보일 수 있다며 취재하러 가는 대신 이정태에게 웬 편지 봉투 하나를 읽어보라며 건네주었다. 그것은 상욱의 편지였다. 편지는 두 가지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섬을 떠난 지 5년 만에 마산병원의 조 원장에게 써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욱이 7년 전 원장을 한 발 앞서 섬을 나갈 때부터 이미 써 지니고 다니던 것을 뒤늦게 함께 동봉해 온 것이었다. 첫 번째 편지 내용은 조 원장을 괴롭혔던 그날의 사죄 내용과 늦게나마 탈출의 이유와 심경을 밝히고 있었다. 원장과 섬사람들의 운명과 길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편지에 적어 알렸다. 두 번째 편지는 첫 번째 것보다 내용이 더 가파르고 길었다.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원장이 섬 안에서 원생들을 위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은 원장의 천국이다. 원장이 섬 위에서 꾸미고 있는 나환자의 천국이 진정한 그들의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섬 안의 철조망을 제거하였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다.’
‘미래의 선택이 열려 있지 않는 한 현실은 누구에게도 천국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이다. 진정한 천국이라면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하고, 적어도 어느 땐가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장이 꿈꾸던 문둥이들의 천국은 실상 원생들의 천국이 아니라 원장이 일방적으로 점지해주고 싶어 한 천국일 뿐이다. 그 천국을 만들기 위한 완벽함이 오히려 그것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숨 막히는 지옥이 되어버릴 수 있다.’
‘환자와 인간의 구분. 섬을 나가래도 나갈 수 없는 자들은 환자 쪽이다. 바깥세상으로부터 쫓겨 들어왔고, 병원 당국은 다시 섬을 나갈 용기가 나지 않도록 바깥세상에 대한 끝없는 원망과 저주와 두려움을 길러준다. 그렇게 섬을 빠져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철저한 ’ 환자‘로 길들여진다. 하지만 그들도 환자에서 해방을 꿈꿀 때가 있다. 환자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깊은 생존의 충동에 따라 섬을 벗어나고자 탈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
‘원장이 섬 위에 세우고 있는 천국은 환자다운 환자들에게만 천국일 수 있는 천국, 환자로서의 불행을 스스로 수락하는 체념 위에서라야 비로소 천국일 수 있는 천국, 오직 그런 뜻의 천국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이 섬 위에 일사불란하게 원장의 천국을 완성해내려 하지 마라. 그것을 완성해 내고서야 섬을 떠나려고 하지 마라.’
‘원생들은 천국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그 천국의 모든 축복을 누려버렸다. 섬을 다스려온 분들은 섬사람들을 달래고 설복시키기 위해 전부터 자주 천국의 축복을 ’ 가불‘애주는 버릇이 있었다.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람들이 미래에 있는 천국의 꿈에 취하게 하여 그들을 손쉽게 지배했다.... 원장이 없으면 안 되는, 원장만이 이 섬을 위하고, 원장에게서만 진실로 그 천국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섬을 추악한 문둥이들의 수용소로 만들 뿐이다.’
33. 운명을 함께 하다
상욱의 편지를 다 읽은 이정태는 원장이 이렇게까지 심한 공박을 당해야 할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섬사람들의 자유로 행함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던 황 장로 덕택에 입장의 차이에 대해 원장은 이해하고 있었다. 다스림을 받는 입장인 원생들은 숙명적으로 자유로밖에 행할 길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다스리는 원장의 몫은 자연히 사랑 쪽이어야 한다고 원장은 생각했었다. 하지만 믿음을 얻지 못했고, 그렇기에 섬을 떠나야 했다. 떠난 다음 찾아낸 해답은 바로 ‘공동 운명’이었다. 믿음은 오로지 그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데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섬 주민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조백헌 원장은 믿음을 얻지 못했다.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힘’이 필요하다. 힘이 없는 자유와 사랑은 듣기 좋은 허사에 불과했다. 믿음이나 공동 운명 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를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원장은 말했다. 하지만 원장은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운명을 함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섬에 그런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원장은 기다린다. 운명을 합하기 위한 일이 어렵다 하더라도.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믿음 속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거기서부터 하나하나 힘을 모아 무엇인가를 이루어나가고자 한다. 그 출발점을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으로 원장은 보고 있다.
34. 결혼식
4월 1일, 마침내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근심거리였던 윤해원의 수술 건을 사전에 조용히 해결을 했기에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병원에서 더 이상 문둥이들에게 단종수술을 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윤해원에게서는 혼전 수술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약속이었지만 원장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식이 거행될 11시가 가까워질 무렵, 이정태도 서서히 식장으로 가기 위해 숙소를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 원장이 아직 시작에 내려간 기미가 없었다. 그를 찾아서 원장의 숙사로 간 이정태는 참으로 예기치 못한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원장의 방 안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상욱이었다. 그는 이정태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고, 이정태는 기척을 죽이고 함께 동정을 살폈다. 원장은 방 안에서 축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에 제법 열기가 오르고 있는 원장을 방해할 수도 없었고, 그런 원장을 호기심과 긴장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욱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냥 이정태는 상욱과 함께 기다리며 원장의 축사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합으로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았던 오마도의 방둑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진정 어린 찬사와 경의를 표하는 원장의 모습에 긴장하고 있던 상욱의 얼굴 위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한 가닥 떠오르고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 소리를 한층 드높여 힘 있게 다짐하는 원장의 축사 연습은 좀처럼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였다. 상욱의 미소도 여전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이날의 혼익식에 어차피 시간이 늦을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혼인 잔치를 보기 위해 나루를 건너온 육지 사람들이 아직도 벚꽃이 만발한 중앙리 예식장 쪽 길을 유랑민처럼 줄줄이 떼 지어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원장은 자신이 이미 식장의 시간에 늦은 사실조차 모르고 능청스러운 축사 연습을 계속했다. 그렇게 드디어 윤해원과 서미연 두 사람에 대한 그의 당부라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두 분의 결합과 정착지를 시발점으로 하여 하루빨리 이 섬에서부터 두 마을이 하나로 합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분의 정착지가 하루빨리 새로운 마을로 번창하여 이 섬 안엔 건강 지대와 병사 지대가 따로 없는 하나의 마을로 채워지기를 빕니다. 이제 두 사람으로 해서 그 오랜 둑길이 이어지고 길이 뚫렸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이웃은 힘을 합해 그 길을 지키고 넓혀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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