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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이수광의 『芝峰類說』서평,요약,독후감,해설

EnerTravel 2023. 11. 2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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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erTravel입니다.

오늘의 BookTok은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이수광의 『芝峰類說』에 대하여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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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이수광의 『芝峰類說』은 우리에게는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그러한 명칭에 걸맞게 『芝峰類說』에는 비평에 관한 내용인 文章部를 포함해 다양한 범주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현대의 글 종류 가운데 가장 다양한 소재를 취하는 것으로는 신문기사가 있다. 신문기사는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소식을 다루는 특성 때문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전 분야를 아우르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건조한 느낌의 글이 지배적이지만 칼럼이나 오피니언처럼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글도 신문에서 함께 찾아볼 수가 있다.

 

저자 소개

李晬光(1563~1628)의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수광이 살았던 16~17세기의 조선은 당쟁이 본격화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등 심각한 혼란의 시기였다. 이수광은 혼란 속에서도 관료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찍이 16세이던 1578년 초시에 합격하고 1585년에 관직에 나아간 이수광은 명나라를 사신의 자격으로 세 차례나 방문하는 등 관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붕당정치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며 정국이 혼란해지자 1616년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행정에 힘썼다. 성리학 이론이 어느 정도 체계화된 상황에서, 이수광은 사회 전반의 혼란을 타개할 수 있는 실천적 요소를 학문의 중심으로 끌어 왔다.


『芝峰類說』은 이수광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類書의 편찬방식을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다. 1614년(광해군 6)에 편찬되었으며 20권 3,435항목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최초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芝峰類說』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 발표에서 다루게 될 비평에 관한 논의 외에도 天文, 儒道 등의 학문적 항목부터 服用, 禽蟲과 같은 실용적 내용까지 광범위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芝峰類說』은 일반적인 類書와는 차이가 있다. 보통의 類書는 다양한 범주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반면 『芝峰類說』은 항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는 하였지만, 정작 서술 내용에는 이수광 본인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어 온전히 객관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類書의 주를 이루는 항목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은 오히려 『芝峰類說』에서는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즉 『芝峰類說』은 외형적으로는 類書의 형식을 가졌지만 실제 내용은 脫類書的인 성격을 지니므로 이수광 자신의 개인저술적 성격을 가진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박수천, 『芝峰類說 文章部의 批評樣相 硏究』, 서울 : 太學社, 1995, p.36

실천적 문제를 중시하는 이수광의 사상은 『芝峰類說』 文章部에서도 드러난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방대한 양의 변증류 시화다. 변증류 시화는 臺靜農의 『百種詩話類編』에서 등장한 시화의 개별 기사 유형의 하나다. 


 변증류 시화는 작품에 쓰인 글자나 구절의 의미를 자세하게 풀이하거나, 그 단어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의미가 변화되어 왔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 비평하는 유형이다. 그 일환으로 이수광은 개별적인 글귀에 주석을 다는 작업을 많이 하였는데, 이는 文章部 외의 항목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혼란한 시대배경은 이수광이 문학비평에 있어서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게 하였다. 이수광은 당시의 문인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일화류 시화를 통해 세태를 비판하였다. 특히 이수광은 일화류 시화의 포괄성을 이용하여 爲政과 문단현실에 대한 평소의 비판적 사고를 담아내었다. 요컨대 이수광은 조선 중기의 혼돈 속에서 실천적 학문 태도를 바탕으로 문단과 현실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다.

 

저자 소개

 

1)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장은 氣를 主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 설은 오래이다. 柳子厚 자후(子厚)는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자다.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중국의 시인이다.
에게 이르러 비로소 말하기를, 「文을 짓는 데에는 神과 志를 주로 삼는다」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神이라고 한 것은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고, 志라는 것은 氣를 거느리는 것이다. 이미 志라고 하였으면, 氣는 말할 값어치가 없으며, 이미 神이라 하였으면 志는 말할 값어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斷定하여 말한다. 문장은 神을 주로 삼는다. 


氣는 동아시아 문화 전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다. 조비 조비(曹丕, 187~226) :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 문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저서 『典論』에서 ‘글은 氣를 위주로 하는데 氣에는 淸濁의 구분이 있어 억지로 그것을 얻을 수는 없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가락이 비록 일정하고 같은 규칙의 연주 방식을 사용한다고 해도, 氣의 운용이 달라 사람마다 교묘함과 서투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니, 비록 부자나 형제지간이라 하여도 자식이나 아우에게 전해줄 수 없는 것이다’고 하여, 작가의 氣의 차이에 의해 작품의 우열이 생겨나고 이러한 氣는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文氣論은 작가의 타고난 개성을 강조한 작가 비평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광은 당시의 『芝峰類說』에서 文氣論을 발전시켰다. 이수광은 작품의 문학성에 관여하는 작가의 요인으로 情‧氣‧神을 내세우고 이 가운데서도 神이 가장 고차원의 가치임을 주장했다. 이수광이 말하는 神은 1)에서 나타난 것처럼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로 작가의 내적인 역량이 작품으로 나타나는 신묘한 韻味 韻味說은 당나라의 비평가 사공도(司空圖, 837~908)가 주장한 창작 원칙으로 시에는 뜻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로는 전할 수 없는 함축적이고 온자한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수광은 ‘以氣爲主’에 의한 문학 창작은 누군가가 말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선천적인 요소는 아니기 때문에 노력을 통해 神을 제고할 수 있다고도 주장하였다. 이수광의 비평관에서 神 개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당나라의 시풍을 지향하는 조목 2), 작가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조목 3), 4)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충분의 유의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唐나라 사람이 시를 지을 때에는 오로지 뜻(意)과 感興을 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故事를 인용한 것이 많지 않다. 宋나라 사람이 시를 지을 때에는 오로지 故事를 인용하는 것을 숭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뜻과 감흥은 적다. 蘇黃에 이르러서는 또 불교의 용어가 많아서 힘써 新奇하게 하였다. 그것이 詩格에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近世에는 이 폐단이 더욱 심하게 되어, 시 한 편 가운데에 故事를 인용한 것이 반을 넘으니, 옛사람의 글귀나 말을 표절한 것과 거리가 거의 멀지 않다. 

혼란한 시대상 속에서 이수광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였다. 이수광의 비판은 잘못된 정치뿐 아니라 기존의 문단을 향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비판의 핵심은 당시에 만연했던 宋詩風 대신 唐詩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에서 드러난다.
宋詩風은 고려시대부터 우리 문단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宋詩風은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 蘇軾의 시풍이 이수광의 시대에도 만연해 있었다. 이수광은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하여 唐詩와 宋詩의 문학성을 이해하여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직접 비평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수광은 『芝峰類說』 文狀部에서 宋詩가 고사를 인용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정작 시를 짓는 시인의 자연스러운 뜻과 감흥을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用事를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用事의 기법은 문학성을 제고시켜주는 기능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이 과도하면 작품의 자연스러움을 해치게 되어 시의 격을 떨어지게 한다. 


 특히 이수광은 새롭고 기이함을 추구하기 위해 남들이 잘 모르는 구절이나 질이 떨어지는 과거의 구절, 불교의 용어를 인용하는 경우를 문제로 지적하였다. 이 때문에 1)에서 볼 수 있듯 노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작가의 개성을 강조하였던 이수광은 이러한 문제를 가진 송시가 만연한 것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이수광은 宋詩를 비판함과 동시에 唐詩의 미학을 주장하였다. 이수광은 唐詩가 작가 자신의 뜻과 감흥을 주로 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새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수광이 宋詩를 무조건 배척한 것은 아니다. 그는 宋詩가 唐詩보다 시격이 낮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무조건 唐詩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이수광은 자신의 문학론에 지나치게 편협하지 않는 융통성을 보여 작가마다 개인적 所長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봤을 때 이수광이 宋詩와 唐詩를 비교하고 唐詩의 미학을 강조한 것은 기존 문단을 변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詩人에게는 그 사람이 즐겨 쓰는 글자가 있는 것이 상례이다. 옛날 鄭谷은 僧(중)이란 글자를 즐겨 썼고, 許運은 水라는 글자 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魏野는 鶴이란 글자 쓰기를 좋아하였고, 지금의 五山 車天輅는 劒(칼)이란 글자를 즐겨 쓴다. 詩人 가운데 열의 여덟, 아홉은 모두 그러하다. 李白은 遊俠詩(호협하게 노는 시) 짓기를 즐겨하고, 王建은 樂府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온정은 艶體(시어가 아름답고 시정이 풍부한 여성적인 시체)를 즐겨 지었다. 또한 각자의 숭상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수광, 위의 책, p.390

4) 陶淵明의 시에는 酒라는 글자를 많이 썼고, 白樂天은 그의 시 二천 八백 수 가운데서 酒라는 글자를 사용한 곳이 九백 수나 된다. 또한 사람됨이 樂易(마음이 즐겁고 편안함. 쾌활하고 온화함)한 것을 알 수 있다.

작가 개인의 자연스러운 새로움을 강조한 이수광의 비평관은 글자의 사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과 4)에서 볼 수 있듯 이수광은 작가에게는 즐겨 쓰는 글자가 있는데, 그 글자를 통해 작가의 사람됨이나 숭상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1)에서 확인하였던 작가 개인의 氣를 중요시하는 생각과 2)에서 드러난 무조건적인 고사 인용을 경계하였던 이수광의 태도와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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