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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해석

EnerTravel 2023. 6. 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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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열하일기』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저자소개

 

1) 연암, 그리고 다산

 

연암 박지원 하면 실학사상이 떠오른다. 실학 사상하면 자연스럽게 다산 정약용도 연상된다. 흔히는 연암과 다산을 유사하게 엮어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둘은 여러모로 달랐다. 연암은 노론 명망가에서 태어나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프리랜서 생활을 했다. 반면 다산은 남인출신으로 과거를 공부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때마침 정조가 탕평책을 피던 시기와 맞물려 중용될 수 있었다. 고미숙은 이를 보고 “연암은 원심력을 가지고 권력에서 멀어지려 했고, 다산은 구심력을 가지고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라고 평가했다.

 

연암이 처음부터 과거를 포기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많은 부분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양반의 숫자가 급증하던 시기로 과거를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니 과거를 치를 때마다 응시자가 수만 명이나 되어 아수라장이 열리곤 했다. 격식과 규격을 싫어하던 연암에게 과거 제도는 고문이었다.

 

2) 연암, 우울증을 앓다

 

연암은 청년 시절 우울증을 앓았다. 거식증과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이었다. 고미숙은 우울증이란 자기와의 소외에서 발병하는 자본주의 이후에 탄생한 병이라 진단했다. 과거에는 설령 굶주려는 죽어도 자기에게 소외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부자체의 욕망에 치우치며 자기 소외가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대 사람이 아니었던 연암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연암은 어떤 방식으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노론 명망가의 자재였던 만큼 좋은 약을 구해 먹고 좋아진 건 아니었을까? 연암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저자거리로 나섰다. 그곳에서 연암은 분뇨장수, 이야기꾼, 도사, 건달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요즘의 철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타자와의 접속을 시도한 셈이다. 연암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병을 치료함은 물론이고, 방경각외전이란 소설집을 써서 명성을 획득했다.

 

3) 연암, 백탑파를 만들다.

 

연암은 과거를 포기했다. 특정한 직업도 없었다. 30대의 연암은 백탑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연암은 친구들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고 사색했다.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부도 명예도 없었지만, 벗이 있었기에 연암의 30대는 행복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오래가진 못했다. 당시의 권력자였던 홍국영은 연암을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연암은 홍국영의 위험을 피해서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홍국영이 실각하고 연암은 서울로 돌아왔지만, 백탑파는 이미 해산한 이후였다. 죽은 이도 있었고, 생계가 어려워 시골로 내려간 이도 있었다. 하지만 연암에게 새로운 행운이 찾아왔다. 팔촌형 박명원이 건륭제의 만수절 (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임명된 것이다. 덕분에 연암은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나온 글이 바로 열하일기다.

 

4) 유머러스한 열하일기

 

기본적으로 연암은 웃음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연암은 옥전현이라는 마을에 들렀는데, 마을 점포에서 너무나도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동행한 정진사를 불러다가 열심히 베꼈다. 하지만 연암이 베낀 부분과 정진사가 베낀 부분이 앞뒤가 맞지 않았고, 결국 연암은 조금 손을 봐서 열하일기에 싣는다. 그 유명한 호질의 탄생 비화다.

 

연암이 하도 열심히 글을 베끼자 점포 주인은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은 이걸 베껴 대체 무얼 하시려오?” 그러자 연암은 답했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외다.” 즉, 남을 웃기기 위해서 그 고생을 한 셈이다.

 

하지만 연암의 글은 재미있어서 문제였다. 정조는 고문의 위엄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이유로 연암의 글을 싫어했다. 웃음을 막으려고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인 모양이다.

 

책의 배경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책으로서 당시 중국을 통일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던 청나라에서 겪은 일을 여행기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조선 정조 때 저술되었는데 정조 재위년(1776 ~ 1800)은 청나라의 최고 전성기의 황제인 청나라 고종(건륭제, 재위 1735 ~ 1795)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이른바 "강건성세"(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를 아우르는 청의 최고 전성시대를 말함) 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청나라의 문화 및 정치 격변 등을 기반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실학의 이용후생(중상주의 철학) 학파도 여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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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수단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비판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는 청의 털모자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열하일기 판본에 따른 목차

 

1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 14 경개록(傾蓋錄)
2 성경잡지(盛京雜識) 15 황교문답(黃敎問答)
3 일신수필(馹汛隨筆) 16 행재잡록(行在雜錄)
4 관내정사(關內程史) 17 반선시말(班禪始末)
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18 희본명목(戱本名目)
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19 찰십륜포(札什倫布)
7 구외이문(口外異聞) 20 망양록(忘羊錄)
8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21 심세편(審勢編)
9 금료소초(金蓼小鈔) 22 곡정필담(鵠汀筆譚)
10 옥갑야화(玉匣夜話) 23 동란섭필(銅蘭涉筆)
11 황도기략(黃圖紀略) 24 산장잡기(山莊雜記)
12 알성퇴술(謁聖退述) 25 환희기(幻戱記)
13 앙엽기(盎葉記) 26 피서록(避暑錄)

 

연행 기간

 

1780년 5월 25일 서울출발624압록강 도강 81북경도착 89열하도착 820북경도착 → 9월 18일 북경출발 → 10월 27일 서울도착

󰡔열하일기󰡕 각편 날짜와 기간 이동 장소 이동거리(하루평균)
도강록 6.24 ~ 7.9 (15일) 압록강-요양 501리(33.4리)
성경잡지 7.10 ~ 7.14 (5일) 십리하-소흑산 327리(65.4리)
일신수필 7.15 ~ 7.23 (9일) 신광녕-산해관 562리(62.4리)
관내정사 7.24 ~ 8.4 (11일) 산해관-북경 640리(58.2리)
막북행정록 8.5 ~ 8.9 (4.5일) 북경-열하 약456리(101.3리)
태학유관록 8.9 ~ 8.14 (5.5일) 열하
환연도중록 8.15 ~ 8.20 (6일) 열하-북경 약456리(76리)
합 계 6.24 ~ 7.9 (57일) 사행로 약2,942리(57.1리)

*1=0.4km

 

내용 요약(줄거리)

 

도강록

 

624

오후에 다섯 척 배에 나눠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강기슭인 줄 알고, 섬에 내렸다가 다시 떠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0리를 가서 애자하에 도착했다. 되사람에게 업혀서 애자하를 건넜다. 20리를 더 가 구련성에 도착했다. 장막을 치고 풀밭에서 노숙했다. 병이 중한 역관 김진하는 함께 가지 못하고 뒤떨어졌다.

 

625

간밤 비에 젖은 옷과 이불을 내다 말리고 낚시를 했다. 방물이 도착하지 않아 구련성에서 또 노숙했다.

 

626

구련성을 출발하여 금석산에서 점심을 먹고 30리 더 가 총수에서 노숙했다. 상판사 마두 득룡이가 강세작 이야기를 한참 했다.

 

627

날이 새기 전에 길을 떠나 30리를 더 가 책문에 이르렀다. 장복이가 부담 주머니의 왼쪽 자물쇠를 잃어버렸다. 중국 동쪽 끝 벽지인 책문의 문물들을 보고, 선진 문물에 대한 질투심에 몸이 후끈해졌다. 악가 성 가진 사람 집에서 묵었다.

압록강에서 책문까지 모두 120리였다.

 

628

봉황성까지 가서 강영태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벽돌 쌓는 법, 기와 이는 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봉황성을 새로 쌓는 것을 보면서, 평양과 패수의 자리를 놓고 설명한 뒤, 세간에서 이 성을 안시성이라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정 진사와 성 쌓는 법을 두고 얘기하다가 벽돌이 나으니, 돌이 나으니 논쟁을 하다 보니 정 진사는 말 탄 채 졸고 있었다.

모두 70리를 가서 송점에 묵었다.

 

629

배를 타고 삼가를 건넜다. 말은 모두 헤엄쳐 건넜다. 또다시 배로 유가하를 건너 황하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당포에서 차 한 잔을 마셨다. 이날 50리를 가 통원보에서 묵었다.

 

71~ 5

비가 많이 와서 통원보에서 계속 머뭄.

 

76

냇물이 줄어서 정사의 가마를 같이 타고 건넜다. 초하구에서 점심을 먹고 분수령, 고가령, 유가령을 넘어 연산관에 와서 잤다. 꿈에 형님 댁까지 다녀왔다.

이날 모두 60리를 왔다.

 

77

말을 탄 채로 물을 건너는데, 물살이 급해서 떨어질 뻔했다. 마운령을 넘어 천수참에 와 점심을 먹고, 청석령을 넘었다. 우대령을 넘어 전부 80리를 갔다. 낭자산에서 잤다.

 

78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를 건너 냉정에서 아침을 먹고, 요동벌에 이르러 ‘한바탕 울 만한 자리’라고 감탄을 하였다. 고려총, 아미장을 지나 구요양에 들었다. 구요양을 보고 감탄한 내용은 구요동 견문기에 자세히 썼다. 태자하를 지나 신요 양 영수사에서 묵었다.

이날 전부 70리를 왔다.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관제묘기(關帝廟記), 광우사기(廣祐寺記)

 

79

새벽같이 길을 떠났다. 정가대, 삼도파를 지나 난니보에서 점심을 먹었다. 처음으로 한족 여자들을 보았다. 만교보, 연대하, 산요포를 지나 십리하에서 묵었다.

이날 50리를 왔다.

 

성경잡지

 

710

십리하에서 일찌감치 떠나 판교보, 장성점, 사하보, 포교와자, 전장포, 화소교를 지나 백탑보까지 40리를 와서 점심을 먹었다. 일소대, 홍화포를 지나 배로 혼하를 건너 심양에 들어갔다. 이날 모두 합해 60리를 와서 심양에서 묵었다.

심양 행궁을 둘러보고, 술집에서 술 한잔 걸치고는 골동품 가게 예속재와 비단 가게 가상루에 들렀다. 저녁을 먹고 달밤에 가상루에 가서 여러 사람들과 머물다 예속재에 와서 날이 밝도록 놀았다.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는 속재필담(粟齋筆談)’에 담았다.

 

711

일어나자마자 다시 예속재로 갔다. 도중에 내원이 일행을 만나 돌아왔다가 밤이 되어 다시 가상루에 가려는데 수역이 펄펄 뛰어 함께 가지는 못하고, 장복이에게 “혹시나 누가 나를 찾거든 뒷간에 갔다고 대답을 해라.” 하고 당부해 놓고 몰래 나갔다. 가상루에서 밤을 새고, 새벽에 들어갔다. 가상루에서 나눈 이야기는 상루필담(商樓筆談)’에 담았다.

 

712

아침 일찍 전사가에게 골동 목록을 받아 들고 심양을 떠났다. 심양에서 원당, 탑원, 방사촌, 장원교, 영안교, 쌍가자를 거쳐 대방신까지 45리를 갔다. 대방신에서 점심을 먹고 마도교, 변성, 흥륭점, 고가자까지 또 40리를 가 모두 85리를 갔다. 고가자에서 묵었다.

이틀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가는 내내 말 위에서 잠을 잤다. 자느라 약대(낙타)를 보지 못해서 아주 아쉬웠다. 골동이야기(古董錄)

 

713

꼭두새벽에 일어나 출발했다. 세수하고 머리 빗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귀찮아졌다.

고가자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거류하, 거류하보, 비점자, 오도하, 사방대, 곽가둔, 신민둔을 지나 소황기보에서 점심을 먹었다. 대황기보, 유하구, 석사자, 영방을 거쳐 백기보까지 왔다. 이날은 모두 82리를 갔다.

신민둔의 전당포 주인에게 ‘기상새설(欺霜賽雪)’을 써 주어 망신살이 뻗쳤다.

늙다리 참외 장수가 일행이 훔치지도 않은 참외 값을 달라 하여 백 푼 돈을 빼앗겼다.

 

714

소백기보, 평방, 일판문, 고산둔을 지나 이도정에서 점심을 먹었다. 은적사, 고가포, 고정자, 십강자, 연대를 지나 소흑산까지 모두 100리를 갔다.

십강자에서 잠시 쉴 때 상갓집 구경을 갔다가 난데없이 문상객 대접을 받아 당황했다. 소흑산에서 부인네 머리꽂이 파는 집에 들어가 다시 ‘기상새설’ 넉 자를 썼다가, 그제서야 밀가루 파는 집에서나 쓰는 말임을 알았다.

성경가람기(盛京伽籃記), 산천기략(山川奇略)

 

3> 일신수필

 

715

신새벽에 떠나 중안포에서 점심을 먹고, 일행보다 앞서 떠나 구광녕을 거쳐서 북진묘를 구경했다. 달밤에 길을 가서 신광녕에 도착했다. 북진묘까지 왕복 20리 다녀온 것까지 합해 이날 여정은 모두 90리였다. 북진묘기(北鎭廟記), 거제(車制), 희대(戱臺), 시사(市肆), 점사(店舍), 교량(橋梁)

중국에 와서 본 것 가운데 깨진 기와 조각과 냄새나는 똥거름이 최고 장관이었다.

 

716

변 주부, 내원과 함께 새벽에 먼저 떠났다. 길에서 해돋이를 보았다. 신광녕, 흥륭점, 쌍하보, 장진보, 상흥점, 삼대자를 지나 여양역에서 장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부터 용마루 없는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대자, 이대자, 삼대자, 사대자, 왕삼포를 지나 십삼산에 이르니 이날은 모두 80리를 왔다.

아홉 살 된 사효수를 보았으나 길이 바빠 그 집에 못 가 본 것이 애석했다.

 

717

아침에 십삼산을 떠나 독로포에서 배로 대릉하를 건넜다. 대릉하에서 묵었다. 이날은 30리밖에 못 왔다.

호행통관 쌍림이 여러 번 말을 걸었으나 상대를 하지 않다가 역관들이 좋은 꾀가 아니라 하여 쌍림의 수레를 함께 탔다. 대릉하까지 오는 동안 쌍림은 되지 않는 조선말로, 장복이는 어수룩한 중국말로 서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갔다.

 

718

새벽녘에 대릉하점을 떠나 사동비, 쌍양점, 소릉하를 거쳐 송산보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행산보, 십리하점, 고교보까지 모두 86리를 왔다.

 

719

새벽에 고교보를 떠나 탑산에 해돋이 구경을 갔으나 조금 늦어서 해가 떠 버린 뒤에야 도착했다. 주사하, 조라산점, 이대자를 지나 연산역에서 점심을 치르고, 오리하자, 노화상대, 쌍수포, 건시령, 다팽암을 거쳐 영원위에 도착했다. 이날 모두 62리를 왔다. 영원성 밖에서 묵었다.

조대수 패루와 조대락 패루를 구경했다.

 

720

새벽에 영원을 출발하여 천돈대, 조장역, 칠리파, 오리교를 지나 사하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갑자기 큰비가 쏟아져 비를 맞으면서 길을 갔다. 건구대, 연대하, 반납점, 망하점, 곡척하, 삼리교를 지나 동관역까지, 모두 60리를 왔다.

 

721

냇물이 불러 건너지 못하고 동관역에서 묵었다.

 

722

이정자, 육도하교를 지나 중후소에서 점심을 먹고 일대자, 이대자, 삼대자, 사하점, 섭가분, 구어하둔, 어하교를 지나 정사의 가마를 타고 석교하를 건너 전둔위에 이르렀다. 이날은 모두 64리를 왔다.

 

723

왕가대, 왕제구, 고령역, 송령구, 소송령을 지나 중전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대석교, 양수호, 노군점, 왕가점, 망부석, 이리점을 거쳐 산해관에 도착했다. 심하를 지나 배로 홍화포를 건너 이날은 홍화포에서 묵었다. 이날 모두 84리를 왔다.

강녀묘기(姜女廟記), 장대기(將臺記), 산해관기(山海關記)

 

관내정사

 

724

범가장에서 점심을 치르고 양하제, 대리영, 왕가령, 봉황점, 망해점, 심하역, 고포대, 왕가포, 마팽포를 거쳐 유관에 이르렀다. 이날 모두 68리를 왔다.

 

725

영가장, 상백석포, 하백석포, 오가장, 무녕현, 양장하, 오리포, 노가장, 시리포, 노봉구, 다팽암, 음마하를 거쳐 배음보에서 점심을 먹었다. 쌍망점, 요참, 달자영, 부락령, 노룡새, 여조, 누택원을 지나 영평부에서 묵었다. 이날 모두 89리를 왔다.

열상화보(洌上畵譜)

 

726

배로 청룡하를 건너고 남허장, 압자하 범가점을 지나 다시 배로 난하를 건넜다. 이제묘에서 점심을 먹고, 망부대, 안하점, 적홍포, 야계타, 사하보, 조장, 사하역까지 이르렀다. 이날은 모두 61리를 왔다. 사하역 성 밖에서 묵었다.

이날 이야기는 이제묘기(夷齊廟記)’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 사호석기(射虎石記)’를 썼다.

 

727

홍묘, 마포영, 칠가령, 신점포, 건초하, 왕가점, 장가장, 연화지를 지나 진자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 나절에는 어제 이제묘에서 먹은 고비 나물 때문에 속이 불편해 고생을 했다. 점심을 먹고는 재봉이와 상삼이를 따라 기녀 셋과 어울렸다. 술집에서 만난 왕용표가 여러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연돈산, 백초와, 철성감, 우란산포, 판교를 거쳐 풍윤현에 도착했다. 이날은 모두 100리를 와서 풍윤성 밖에서 묵었다. 호형항의 집에서 박제가가 써 놓은 이덕무의 시를 보았다.

 

728

새벽에 길을 떠나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고려보에 도착했다. 그곳 조선 사람들과 조선서온 사신 행차는 서로 원수 보듯이 하였다. 사하포, 조가장, 장가장, 환향하, 민가포, 노고장, 이가장을 지나 사류하에서 점심을 먹고, 양수교, 양가장, 이십리포, 십오리둔, 동팔리포, 용읍암을 거쳐 옥전현에 이르렀다. 이날 모두 80리를 와서 옥전성 밖에서 묵었다.

옥전현 심유붕의 집에 걸려 있던 호질(虎叱)’을 정 진사와 나누어 베껴 썼다.

 

729

서팔리보, 오리둔, 채정교, 대고수점, 소고수점, 봉산점, 별산점을 지나 송가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리점, 현교, 삼가방, 동오리교, 용지하, 계주성, 서오리교를 거쳐 방균점까지, 이날은 모두 97리를 왔다.

 

730

별산장, 곡가장, 용만자, 일류하, 현곡자, 호리장, 백간점, 단가점, 호타하, 삼하현을 지나 조림까지 와서 점심을 먹었다. 삼하현을 지날 때 홍대용에게 부탁받은 편지와 선물을 전해 주려고 손유의의 집을 찾았으나, 마침 산서에 가 있어서 보지 못했다.

백부도장, 신점, 황친점, 하점, 유하점, 마이핍을 거쳐 연교보까지 와서 묵었다. 이날 모두 83리를 왔다.

 

81

드디어 북경에 도착한 날이다. 사고장, 등가장, 호가장, 습가장, 노하, 통주, 영통교, 양가갑을 지나 관가장에서 점심을 먹고, 삼간방, 정부장, 대왕장, 태평장, 홍문, 시리보, 파리보, 신교, 동악묘, 조양문을 거쳐 서관에 들어갔다. 모두 63리를 왔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모두 33참에 2,030리였다.

 

82~ 4

북경에 머물렀다. 동악묘기(東岳廟記),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막북행정록

 

85

열하로 와서 황제의 만수절 행사에 참여하라는 명을 새벽에 받고, 삼사를 위시한 사행의 일부가 열하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이별하는 ‘곳’과 ‘때’에 대해 여러 가지로 썼다.

자금성을 끼고 열하로 출발해 손가장에 와서 묵었다. 동직문으로 잘못 들어서 수십리를 돌았다.

 

86

열하로 향한 지 이틀째. 동틀 무렵에 길을 나서서 순의현계를 지나 회유현계까지 왔다. 밀운성을 지나 계속 달리는데 골짝 물이 불어 넘쳐서 지현의 배웅을 받으며 밀운성으로 되돌아가 소씨네 집에 들었다. 밀운 지현이 준 밥이며 고기들은 되돌려 보냈다. 황제가 보낸 군기대신 복차산이 와서 9일 아침 전까지는 열하에 꼭 와야 한다고 말했다.

 

87

열하를 향해 달린지 사흘째. 목가곡에서 아침을 지어 먹고 남천문을 나섰다. 광형하를 건너 석갑성에서 저녁을 지어 먹었다. 이때 이야기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자세히 썼다.

다시 재를 넘고, 아슬아슬하게 물줄기를 아홉 번이나 건넜다. 이때 이야기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 자세히 썼다.

 

88

열하를 향해 달린 지 나흘째. 눈 한번 못 붙인 채 쉬지 못하고 말을 달렸다. 삼칸방을 거쳐 삼도량에서 잠시 쉬었다가 합라하를 건넜다. 밤에는 역참 화유구에서 머물렀다.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89일 오전

난하를 건너 10여 리 가니, 내시들이 와서 사신 일행이 어디쯤 왔나를 보고 돌아갔다. 드디어 열하에 도착했다.

 

태학유관록

 

89일 오후

열하에 들어, 태학에 머물렀다. 닷새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810

날이 새기 전에 피서산장에 들어갔다. 황제가 내리는 음식을 먹고, 먼저 밖으로 나와 황제의 여섯째 아들과 몽고 왕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황제가 초청해 찰십륜포에 머무르던 반선 라마를 예방하라는 황명을 받고 논란이 벌어졌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논하다가 날이 늦어 다음으로 미루었다.

 

811

술집에서 몽고 사람, 회회교 사람들과 찬 술을 호기롭게 들이켰다.

피서산장에서 황제를 알현한 뒤, 찰십륜포에서 반선 라마를 예방하고, 금불을 하사받았다.

 

812

황제가 피서산장의 권아승경전에서 반선 라마를 위해 베푼 연회를 담 너머로 구경하였다.

 

813

만수절 당일이다. 피서산장의 담박경성전에서 하례식에 참석한 후, 황제가 내린 여지즙을 술인 줄 알고 먹었다. 기풍액과 달을 보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풍액의 처소에서 늦게까지 황교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눈 이야기는 황교문답(黃敎問答)’반선시말(班禪始末)’, 망양록(忘羊錄)’에 자세히 썼다.

 

814

왕곡정과 시습재에서 악기 구경을 하고 나오다가 수백 필 말 떼를 만났다. 광동안찰사가 보낸 사람이 다녀갔고, 이제 그만 북경으로 돌아가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기풍액, 왕곡정, 학지정 등과 눈물로 이별했다.

 

환연도중록

 

815

열하를 떠났다.

광인점, 삼분구를 지나 쌍탑산에 이르렀다. 난하를 건너 하둔에서 묵었다. 이날 40리를 왔다.

 

816

왕가영에서 점심을 먹고 황포령을 지나다가 황제의 친조카 예왕을 만났다.

마권자에서 묵었다. 이날 80리를 왔다.

 

817

청석령을 지나 삼간방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 먹던 여관에서 술 취한 예왕을 만났다. 예왕과 황제의 손자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북구에 도착하여 관내 여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세 번째 관에서 절에 들렀는데, 오미자 때문에 봉변을 당했다.

열하로 갈 때에는 조느라 보지 못했던 약대 여러 마리를 보았다. 이날 80리를 왔다.

 

818

동틀 녘에 떠나 거화장과사자교를 지나 목가곡에서 점심을 먹었다. 석자령을 지나 백하 나루터에서 강을 건넜다. 반선 라마를 곱게 보지 않았다 하여 군기대신의 배웅도 없고, 낭중의 호송도 없고, 황제의 인사말도 없었다.

부마장에 이르러 성 밑 관에서 묵었다. 이날 65리를 왔다.

 

819

새벽에 회유현을 지나 남석교에서 점심을 먹었다.

임구를 지나 청하에서 묵었다.

 

820

북경으로 돌아온 날이다. 덕승문을 지나 남아 있던 일행들과 다시 만났다.

옥갑야화(玉匣夜話)’.

 

주요 책 소개

ㆍ<구외이문(口外異聞)> : 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담 약 60종 가량을 적음.

ㆍ<금료소초(金蓼小鈔)> : 주로 의술에 관한 기록.

ㆍ<옥갑야화(玉匣夜話)> : 이본(異本)에 따라서는 <진덕재야화>라고도 함. <허생전>수록.

ㆍ<황도기략(黃圖紀略)> : 점포나 상품, 명승지 등에 대한 서술.

ㆍ<앙엽기(盎葉記)> : 20개의 명소를 구경한 기록.

ㆍ<경개록(傾蓋錄)> : 열하에서 머무는 동안 학자들과의 논평 기록.

ㆍ<황교문답(黃敎問答)> : 티벳과 달라이라마 등에 대하여 들은 기록. 유학자들의 위선 풍자.

ㆍ<행재잡록(行在雜錄)> : 청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기록. 조선이 취하는 청과의 외교관계에서의 문제점 비판.

ㆍ<반선시말(班禪始末)> : 청 황제의 반선에 대한 정책.

ㆍ<찰습륜포(札什倫布)> :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

ㆍ<망양록(忘羊錄)> : 음악에 관하여 중국학자들과 견해를 피력한 기록.

ㆍ<심세편(審勢編)> : 조선인의 오망(五妄)과 중국인의 삼난(三難)을 역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

ㆍ<곡정필담(鵠汀筆譚)> : <태학유관록>에 미처 실리지 못한 자연과학적 논평들.

ㆍ<동란섭필(銅蘭涉筆)> : 동란재에 머물며 가사, 향시, 언해 등 문학에 대해 쓴 수필.

ㆍ<산장잡기(山莊雜記)> : 열하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

ㆍ<환희기(幻戱記)> :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

ㆍ<피서록(避暑錄)> :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에 대한 논평.

 

감상(주안점)

 

‘박지원’ 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이용후생의 학문을 강조하였던 실학자, 동시에 <열하일기>, <허생전> 등의 작품을 남긴 소설가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학자들인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淸)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사상을 통해 훗날 조선사회가 근대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 청에 대한 반발로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북벌대의론’을 내세워 청의 문물을 배척하려 하였다. 하지만 박지원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은 조선 문화의 후진성을 자각하고, 청이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그들의 발전된 문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북학’의 주장을 통해 사상적 전환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박지원은 청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행문 형식으로 집필한 그의 저서 <열하일기>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청의 선진문물에 대해 소개하였으며, 이 가운데 유용한 것을 조선에서도 실현하고자 하는 선택적인 문물 수용을 주장하였다. 이 책에서는 청나라의 발달된 농사법, 건축법 등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하였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예리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본문 가운데 구들 만드는 법에 대한 변계함과 박지원 사이의 대화를 비교해보면, 변계함은 청의 것이 우리나라만 못하다며 이를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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