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Tok/독서, 서평

『미래를 위한 역사의식』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해석

EnerTravel 2023. 6. 3. 15:05
728x90

 

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미래를 위한 역사의식』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저자소개

한영우

 

1938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인문대학에 재직하고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소장, 규장각관장, 인문대학장을 지냈으며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한국사연구회장, 국사편찬위원,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특임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와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이화학술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경암학술상, 수당학술상, 민세안재홍상 등 학술상을 아홉 차례 수상했다.

 

그는 세계화시대가 열리는 이 마당에, 무엇보다 지도층이 챙겨야 할 것은 국민들의 건전한 역사의식과 자신감 그리고 주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계화를 우리가 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와 민족이 송두리째 분해될 수도 있는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다가오는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모습의 문명이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앞으로 도래할 미래에 대처하기 위한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역사에세이 『미래를 위한 역사의식』를 집필했다.

 

728x90

 

내용 요약(줄거리)

 

제1부. 한국,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단군은 우리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나타나서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단군을 어떤 존재로 인식해 왔는가,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단군을 보아야 하는가는 결코 간단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군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묘사되어 왔다.

고대시대 현재까지 다양한 단군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고대시대의 단군은 처음부터 민족시조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시조신을 따로 갖고 있었다.삼국시대를 거쳐 우리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것은 고려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서로 공통점이 많아 어느 정도의 문화 동질 의식은 있었지만, 전체 주민이 하나의 시조를 떠받드는 혈연공동체라는 생각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단군신앙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부터였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가임을 자처했던 만큼 단군을 주목하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 국가적으로 주목을 받고, 민간 풍습으로 숭앙되던 단군은 고려 중기의 묘청에 의해서도 관심을 끌었다. 서경천도를 주장하면서 그는 ‘호국백두악태백선인’과 ‘구려평양선인’을 요청했다. 여기서 태백선인과 평양선인은 환웅과 단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한다. 단군의 위상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은 고려 말 몽고 간섭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손상된 국가 위신을 회복하려 지적 활동의 일원인 우리 역사와 문화의 원류를 탐구하게 되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그 대표적 저술로서, 일연은 승려사이에 전승된 단군신화를, 이승휴는 유가 사이에 전승된 단군신화를 정리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단군은 새롭게 해석되었다. 단군신화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황당무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삭제 배격하였다. 곰이 여자로 변했다든가 환인이나 환웅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삭제되었다. ‘조선’이라는 국호에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단군조선은 중국과 동등한 역사를 가졌다는 자부심을, 기자조선은 우리가 문명국가로 발전했다는 자부심을 각각 심어주는 것으로 믿었다.

 

서울을 한양으로 옮긴 것도 한양의 지리적 조건이 일차적으로 작용한 것이지만, 한양이 세계로 웅비하는 명당이라는 설이 단군시대의 신지가 쓴 ‘비사’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단군이 국조로서의 위상을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민간풍습으로 내려오던 삼성신앙이 국가로부터 공인받는 변화가 있었다면, 조선 후기의 단군은 민족시조로서의 위상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학자들의 단군 연구 개요를 살펴보면, 첫째, 단군의 혈통이 어떻게 이어졌느냐의 문제이다. 둘째, 단군의 업적으로서 백성들에게 편발과 개수를 가르쳐주는 등 우리나라의 문명이 기자에 앞서 단군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셋째, 단군이 세운 나라 이름은 ‘조선’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단군은 단국의 임금이라는 일반명사이지 고유명사일 수 없다는 해석을 내리고, 더 나아가 단군조선의 실재 자체를 의심하였다고 한다. 19세기 이후에도 엄격한 고증적 역사학이 발달하면서 단군에 관한 사적을 점차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넷째, 조선의 중심지는 지금의 평양이라 보는 것이 통설이었으나, 일부 학자들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다섯째, 단군의 무덤에 대한 문제였다.

 

일제시대의 단군의 의미 역시 알 수 있다. 왜란과 호란의 충격 속에서 민족의식이 고양되면서 단군의 위상이 높아졌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단군조선에 대한 평가는 다시 냉각되었다. 이와 달리 삼한을 높이는 역사의식이 널리 확산되면서, 개화기에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는 변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민족주의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이와 병행하여 단군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다. 특히, 1909년 중광 된 단군교는 민간으로 전승되던 단군신앙을 중심으로 근대종교로 발전시켰으며, 단군상을 극대화시켜 놓았다. 일본의 천황주의에 맞대응한 단군주의는 1910년대의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실제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과 식민사업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로 일본은 대종교의 민족주의를 역으로 이용하였다. 단군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본은 차츰 그 논리가 일본의 일선동조론과 모순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단군문화를 일본까지 포함하는 대동아의 보편적 신격으로 국제화시켰다.

 

해방 후 단군은 우리 곁에서 떠나갔다. 1910년부터 대종교도들이 시작한 개천절 행사가 지금까지 시행되었고, 단군을 어떻게 역사에 쓸 것인가도 논란이 많고, 단군사당 건립을 둘렀나 논란도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단군은 남쪽보다도 더 소외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르러 주체사상이 등장하고 평양을 남북 유일의 수도로 정하면서 역사해석을 크게 바꿔가기 시작했다. 북한은 단군릉 복원을 계기로 대종교 계통의 특유의 역사책을 자주 인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북한은 대종교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민족통일은 남북 주민의 혈연적 경제적 동질성의 회복으로 완결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단군은 역사학의 영원한 숙제이며, 단군의 실체가 아닌 우리 조상들의 오랫동안 존숭하고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믿고 살아왔다는 것에 중점을 둬야한다고 한다. 그는 민족통일과 민족화해를 추구하는 오늘의 위치에서 단일민족의식을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군에 관련된 역사적 유적과 풍습을 원형대로 보존하며,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을 통일지향의 가치관으로 접맥 시켜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대승적으로 조정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의 국경이 없어지는 시대에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국제화·세계화라는 것에 작가는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무역기구(WTO)로 상징되는 세계질서의 새로운 개편이 우리에게 희망과 기회를 키워주는 측면도 있지만 아직 경제·기술 분야에서 뒤져 있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더 크다고 한다. 작가는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전통문화가 심하게 파괴된 나라가 없다고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과 옛 것을 배우고 계승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법고창신(서양식 말로는 ‘르네상스’)을 강조했다. 일본처럼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그것을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며 칭찬한다. 우리나라 역시 세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철저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한국 속에서 세계를 찾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강대국 중심으로 개편될지도 모를 세계질서를 정의롭게 바로잡을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까지도 내다보아야 한다.

 

일제침략을 정당화하는 것도 모자라, 일본은 우리의 독도 접안 공사를 중시하라는 주권침해적인 요구까지 해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일본 지도층의 잇따른 망언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경제·문화가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재편성되어 있고, 한국에 대한 발판 구축이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도 장기적이고 근원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국제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정부에서는 외향적인 세계화만 강조하고 국민의 자존심과 응집력을 키워주는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정책에는 이렇다 할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인 만큼, 기업도 우리식 경영과 우리 문화의 혼이 담긴 문화상품을 개발하여 경쟁력을 높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요즘 공산권이 붕괴하고, 국내적으로도 이념의 시대가 끝나면서 오히려 국민정서에 일종의 허탈감이 조성되고 있는 듯하다, 나라가 건실하려면 기초가 건실해야 하는데, 학문과 교육의 기초가 단단해지고 일반 시민들이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쉽게 향유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이 즐비해야 하는 것이 시작이다. 또한 역사교육의 강화와 문화재의 복원을 위해 국력을 쏟는 것이 당연한 정책순서라고 주장하며, 역사와 문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역사의식과 문화의식의 빈곤에 빠져있다는 점을 꼬집는다(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돌리고, 대학의 국사과목을 자율선택으로 돌린 것 등).

 

우리는 자원이 부족한 나라라고 한탄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지질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지하자원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비록, 건축자재는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가구나 공예산업에 필요한 재목은 얼마든지 있다. 가까운 길을 두고 우리는 멀리 돌아가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지나치게 바깥세상에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장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발견을 시작으로 우리 조상의 독서열과 책 문화는 그 다음 시기에도 여전히 선두를 달리고 있다.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것뿐만 아니라 왕궁 안에 수만 권의 장서를 가진 임천각이라는 도서관이 있다는 점 등 고려인들의 교육열이 그 예이다.

조선 왕조는 금속활자를 더욱 개량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켰다. 종이의 질과 생산량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수준 높은 문민정치를 열고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엄청난 기록문화를 남긴 것은 이러한 출판문화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다.

출세하려면 공부하라는 것은 오랜 생활철학이다. 그런데 오늘날 독서문화라고 하면 일본을 첫째로 꼽는다. 독서왕국 한국의 미래는 어디로 가고 우리를 모범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온 일본을 우리가 오히려 배우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외형상으로 우리 출판계는 크게 성장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감각적 흥미를 유발하는 출판과 독서가 늘어난다고 해서 출판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전 세계의 문헌정보의 중심지로서 외국의 책을 수출하는 나라가 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믿음이 깔린 나라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출판왕국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살아보세, 잘사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새마을 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공화당시절에 널리 유행했던 이 노랫말 속에는 가난에 대한 한 같은 것이 서려 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오늘 국민 대부분이 호의호식하는 부자나라가 되었지만 항상 불안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살아가는 부자나라가 되었다는 점이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다. ‘잘살아보세’의 표준을 기계문명의 이용과 물질적 풍요에만 두어온 천박한 정신풍도에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새로운 기계문명의 매력을 따라가면서 살아가는 ‘잘살아보세’ 풍조가 사실은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을 일본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과 문화의 도움을 받아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 점이 크나큰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반만년의 기나긴 민족사를 통틀어 보면, 일본의 과학과 기술과 학문 등 모든 것이 우리가 전해준 것을 받고 자라왔다. 그런데 왜 그 엄청난 잠재력을 되살려서 우리 기술을 개발하지 않고 일본기술에 매달리는지 알 수 없다.

금세기 초에 우리가 망국의 비운을 맞은 이유도 일본에 의지해서 잘 살아 보겠다는 일부 주체성 없는 선인들의 단견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우리는 21세기 선진사회를 위해 국가전략을 바꿔야 한다. 무엇이 사람답게 사는 바른 길인가를 고민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수준 높은 정신문화야 말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국력임을 알 때가 되었다.

 

수도는 한 나라의 심장부로서 그 상징성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서 국민정신을 좌우하고 국가운명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중국의 자금성, 파리의 개선문, 대만의 타이베이 시 등과 비교하면 우리의 수도 서울의 상징성은 실망 그 자체다. 서울의 심장부인 세종로는 경복궁의 근엄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박물관 앞에 방화문을 짓고 세종로 네거리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것은 더욱 어색한 연출이 아닐 수 없다. 항일지사의 넋을 기리는 충렬사가 서울에 없다는 것도 기이하다. 총독부 건물은 경복궁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서나 서울의 왜 기을 없애기 위해서나 반드시 철거되어야 한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데에서 서울의 상징성은 매우 중요하다. 국가의 기강을 반듯하게 세워놓지 않고서는 경제난국이나 대일외교의 난제들이 근원적으로 풀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존경하지 않으면 남이 우리를 존경하지 않는다.

 

이미 일본의 호전성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이상 그들의 국민성이 바뀌지 않는 한 낙관은 금물이다. 그런데 항상 일본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측읭 안이한 태도에 불행이 발생한다. 400년 전 임진왜란의 경우에도 일본의 침략이 충분히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파의 이익을 앞세워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큰 화를 당한 것이다. 왜란 후 일본은 국교재개를 간청하고 조선에 통신사로부터 우리의 선진문물을 배우면서 200여 년간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힘이 축적되자 다시금 침략의 본색을 드러냈다. 1904년 러일전쟁입 발발하자 일부 인사들은 일본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지원하였다. 일본의 승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줄 알았으나 승리한 일본이 도리어 을사조약을 맺고 국권을 침탈하자 속은 것을 알았다. 일제 말기에 일본은 또다시 우리의 지식층을 유혹하였다. 최고의 학력을 자처하던 인사들이 천황의 깃발아래 모여들어 성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그런데 해방 후 이 나라의 현대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신명 바쳐 일제와 싸운 애국지사들은 뒷전이고 친일 인사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서면서 나라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자주자존 했던 지성사의 맥이 끊어진 것이다. 정신적으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것은 현대사의 크나큰 빚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긴급한 과제는 도덕성과 민족성의 회복이요, 투철한 역사의 삭의 함양이다.

 

역사는 조상과의 대화이다. 작가의 첫 관심은 조선후기 실학으로 쏠렸다. 역사속의 근대와 1960년대 근대화 정책사이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역사해석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겼다. 1970년대 초에 쓴 정도전 사상의 연구는 내 잣대로 왕조를 재해석 한 첫 저술인 동시에 내 학문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역사를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신의 정체성 확인과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하자는 법고창신을 강조했다. 작가는 왕조문화의 정수를 관리하면서 우리 조상의 고급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재확인하였다. 이제 이것을 온 국민 더 나아가 온 세계인과 함께 나누어야 할 대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 가운데 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연구 교육하는 국학이나 이를 보존 관리하는 문화제 보호 사업은 국가 정책상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우수한 전통문화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우리는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외국에서 배우고 있으나 전통문화에도 얼마든지 최첨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국민심리에 천근만근의 무계를 얹어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중국보다 앞선 교육 학술의 문화대국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21세기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여는 것이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는 길이다.

 

문화재 감정이나 문화재 변경 혹은 매장 문화재 발굴 허가 등은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 문화재 위원회는 의결기구가 아닌 자문기구로서 문화재 위원회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의견에 지나지 않고 법적 구속력이 없다. 문화재 위원회가 이렇게 운영되는 한 위원회의 전문성이나 권위가 서기는 어렵다. 애초대로 의결기구로 바꾸고 분과를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예산과 인력 상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문화재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 부가가치로나 엄청난 자산임을 고려할 때, 문화 행정의 제도적 보안과 더불어 국민의 문화의식이 성숙하여 문화재의 조작이나 파괴와 같은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 문화의 해외 홍보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한국문화를 홍보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외국 유명 박물관에 한국 코너를 꾸며주는 것, 외국에 한국화를 지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비용이 적게 들고 효과적인 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외국어로 번역하면 보급하는 일이다.

요즘 무역역조와 국제 수지의 악화의 원인 중 하나가 우리 것의 세계화를 등한시하고 외국 것을 받아들이는 데만 열중하는 얼빠진 세계화 정책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앞으로 문화재 보호재단이 앞장서서 우리 문화재의 해외 홍보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기를 당부하는 말로 작가는 말을 마친다.

 

중간에, 작가는 인문학적 교양을 위한 독서를 강조하였다. 그는 머리가 파열될 정도로 많은 책을 읽고 그때의 사상적 고민과 갈등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치중립과 균형감각을 생명으로 하는 학문의 대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스스로 좌우익의 싸움을 몸속에서 치러냈으며 그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는 독서야 말로 사람이 늙지 않고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새로운 독서 철학을 터득해 간다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2부. 미래를 위한 역사의식, 역사교육

 

1994년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로 정해진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은 조선왕조와 엄연한 정체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의 정도를 기념하는 것은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의 문화적 연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서울문화’의 뿌리는 멀리 선사시대로 소급된다. 서울의 뛰어난 자연환경과 지정학적 조건은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그 진가가 한층 크게 발휘되었다. 이제는 단순히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한 나라의 중심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 정약용은 백제의 강성이 서울의 지형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면서 과장되게 말했지만, 서울의 수도로서의 유리한 자연조건을 강조한 것은 경청할 만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지리적 측면에서 보면, 서울과 한강유역의 점령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보면 서울의 지리적 중요성은 당연히 주목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주목되었다고 한다. 고려 조정이 서울을 새 수도의 후보지로 선정하고 도시건설에 박차를 가한 것은 인문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풍수가들이 한양 길지 설을 내세우면서 천도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수준 높은 문민문화인 선비전통을 지키면서 살아오던 우리 조상들이 우리를 배우면서 뒤쫓아오던 일본에 패망한 것은 순전히 군사력과 경제·기술과 같은 힘의 논리에서 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면서 힘에 대한 숭상은 극도에 이르게 되었다. 5·16을 계기로 정치 자체가 무단화하면서 힘의 논리는 전 사회를 이끌어가는 절대적 가치체계로 자리 잡았다. 그러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 15위 이내의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엄청난 물량적 성장의 배경에는 온갖 부정부패들이 깔려 있다. 현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서도 논했는데,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군(軍)’ 대신 ‘민(民)’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일단 획기적 변화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문(文)’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미래에 동참할 것을 적극 유도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도덕성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면, 문화가 경제를 이끄는 시대가 와야 한다. 전통문화로부터 교훈을 찾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은 문민정부가 해야 할 시급한 과제라고 믿는다.

 

조선 시대의 도덕성에 실현과정에 관련된 내용을 말하기 전에 한국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를 이끌고 온 주역이 선비 계층이며 이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은 주체성과 도덕성이다. 이 주체성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뿌리 사랑이다. 이는 혈통을 굉장히 사랑하며 국토사랑 더 나아가 하늘사랑을 뜻한다.

이러한 도덕성과 주체성의 실현과정에 대해 알아보면 고려시대에는 주체성과 도덕성이 심화되었는데 국호를 ‘고려’라고 한데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뜻이 보인다. 조선 시대의 도덕성의 실현 과정을 보면 크게 7가지로 나뉜다.

첫째, 인재등용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과거 제도가 정착 되었다.

둘째, 교육진흥면은 물론 출판인쇄술이 최고도로 발달하였다.

셋째, 학술적인 면에서는 집현전, 규장각, 독서당 등이 그 예다.

넷째, 언론정치면에서 말을 풀어놓고 정치를 했다.

다섯째, 붕당정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흔히들 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긍정적 측면이 더 많았다. 붕당정치는 정당정치로 가는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으나, 그것이 의외제도로 연결되지 못하고 관료조직과 연결이 되어 폐해가 있었을 뿐이었다.

여섯째, 수많은 청백리가 나왔다.

일곱째, 그 밖에 관리임용에서 상피제도, 양반의 직업 세습 차단, 노비의 지휘 상승 등 조선시대의 도덕성 실현을 위한 사례가 많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주체성과 도덕성이 드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말, 개항기 이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가치체계가 크게 달라졌다. 우리는 주체성을 길러 문화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작가는 21세기의 세계는 바뀌어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20세기를 정리하지 않고는 21세기는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시대를 열어가려고 할수록 지난 시대를 정리하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역사의식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전재가 있다. 우리 민족의 생존을 보전하는 역사의식이어야 하며, 도덕성을 잃지 않고 세계평화를 해치지 않는 역사의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의식의 전재가 필요한가? 그것은 지난 20세기 냉혹한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 생존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체념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WTO체제가 출범하면서 무한 경쟁 시대가 다시 열리고 있다. 경제 문화의 국경이 없어지고 국가의 공권력이 경제와 문화를 보호하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만약 국경의 파괴가 더욱 커진다면 20세기의 피해가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인류 국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민족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물론 잘못된 민족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세계화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조상들이 인류 국가를 유지해 온 비결은 당연 법고창신과 동도서기의 국가경영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20세기가 밀고 간 도덕정신을 계승하여 역사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 21세기를 인류국가로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화는 간단히 말해서 지피지기의 전략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중요한 역사교육을 사회과에 통합시킨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역사교육을 크게 약화시킬 뿐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는 정부시책에도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체계 속에 사회과 지식을 통합시키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역사교육에 문제가 있다 하여 역사과목 자체를 소홀하게 취급하는 것은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웃 일본에서 일본사를 전공하는 교수가 약 3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사 교육은 한국이 처한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첫째, 일제강점기 파괴된 민족문화를 복원 계승하여 민족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아직도 만족할 만한 단계에 가 있지 못한 점이다.

둘째, 민족의 지상과제인 남북통일은 민족적 동질성 회복과 관련되어 있다.

셋째, 우리의 생존화 정체성을 위협하는 WTO 체제의 출범을 계기로 사회통합과 우리 것의 세계화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도 국사교육은 박정희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여 그 후 계속적으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국사 교육 강화를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교육과정 개정안을 전면 재검토하여 국사과목을 필수로 환원시켜야 한다. 또한 한국사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전임교수의 확보가 필요하다. 탈락된 사법고시에서의 국사과목을 내년부터 다시 환원시켜야 한다. 등 다양한 활성화 개선 방안을 나열한다. 끝으로 작가는 국사교육의 강화를 위해 질 높은 교과서를 만들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가 문치의 절정에 올라섰던 선조말년에 일어났다. 25만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20여 일 만에 서울을 유린한 것은 두 나라의 군사력과 무기를 비교할 때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초전의 참담한 전황을 가지고 왜란을 패배한 전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7년간의 전화는 참혹하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이 승리했다. 군사강국인 일본이 문화강국의 조선에서 패배한 것은 장기전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문화능력이다. 임진왜란은 도덕성에 바탕을 둔 인문문화가 위대한 국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민족문화의 복원이 광복의 완성이다. 작가는 길에서 사람이 만나면 반가워야 하는 세상에서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한탄한다. 이는 근대화철학이 잘못된 탓이며, 전통의 장점과 서구문명을 접합시켜 ‘법고창신’의 근대화를 했어야 옳았다고 한다. 조선왕조를 매도하고 유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많지만 해방 후의 경제성장도 실은 교육을 중요시해 온 유교문화의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심력과 귀일성을 가져올 통치철학이 준비되지 않고 공동체적 응집력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WTO 체제의 효과적 대응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국제화는 중요하나 국가목표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제 교육과 문화가 윗자리에 서는 시대가 와야 한다.

그런 미래사회를 위해서는 전통문화가 가장 핵심이다. 한국인의 20세기는 물질면에서의 성공과 정신면에서의 실패로 정의된다. 국민소득이 증가해도 이를 받쳐주는 정신문화가 없고, 부정부패가 끊임없이 일어난 것이 그 예이다.

21세기는 엄청난 도전과 기회가 병존하는 대전환기가 될 것이다. 우선 우리의 숙원인 민족통일이 이루어지고, WTO를 통한 국가 간의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이런 21세기의 미래를 전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성과 도덕성을 지닌 진정한 문민문화의 건설이다. 문민문화를 총체적으로 이론화하는 ‘신민족주의’가 나타날 때이다. 신민족주의는 역사를 존중하고,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는 정통문화에서 사회통합과 문민정치의 지혜를 배우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또한 우리의 가족제도와 마을공동체의 전통, 경제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다. 20세기를 극복하는 운동이 21세기를 여는 길이다.

 

3부. 한국사를 경영한 위인들

 

-정도전-

조선왕조의 출범이 우리 역사의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할 때, 새 왕조 문물의 기초를 놓은 인문들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런 의미에서 삼본 정도전은 단연 으뜸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혁명을 모의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전제개혁을 주동하였으며, 한양 문화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순탄한 벼슬길에 올랐던 그는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크나큰 시련에 봉착하였다. 재상들의 핍박에 견디다 못한 정도전은 42세 되던 해에 이성계와 혁명을 결의했다. 국 후 그는 개국 1등 공신으로서 인사권, 정권, 병권을 장악하고 한양천도와 수도건설사업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요동정벌운동을 추진하였지만, 이방원 일파의 기습을 받아 1398년 참수당하였다.

혁명가·정치가로서의 정도전의 생애는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가 만들어놓은 문화적 업적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정도전은 정치적 실천과 병행하여 많은 저술을 내어 사상혁명·문화혁명을 주도하였다.

정도전은 성리학만이 정학이요 실학이라는 생각에서 불교와 도교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불교의 기능이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와 깊이 유학하여 국가재정의 낭비를 초래하고, 승려의 과도한 증가로 국역인구와 생산 활동을 위축시키는 등 불교교리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정도전이 그려내고 있는 조선왕조의 국가상은 한 마디로 주나라의 이상사회를 이 땅에 건설하겠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정도전이 구상한 권력구조의 특징은 재상인 문하시중으로 하여금 정책·인사·재정 및 군사의 모든 권한을 총괄하도록 그 지위를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그가 추구하는 교육은 도덕사회를 건설하면서 부국강병에 필요한 인문·기술 교육을 조화시키자는 것이며, 관리 등용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능력에 바탕을 둔 공정한 경쟁시험이다. 정도전의 국방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원·명 교체기에 힘의 공백지대로 놓인 요동지방을 먼저 탈환하려는 것이었다. 정도전의 몰락과 이방원의 등장은 크게 보면 급진파의 후퇴와 온건파의 대두라는 정치사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수광-

임진왜란이 조선왕조의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분수령이라면, 그 분수령의 꼭대기에 조선 전기의 성리학시대와 조선 후기의 실학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에 서 있던 인물의 하나로서 지봉 이수광을 꼽을 수 있다. 성리학을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질 무렵, 이수광은 바로 선각자 가운데서 학문이론에 대해 앞장서간 인물로, 자신의 새로운 학문을 ‘무실’의 성리학으로 이름 지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이를 ‘실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수광의 외교활동 가운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베트남 사신과의 교유로서, 그의 문명(文名)이 멀리 안남에까지 떨치고 안남문화가 국내에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수광의 순탄했던 관직생활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크게 8 굴절되기 시작했다. 1619년 순천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단념한 이수광은 수원 시골집과 서울 본가를 오가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대표적 저술로는 ‘채신잡록’, ‘설문청독서록해’, ‘경어잡편’ 등이다.

이수광이 살았던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는 조선사회가 보수와 혁신의 갈림길에서 크게 고민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광해군대의 폐모살제사건을 계기로 침류대 학사들은 국가중흥의 과제를 추구하면서도 도덕성 제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실학에 선두에 선 이는 바로 이수광이었다. 이수광은 바로 지피지기의 균형감각 때문에 후세 학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광조-

정암 조광조는 알성시에 합격하여 사간원 좌정언이 되자마자 정국공신이 폐위시킨 왕비 신 씨의 복위운동을 벌였다. 그 후 그는 왕도정치와 지치주의를 내걸고 추진한 개혁은, 군주독재의 방지, 유교의 진흥, 부정한 공신세력의 도태와 민생의 안정이다. 정치개혁의 구체적 사업은 왕이 신하를 존대하여 실권을 의정부에 넘기도록 하고, 경연의 자리에서도 신하가 엎드리지 않고 앉아서 하도록 바꾸었으며, 현량과를 통해 28명의 신진사류를 대거 영입하여 정치권의 물갈이를 실현하였다.

민생을 위한 개혁으로서는 무엇보다 당시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의 폐단을 시정하고, 한전법을 실시하여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려고 하였다.

 

-광해군-

필요한 일을 하고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 중 하나인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고 전후복구사업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왕권은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 임해군이 살아 있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을 인정하지 않고,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세자에 대한 정치세력이 나뉘게 되었다. 명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여진족이 일어나 후금을 세우고 조선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물론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책은 칭찬받을만하나, 반정세력은 이를 명나라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었다.

광해군은 전쟁에 지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재정을 높이기 위해 유교 정치를 버리고 법가적이고 능률적인 접근방법이 선택했다. 그는 대동법과 중상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전쟁을 막지 못해 실추된 왕조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창덕궁을 복원·경덕궁과 인경궁을 재건설하였다.

인목대비의 폐위 등을 이유로 광해군이 반인륜적이라는 죄명으로 쫓겨난 것은 충분히 그럴만하다. 하지만 그가 반인륜적이었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를 빠르게 복구할 수 있었다. 작가는 그의 시대와 박정희 시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박정희 역시 현대판 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가 이룩한 경제발전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다독거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4부. 오늘의 한국학

 

한국학은 한국에 대한 학문적 연구이다. 이 부분에서는 한국학이 국내외로 어떻게 쓰여 왔으며, 그 속에 포괄된 학문영역은 무엇인지, 현재 우리가 추구해야 될 한국학의 개념과 학문영역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생각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의 한국학은 그 용어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개념과 분야를 확정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혼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서양식 한국학은 동아시아 세계를 지역단위로 설정하여 비교연구 하는 측면에서 다루고, 과거와 현재를 모두 포괄하며, 언어를 핵심에 놓고 기타 정치 경제 사회 등 ‘문화’ 일반으로 보면서 다학문적 접근방법을 시도하는 것이 특색이다. 우리의 ‘한국학’은 민족적 특성을 밝혀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것이 지닌 세계적 보편성을 찾아가는 데 주력하는 학문이 되어야 할 것으로 작가는 말한다.

 

우리나라 고지도는 세계지도(천하도), 동아시아지도, 전국도 등으로 구별할 수 있으나, 18세기 중엽 정상기 지도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관찬지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고지도가 뛰어난 것은 “도(圖)는 형(形)이요, 서(書)는 언(言)이다. 형이 있고 나서 언니 있다.”라고 한 정조의 말처럼, 지도의 중요성을 국가가 충분히 인식하고 지도 제작에 임하였다는 데 원인이 있다. 우리의 국토의 특징 중 하나는 살아있는 인체에 비유하여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체론에 입각하여 그려진 우리의 고지도는 생명체적 요소들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산수화의 예술적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규장각은 조선시대 전적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보고인 동시에 세계적인 문화재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조선시대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식민사관의 오류를 시정하는 데에서 규장각자료의 공헌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규장각 자료는 보존·정리·활용의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자료의 보존과 관련하여 파손된 전적의 재장정이 시급하지만 예산 및 장정기술의 한계로 어려움이 크다.

둘째, 자료의 마이크로필름 제작이 다시 시도되어야 한다.

셋째, 영인본 발간사업이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넷째, 해외에 유출된 규장각 도서를 조사 수집하는 일도 중요한 과제이다.

 

감상

1990년대 쓴 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20세기 중심의 서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살펴보니, 작가가 주장하는 세상의 모습에 조금은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전에는 한국사에 대한 중요성을 알지 못했는데, 단순이 한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우리 민족의 정신을 배우고 익히는 것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가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의 토대가 된다는 것에 의아하긴 했지만, 그가 나열하는 예나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의 사상을 접목시켜 설명해 주니, 우리가 앞으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