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리뷰는 '해롤드 시프린 『손문평전』 속 쑨원 중국 현대사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해롤드 시프린이 집필한 『손문평전』 줄거리 내용을 요약 정리하며, 중국 현대사상의 대부 쑨원의 일대기와 중국 현대사 이야기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INDEX>
손문평전(지식산업사, 1990년)의 저자는 해롤드 시프린입니다. 해롤드 시프린이예전 미국학계의 연구 수준을 대표했던 그가 바라본 쑨원(손문)은 평생 제국주의 열강에 환상을 품었는데요. 조국이 반(半) 식민지로 망가진 상황에서도 그의 태도는 같았습니다. 사실 그의 혁명활동이란 것도 열강에 대한 구걸외교로 출발한다는 진단은 서양 학자들이 그를 ‘마지못한 혁명가’(a reluctant revolutionary)라는 냉소적 평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해롤드 시프린은 손문(쑨원)을 아래와 같이 떠올리며 저술한다. 손문에게 한 가지 한결같은 재주가 있었다면 그것은 실패하는 재주였다. 그러나 그가 활동했던 세월은 중국 근대사의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으며,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시기는 더욱 암울했을 것이기에 그는 여전히 민족적 영웅으로 남아있다.’ 그는 실제로는 소극적인 혁명가였기 때문에 호방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손문은 진정한 혁명가에서 특징적인 냉혹함을 지니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살상보다는 오래 걸리더라도 협상을 강조했고, 무력집단과의 투쟁보다는 타협을 선호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현대사 인물 중에서는 손문만큼 외국의 영향에 대해 개방적인 정치가는 없었으나, 민족지도자로서 손문의 역량은 제대로 시험받지 못했다. 물론 오히려 이 때문에 그는 죽은 뒤에도 쉽게 전설적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회혁명과 근대화의 문제가 약속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손문평전 줄거리 내용 요약
1. 손문(쑨원)의 성장
손문(쑨원)은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 현재의 中山]에서 가난한 농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손문은 태평천국 출신의 운동가 스승에게 듣고 배우며 ‘홍수전’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키웠고, 후에 반청(반만주족) 운동에서 사상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79년, 14세의 나이에 하와이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83년 18세에 하와이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오아후 고급학교에 진학하여 중국의 동시대 교육이 아닌 서양의 지배자들의 양식을 남김없이 학습하였다.
이후 그는 막 세례를 받으려는 찰나에 그가 기독교에 물들 것을 두려워한 형에 의해 다시 귀향하게 된다. 그러나 빈곤과 미신, 부패가 가득한 향촌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던 신상을 부수는 사건을 저지르면서 결국 홍콩으로 나가게 되었다. 정치적 토론에 더욱 열중하게 된 그는 결국 자신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로 한다. 그는 외국의 부강의 원천은 결코 굳건한 함선과 효율적인 총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산업시대를 특징짓는 과학과 지식의 적용에서 유래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1870년 이래 중국의 지도적 정치가인 이홍장(李鴻章)에게 등용을 요청하였으나 무시당하였고, 관료 후원자를 찾는 대신 기존 권위체제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한다.
2. 흥중회의 설립
1894년 청일전쟁 때 그는 형과 교포들의 자본과, 중국과 먼 거리라는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그곳의 화교들로 흥중회를 조직했다. 흥중회(興中會)는 중국 최초의 근대적 비밀 정치 결사이다. 모인 이들은 모두 청나라 말기의 민족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애국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체제를 전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비록 그 수는 적었으나 태생이 손문과 같은 광둥 사람들이 많았고 일부의 식자층과 실업가가 그를 원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진 이후 흥중회의 이념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다. “만주족을 축출하고, 중국을 재건하며, 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또한 중국의 근대화와 보존을 오로지 중국인에게만 한정시키지 않고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정당하기 국익을 위하여 활동한다면 회원자격이 있도록 함으로써 외국인 또한 참여할 수 있게 권유하였다..
2.1 무창봉기
손문은 청일전쟁의 패배를 틈타 중앙절을 거사일 삼아 봉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들은 삼합회의 구성원들과 광동의 뱃사람들이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홍콩으로부터 광저우로 들어가 정부 관청과 군대본부를 급습하여 성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주변의 현으로부터 동지를 모아 성도인 광저우를 점령한다는 무창봉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거사 당일 밀고자로 인해 그들은 한 발의 총도 쏘아보지 못하고 거사에 실패했다. 이후 그는 런던으로 가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그는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에게 체포되고 중국으로 다시 보내져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홍콩 의학교 때의 스승 J.J. 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었으며 <런던 피난기>를 출판함으로써 그는 더욱더 유명해졌다..
2.2 혜주봉기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혜주사건을 시도하였다. 혜주 사건은 그의 세력이 실제 전투를 한 첫 번 째 혁명이었고 수천 명의 농민들의 참여하였다. 12일간 지속된 이 봉기는 수천 명의 농민을 정부군과 맞붙어 싸우게 한 중국 농촌의 잠재적 반항력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것은 10회에 걸친 손문의 봉기중 두 번째 혁명 기도였으며 본격적 전투를 치른 첫 혁명이기도 했다. 광동 당국은 손문이 유학순의 회유를 모색하다 실패하여 일본인과의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반란군의 진압을 시도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손문 군의 선재 공격이 발생하였고 이는 혜주봉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인 대리인의 자금 유용으로 실패하고 만다. 흥중회는 손문의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도구였던 것이다.
3. 중국혁명/신해혁명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은 중국 혁명 동맹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은 개별적으로 '오랑캐를 쫓아내고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건설하고 지권을 평균히 한다’는’ 손문의 네 가지 강령에 서약하였으며 새로 건립되는 나라를 중화민국이라고 하기로 정하였다. 계몽된 엘리트가 사회적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중국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학생들과 지식인을 사로잡았다.
동맹회에서는 혁명을 선전하기 위한 기관지로 ‘민보’를 창간하였다. 거기에 손문의 삼민주의가 게재되어 중국혁명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대체로 ‘민보’의 논조는 매우 전투적이고 만주이민족의 타도와 공화국의 건설을 부르짖고 있어, 점진적 개혁을 노리는 변법운동 세력의 개혁파의 이론과 대결하기도 하였다.
1911년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의 발발 사실을 알고 귀국하였다. 신해혁명은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이밖에도 외몽골 및 티베트의 독립선언 등 외세계에도 많은 영양을 끼쳤다. 중국혁명동맹회에서 발간한 <민보>등을 통해 조직의 이념을 굳건히 하고, 그 뜻을 널리 알린 손문은 그가 미국에 있을 때 11번째 봉기인 무창봉기에서 드디어 승전보를 듣게 된다. 무창에는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혁명군은 육군준장 여원홍을 도독으로 하고 그를 중화민국의 ‘일부’라고 선언하였다. 손문은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듣고 유럽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기반을 만든 후 2개월 후에야 중국으로 귀국하였으며 청조에 대한 가장 노련하고 대중화되어 있던 적대자였음을 인정받아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그가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대총통직을 인계받을 수 있음을 통보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중임을 보류시켰다.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북부 군벌의 난립을 다스리지 못하여,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원세개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손문의 대총통 재임은 70일 만에 종료되었다. 이는 무창봉기에 놀란 청조가 당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에서 정권을 일임하여 사태수습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는 신식군대와, 열강의 지원을 받는 인물이기에 손문은 맞설 수 없었고 황제의 퇴위와 공화제의 채택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타협했다. 한편 목표를 잃은 동맹회는 해체되어 그 주요 간부가 모여 ‘국민당’이라는 신당을 설립했다. 1913년 1회 총선에서 국민당은 정부여당 ‘공화당’을 상하 양원에서 압도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탄압을 결의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손문은 따로 중화 혁명당을 조직하는 등 국민당과 직접적 연관이 없었으나 세계대전 발발 이후 열강의 관심이 위안스카이로부터 떨어졌다고 판단한 이후로 갑자기 위안스카이 타도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미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손문과의 결별과 일찍부터 이를 눈치챈 손문의 지시를 받고 일어난 반란군, 민중의 거센 저항으로 스스로 취소했으며 곧이어 사망하게 된다. 위안스카이의 죽음 이후 군벌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청조회복의 움직임까지 일어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4. 위안스카이의 독재
권력을 잡은 위안스카이의 야심은 제약할 길이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서구 열강세력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 등'매국'행위와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아울러 그의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의 이사장 대리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쑨원 역시 1913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용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을 선동하여 '황제'로의 등극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舊)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이 중화혁명당은 뒷날 중국 국민당의 모태가 된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스카이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였다.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운남 성 도독이었던 당계요가 토원군에 가담하여 이름을 호국 군(護國軍)이라 개칭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안스카이의 심복이었던 돤치루이도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도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황제 등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에 호국 군은 더욱 압박을 가해 위안스카이의 퇴임을 요구했으나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병사함으로써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의 사망과 때를 같이하여 쑨원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5. 1차대전 전후처리와 민족주의, 삼민주의 사상의 발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산동 점령을 시인한다는 결정은 중국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을 촉발하였다. 그것은 1919년 5월 4일 북경의 학생시위로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5.4 운동은 매국적인 관료의 태도에 반발하여 5월 4일 북경 각급 학교의 3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무리의 대학생들의 지도 아래 유명한 천안문 앞에 모여 산동 결정에 항의하고 정부의 일본과의 결탁을 비난하기 위해 행진을 벌인 사건이다. 그러나 보통 5.4 운동으로 알려진 것은 더 넓은 현상을 가리킨다.
5.4 운동은 또한 1915년경부터 1920년대 초까지 전통문화의 비판적 평가를 불러일으킨 사상적 고양 상태를 포함한다. 신해혁명에 대한 실망과 중국의 고난이 청조에게만 책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신해혁명이 남겨 놓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서구 이념에 자극을 받아 소수의 문필가와 학자들은 아직도 중국인 대부분의 행위를 지배하는 낡은 문화에 대신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것을 대담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혁명적 신념은 특히 1919년 민족운동의 폭발 이후 학생 지신인의 서클들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곧 이념적 문제로 자각한 지식인을 대중의 정치적 행동에 봉사하도록 하는 데 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쑨원은 처음부터 5.4 운동에 열중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방관자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만의 민족주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1919년 학생들이 제기한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적인 대응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폭도의 행위’로 부른 시위, 파업, 보이콧 따위를 신뢰하지 않았다. 더욱이 제국주의는 그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러한 손문의 민족주의는 삼민주의의 일부로서 부활하였다. 전기의 삼민주의, 즉 민족․민권․민생주의의 사상은 1855년 광저우에서의 봉기 실패기부 터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1905년 국민당의 전신인 중국혁명동맹회의 강령에 이 삼민주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사상도 중국혁명의 발전에 따라 보다 깊어져 갔다. 후기의 삼민주의 사상체계가 완성된 것은 그가 사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24년이라고 보고 있다. 이 해에 쑨원은 국민당을 개편함과 동시에 삼민주의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였다.
즉, 민족주의는 국내 제(諸) 민족의 평등과 외국의 침략․불평등조약 등에 대항하는 것, 민권주의는 주권이 인민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의 균형으로서 나타나는 것, 민생주의는 인민의 생활안정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주장으로서 최종목적은 대동세계(大同世界)의 실현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1927년 국공 분열 후 장제스[蔣介石]는 삼민주의에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부분을 배격하고 나아가 반공적 내용을 부여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6. 1차 국공합작
쑨원은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을 벌여, 광동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휴(국공합작)를 통해 노동자․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1921년 7월 중국 각지의 공산주의자 그룹 대표가 상해에 모여 중국 공산당을 창립했다. 이들은 군벌타도 제국주의 반대등을 골자로 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공산당은 혁명을 거쳐 성립된 소련의 원조를 받고 있었으나 조직 기반이 미약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민당과 힘을 합쳐 군벌을 타도 하고자 했다. 당시 국민당도 막강할 군벌 세력을 토벌하기 위한 힘은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군벌 타도를 위한 국공 합작이 1924년에 이루어졌으며 손문은 개인자격으로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인정했다.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너무나도 허무하리만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신해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베이징에서 객사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 교외의 중산릉에 묻혔다.
손문평전 서평과 감상
<절실했던 염원 그러나>
중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쑨원을 모르는 자는 없을 정도로 세계사에 방대한 영향을 끼친 손문은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혁명가이다. 그가 내세운 삼민주의 (민족주의, 민권주의,민생주의)민권주의, 민생주의)는 중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한 근거이자 뿌리가 되었다. 손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이나 비극적인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어렸을 적 개혁이라는 열망의 불에 불씨를 지피고 모든 인생을 그곳에 투자하였다.. 죽는 날까지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그는 성공한 적이 한번 도 없다.
그것은 손문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그는 소극적인 혁명가였다. 혁명가는 기존에 있던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는 숙명적인 상황에 놓인다. 체제를 전복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질서에 대한 반기이자 반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에 혁명가들은 자신만의 옳은 철학점 심지와 강단을 가지고서 적극적이고, 강경하게 체제와 맞서 싸운다. 하지만 손문은 일생동안 혁명의 목표에 헌신하면서도 그것을 성취하는데 가능한 한 비폭력적인 수단을 취하였다. 또한 타국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제국주의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했고 최후에 최후까지 가서야 돌아섰다. 손문의 타고난 능력은 비범하였지만, 타 혁명가와 같은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서투른 조직가였으며 인간을 판단하는 데에도 어리석을 만큼 순진하였다.
그런 그에게도 계속해서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수의 이러한 사람들을 매혹시킨 것은 손문의 대담성과 낙관주의, 쾌활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의지였다. 엘리트 중심적이고 부패한 중국의 실상 안에서 하층계급이었던 자가 외국의 교육에 영감을 받아 변혁을 이끌어 가려고 했다. 어찌 보면 가장 폐쇄적이고 패배주의적일 수도 있는 인물이 이러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그의 유연하고 호방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손문만큼 외국의 영향에 대해 개방적인 정치가는 없었다. 미국과 영국은 근대화의 제도상의 전범이었고, 러시아는 조직방법의 전범이었으나 불완전하게 흡수했다. 그가 결코 소련의 볼모는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충분하다. 손문이 1927년 장개석이 했던 것처럼 무자비하게 공산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의 지지자들을 숙청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외국의 조종을 받으며 자기 당을 해치는 데 주력한 그런 당과의 합작을 계속해서 참지는 못했을 것이다. 손문은 그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다. 좀 더 치밀하고 더 완강하며 무자비한 사람이었다면 완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더 큰 성공을 달성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혁명을 추구한 손문의 노력은 많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가 사망하기 전 1년여 동안 대부분의 외국인들도 그를 비웃거나 두려워했지만, 그의 동포들 특히 학생과 지식인들은 그를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더 찬양하였다. 민족주의는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쑨원은 민족주의 투쟁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이상 '해롤드 시프린 『손문평전』 속 쑨원 중국 현대사 이야기'를 정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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