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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BookTok은『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저자소개
-저자명 : 막스 베버(Max Weber)
-출생 ~ 사망(독일) :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
-직업 : 법률가, 정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대학교수
-가족관계 : 막스 베버 1세의 7자녀 중 장남
-주요 저서
: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논문 두 편)
: 직업으로서의 정치
: 직업으로서의 학문
책의 배경
먼저 “자본주의”와 “근대 자본주의” 개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재화의 교환, 이윤의 추구, 돈이라는 관점에서의 손익 계산 같은 것들을 포함. 고대부터 현재까지 지구의 모든 곳에 있는 문명들에서 존재해왔고,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 투기 자본을 운용하는 “모험 자본주의”와 정치 권력에 기반한 “정치 자본주의”였다.
-근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재화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환, 가사활동의 분리, 복잡한 회계방식의 발달, 노동과 작업장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조직,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자유민, 조직된 기업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
베버는 위처럼 근대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형태적인 측면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고 지적했다. 근대 자본주의는 “경제 윤리”라는 관점에서의 경제 활동의 조직도 포함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제 윤리는 노동에 대한 엄격한 조직, 노동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이윤의 조직적 추구를 정당화해줌과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그는 이 윤리를 “근대 경제 윤리” 또는 “자본주의 정신”이라 지칭한다. 베버는 이러한 윤리 또는 정신을 구현한 모범적인 인물로 18세기 미국의 기업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을 예로 든다. 그는 16세기와 17세기 이래로 서양을 지배하게 된 “경제적 합리주의”의 기원을 단지 기술과 법률의 발달에서 찾지 않고, 개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실천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하고자 한 것에서도 찾는다.
베버는 전통적인 경제 윤리와 비교해서 자본주의 ”정신“의 독특한 특질들을 추출할 때 노동에 대한 태도와 기업가들의 사업 행태를 두 축으로 삼는다.
자본주의 정신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노동은 고귀한 미덕으로 인식되었고,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로부터 인품이 좋은 사람으로 여겨져서 존경을 받았다. 또한, 노동은 개개인의 자존감 및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과 관련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버는 노동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렇게 특별한 지위로 승격된 데에는 일련의 역사적 조건들이 작용했다고 말한다.
반면에, 전통적인 경제 윤리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노동을 천한 고역이자 필요악으로 여겨서,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순간 노동을 회피하려 했다. 이런 윤리를 지닌 사람들은 고용주가 고임금을 유인책으로 사용해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시간을 더 늘려 일하기보다는 일정한 돈을 벌면 만족하고 자신의 노동 시간을 줄이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생산성을 올리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경제적 전통주의를 끝장낸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근대적인 경제 윤리로의 전환의 원천들은 어떤 것들이었는가?
노동이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변화는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베버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자본주의 “정신”의 조상으로서 특정한 종교 사상에서 찾았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학계에서의 열띤 논쟁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주류 학계에서는 경제 형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에 집중해서,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 서양의 출현, 자본주의 자체 기원을 탐구했고, “경제 윤리”의 독립성 또는 독자성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베버가 살아가는 세대는 큰 격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봉건영주들과 소작인들로 이루어진 독일의 농촌사회는 수 세기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유럽 도시들에서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가늠할 수 없는 새롭고 거대한 물결이 쇄도해왔다, 도시화와 관료화와 세속화,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광범위하게 팽창했다.
오랜 서양 역사에 걸쳐 보존되어왔던 친숙한 전통들과 가치들을 와해시키는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를 직접 목격하게 된 베버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오랜 전통들과 윤리적 가치들과 인격적인 관계들보다 시장의 법칙을 앞세우는 “근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새로운 시대에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줄 지도이념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
베버의 학문과 연구는 위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서 100년 전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근대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기원에 대한 논쟁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학자들은 이 기원과 관련된 “문화”의 역할을 무시하는 분석들을 내놓았다. 다음은 그들과 베버가 “기원”으로 언급한 것들이다.
첫 번째로 그들이 든 것은 “탐욕의 강화”였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영리취득의 본능”이 이전 시대에는 덜 발달되어 있었다거나 심지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탐욕이 상당히 강화되었다고 말하면서, 근대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의 욕망의 강화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베버는 “황금에 대한 욕심”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 존재해왔다고 반박한다.
두 번째로 당시의 독일 학자들은 “모험 자본주의”와 “정치 자본주의”로 자본을 축적한 카리스마적인 기업가들이 세계 경제를 농경 시대와 봉건 시대를 뛰어넘어 중상주의와 근대 자본주의로 이끈 주역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금융업과 무역업을 장악하고 있던 비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런 기업가들이 대륙을 넘나들며 거대한 규모로 교역함으로써, 엄청난 자본과 재화를 토대로 한 근대와 근대 자본주의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베버는 이러한 기업가들을 “경제적 초인들”로 지칭하면서, 그런 기업가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었다고 말하고, 그런 유형의 자본주의가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개개인들만으로는 이 거대하고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동력에 의해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고 노동과 자본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로 학자들이 든 것은 “진화와 진보”였다. 생산, 교역, 은행업, 상업의 팽창은 “합리주의”와 “진보”가 사회 전반에 확산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들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자본주의 “정신”은 일반적인 사회진보의 한 현상일 뿐이었다. 반면에, 베버는 “진보”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진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부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하면서, 법률 분야에서는 이미 중세 시대의 로마법에서 가장 진보된 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을 예로 든다.
네 번째는 유대인을 근대 자본주의의 담지자로 보는 것이었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고, 끊임없이 사업 경영을 숙고하며, 전쟁자금을 빌려주고, 건설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을 대주며, 정치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사업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과 같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의 영리활동을 해왔던 유대인들의 “추상적 합리주의”는 영국의 청교도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동일한 것이었고,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베버는 유대인들의 경제 윤리를 “전통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서유럽의 자본주의의 초창기에 활동했던 영웅적인 기업가들 속에 유대인이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해 준다고 말한다. 또한 베버는 유대인들의 자본주의는 생산과 노동과 작업장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것에 토대를 둔 근대 자본주의가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던 투기 자본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다섯 번째는 사회의 정치적ㆍ문화적 특징은 근본적으로는 생산 양식에 규정되며, 생산 양식은 생산력의 발전에 대응하여 변혁된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인 역사적 유물론과 관련해서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주된 관심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었지만, 그의 저작들은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을 봉건 귀족계급의 와해와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의 지배와 등치시키고, “부르주아”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와 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탐욕이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한 역사적 유물론의 설명에서는 “자본주의 정신”은 설 자리가 없었다. 반면에, 베버는 그러한 분석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이 새로운 계층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자본주의 정신을 낳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벤저민 프랭클린을 그 증거로 든다. 즉, 그가 지닌 경제 윤리는 ”부르주아“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먼저 그의 안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베버는 당대의 학자들이 “경제 형태”로서의 근대 자본주의에만 몰두해서,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에 원동력이 되었던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는 것을 한탄했다. 그러면서 근대 자본주의 초기 발전을 설명할 때 “합리적인 경제 윤리”가 사회학적으로 중요한 원인이자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윤리가 어디에서 유래햇는지를 탐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그는 “문화적 가치들”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라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 가치들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과 그 가치들의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할지라도, “문화적 가치들”을 사회 구조와 권력과 계층과 진보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된 부차적이고 수동적인 요인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정신”은 비경제적이고 비정치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출현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을 “종교”에서 찾은 것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한 번 시도해 본 것이 아니라 당시 독일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던 견해, 즉 종교적인 신념은 삶 전체는 물론이고 노동 습관과 기업에 대한 접근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차이점들에 대한 질문은 그에게 아주 설득력 있게 보였고, 자연스럽게 그의 연구방향을 결정지었다.
실제로 베버는 십대 때부터 미국의 공리주의자들의 글들을 비롯한 신학 문헌들을 읽어왔다. 직업 선택과 교육 정도에 있어서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들 간의 차이는 1890년대 또는 그 이전부터 독일에서 저널리스트들과 식자층 사이에서 널리 인정되었지만, 그 주제를 다룬 사회과학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베버는 1890년대 중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에 관심을 가지고, 경제사학자인 에버하르트 고트하인이 자본주의의 확산에서 칼뱅주의가 행한 강력한 역할에 주목해서 저술한『흑림지대의 경제사』라는 방대한 연구서를 읽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 17세기 영국에서 정치적인 기본 권리들과 자유들이 발전하는데 경건한 영국 국교회에 반대한 비국교도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을 보여준 게오르크 옐리네크의『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는 책을 읽고서는 다시 한번 청교도를 연구해 보게 되었다.
베버가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만든 계기는 독일의 경제학자인 좀바르트가 1902년에 『근대 자본주의의 시작』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이었다. 좀바르트는 그 책 가운데서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다루는 장에서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와 퀘이커교의 역할을 단호하게 부정했고, 심지어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개신교라는 종교는 근대 자본주의적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었다. 베버는 즉시 그의 도전을 받아들여서, 아마도 그 이듬해인 1903년에 자신의 이 논문을 거의 완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요약
제1부 문제제기
제1장 종파와 사회계층
당시 서로 다른 여러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는 지역의 직업 통계를 보거나 가톨릭 신문과 문헌에 자주 등장하고 가톨릭 회의들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한가지 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자본가와 기업가, 고급 숙련노동자층, 특히 기술 분야나 상업 분야에서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서 근대적인 기업들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개신교도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개화기의 자본주의적인 발전에 따라 사회계층의 재편과 직업의 변동이 일어나게 된 거의 모든 곳에서 주민들의 종교에 관한 통계를 통해 확인되고, 그런 변화가 심하게 일어난 곳일수록 이런 현상도 더 분명히 확인됐다.
근대적 대기업들에서 자본가, 경영진들, 간부 직원들이 되려면 일정 정도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비용이 드는 교육을 받아야 했기에 대물림된 부의 소유나 적어도 일정 정도의 부의 소유가 필수적이다. 이런 사람들의 상당수가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독일에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지나 풍부한 자연 자원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발달해 가장 부유하게 된 지역들, 특히 부유한 “도시들” 중 상당수는 16세기에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위 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난다.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지역들이 교회의 혁명, 즉 16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특히 강하게 끌리는 성향을 지니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전체적으로 경제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사상에서 벗어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전통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통적인 권위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만든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왔던 종교를 사람들의 삶에서 몰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 종교의 형태만을 이전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는 별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느슨하고 거의 형식적으로만 규율했던 가톨릭교회의 지배를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포함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실제적이며 무제한으로 규율하고 통제하는 개신교의 지배로 바꾼 것이었다.
제2장 자본주의 정신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자각하고 있지 않은 “직업의무”라는 특별한 관념은 자본주의 문화의 “사회윤리”의 특징임과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윤리를 구성하는 요소다. 이 직업 의무는 개개인이 자신의 “직업적”활동의 내용과 관련해서 느껴야 하고 또한 느끼고 있는 의무로서, 그 직업적 활동이 무엇이냐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특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활동이 순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지 자신이 소유한 재화(“자본”)를 사용하는 것이냐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관념이 자본주의에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 관념을 추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해서는 그 개별적인 주역들인 근대적인 자본주의 기업의 기업주들이나 노동자들이 그러한 윤리적인 공리를 반드시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경제 질서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고, 개개인들은 그 속에서 태어난다. 즉, 이 세계는 개개인에게 적어도 개인으로서는 사실상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주어진다. 개개인들이 시장과 얽혀 있는 한, 개개인은 자신들의 경제 활동에서 이 세계가 정한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규범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노동자는 거리로 내쳐져서 실업자가 되고, 마찬가지로 이 규범과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공장주는 망해서 이 경제 질서에서 배제된다.
이렇게 오늘날 사람들의 경제생활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경제적인 “취사선택”을 통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경제 주체들인 기업가와 노동자를 교육하고 만들어 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취사선택”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때의 한계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직업과 관련해서 자본주의가 특별히 요구하는 조건들에 “최적화된” 특정한 형태의 삶의 방식과 태도는 개개인들에게서만 아니라 집단들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먼저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태도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고 막연히 그런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과 태도를 “이념”으로 규정하고서, 그런 “이념들”은 경제적 토대의 “반영” 또는 “상부구조”로서 생겨난다고 보는 초보적인 “역사적 유물론”의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태어나서 자란 곳인 매사추세츠에서는 그 어떤 “자본주의적인 발전”이 있기 이전에, 우리가 현재의 논의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정신”이 이미 존재해 있었다
미국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벤저민 프랭클린이 자란 뉴잉글랜드에서는 일찍이 1632년에 이미 탐욕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계산하는 생활양식이 발달했고, 그런 현상에 대해 탄식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또한 예를 들면 뉴잉글랜드에 속한 식민지들은 성직자들과 “신학교 졸업생들”이 소시민들과 수공업자들과 자영농민들의 도움을 받아 “종교적인”목적으로 건설한 것이었던 반면에, 거기에 인접해 있었고 나중에 남부 연합을 구성하게 된 주들은 대자본가들이 “사업상의” 목적을 위해 건설한 식민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주들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발달이 훨씬 낙후되어 있었다. 이것은 “유물론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 논의에서 사용해 온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정신”은 적대적인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던 세계에 대항한 힘들고 고단한 싸움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해 나가야 했다.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이 표명한 사고방식은 당시에 한 나라 전체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만일 고대나 중세였다면, 그런 사고방식은 너무나 추악한 탐욕의 표현이자 철저하게 멸시받았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서조차도 그러한 태도는 근대적인 자본주의 경제에 거의 참여하고 있지 않거나 적응하지 못한 모든 사회 집단들에서 철저하게 멸시와 배척을 당하고 있다.
“돈 욕심”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존재해왔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비록 돛이 불에 그을리는 한이 있어도 지옥을 향해 항해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던 네덜란드인 선장처럼 돈 욕심에 사로잡혀서 돈 버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정신”을 “대중 현상”으로 탄생시킨 신념이나 태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내면적으로 그 어떤 규범에도 얽매임 없이 막무가내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곳에서는 어디든 존재해왔다.
전쟁과 해적활동에서는 물론이고, 타 부족이나 타 민족과의 관계에서는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교역이 자유롭게 행해졌다. “형제들 사이에서는”금지되었던 일들이 “외부인들”과의 관계에서는 허용되었다. 금이나 은같이 화폐와 유사한 형태의 교환 수단들이 존재해서, 그런 교환 수단들을 활용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사회에서는, “모험적인” 성격의 자본주의적인 영리 활동이 이루어져 왔는데, 국가로부터의 징세권 임차, 전쟁 자금의 융자, 국가의 궁정과 관료에 대한 융자 등이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본주의적인 영리 활동이 이루어진 모든 곳에는 당연히 모든 윤리적 제약들을 비웃는 “모험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자 하는 것과 오랜 전통들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주 밀접하게 공존하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들이 와해되기 시작하고, 무제한적인 이윤 추구가 꽤 광범위하게 확산되어서, 심지어 사회집단들의 핵심 속으로 침투했을 때도, 이 새로운 상황이 윤리적으로 긍정되고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고, 단지 윤리와는 관계없거나 유감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현실로 용인되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 이전 시대들에서 모든 윤리적 가르침들이 통상적으로 취한 태도였고,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태도였는데, 논의를 위해 더 중요한 것은 후자다. 여기에서 근대 자본주의 이전 시대들이라는 것은 기업들에서의 자본의 합리적 사용과 노동의 자본주의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이 경제 활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힘들이 되기 이전의 시대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를 세우는데 가장 강력한 내면적 장애물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은 바로 이렇게 막무가내식의 무제한적인 이윤 추구를 용인하는 태도였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은 합리주의가 전체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의 일부로서,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에 대한 합리주의의 기본적인 태도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리 없는 견해처럼 보일 수 있다. 이 경우에 개신교는 단지 역사적으로 순수한 합리주의적인 세계관에 자양분을 제공해 준 선작물로서의 역할을 일정 정도 수행했다는 평가만을 받을 수 있게 될 뿐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순간, 역사적으로 합리주의는 인간의 삶의 모든 개별적인 분야들에서 동일한 보조나 수준으로 발전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이 문제를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탐구해야 할 것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우리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특징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소명”으로서의 “직업”개념, 다른 한편으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개인적인 행복 추구라는 관점에서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직업 노동에 대한 철저한 헌신, 이 두 가지를 탄생시킨 바로 그 합리적인 사고와 삶은 어떤 정신에서 생겨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직업개념 속에 들어 있는 비합리적인 요소의 기원이다.
제3장 루터의 직업 개념 : 연구과제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 ‘베루프’에 “하느님이 수여한 과업”이라는 종교적인 함의가 들어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고, 영어 ‘콜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구체적인 사례에서 이 단어를 더 강하게 강조하면 할수록, 그러한 함의는 우리에게 더욱 강력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여러 문명 언어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이 단어를 추적해 보면,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지위 또는 그가 일하게 되어 있는 정해진 영역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독일어 ‘베루프’와 유사한 표현이 고대의 고전 시기의 나라들이나 가톨릭 계열의 나라들에는 존재하지 않은 반면에, 개신교가 주류를 이끌고 있는 나라들에는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종교적인 영향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질적 형성과 양적 증대에 다른 요인들과 함께 작용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랬다면 어느 정도로 작용했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문화의 어떤 구체적인 측면들이 종교적인 영향으로 돌려질 수 있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기의 물질적 토대, 사회정치적 조직 형태들, 종교개혁의 정신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서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연구를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특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념들과 근대 자본주의적인 직업의 윤리 간에 구체적이고 선별적인 친화력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점들에서 존재하는지를 먼저 확인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했을 때, 결과적으로 종교 운동이 물질문화의 어떤 점들에 영향을 미쳤고 그 문화를 전체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발전시켰는지가 어느 정도 분명해 질 것이다. 오직 그렇게 했을 때에만, 근대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역사적으로 탄생하는 데 종교적 동기들이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쳤고 다른 요인들이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제2부 금욕주의적 개신교의 직업윤리
제1장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1.칼뱅주의
16~17세기에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문명국가들이었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정치적이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투쟁들은 칼뱅주의라는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당시에 칼뱅주의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로 여겨졌던 것은 “예정론”이었고,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예정론이라는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작정”은 삶 속에서 체험된 것이 아니라 사고 속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칼뱅의 종교 사상이 구체적인 인간, 즉 개개인드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향한 그의 종교적 관심에 의해 규정되면서, 그 종교 사상의 일관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예정론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져가게 되었다.
예정론에 의하면, 하느님이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칼뱅이 철석 같이 믿었던 교리, 즉 오직 소수만이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포함해서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하느님의 존엄이 찬송을 받게 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세상적인 “정의”의 잣대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섭리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하느님의 존엄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자유롭고 그 어떤 법에도 속박되지 않기 때문이고, 하느님이 작정한 일들은 우리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한 만큼만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의 단편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개개인의 운명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어두운 신비로 감싸져 있어서, 우리가 그것들을 알거나 이해하거나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정론이라는 이 암울하고 비인간적인 교리가 논리적으로 아주 일관되게 한 세대에 적용되었을 때, 그 세대에 속한 개개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내면의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종교개혁 시기 동안에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영원한 구원이라는 문제였지만,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는 영원 전부터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고독하게 자신의 인생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즉, 칼뱅주의의 예정론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동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칼뱅주의의 예정론은 철저한 논리적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 매우 큰 심리적 효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개신교에서 칼뱅주의 이외의 금욕주의적인 종파 운동들은 오로지 종교적 동기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칼뱅주의가 지니고 있던 내적 일관성이 약화되어 있다.
2.경건주의
역사적으로 볼 때, “경건주의”라 불린 금욕주의적인 운동의 시발점도 예정론이었다. 이 운동이 개혁교회 내에서 전개되었던 동안에는 경건주의적인 칼뱅주의자들과 비경건주의자적인 칼뱅주의자들은 별 차이가 없어서, 청교도를 대표하는 거의 모든 지도적인 인물들이 경건주의자들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예정론과 개별 신자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증해야 한다는 사상의 결합, 그리고 그러한 결합의 토대가 된 것, 즉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한 개별 신자들의 관심은 경건주의가 칼뱅주의에 이미 존재했던 고유한 교리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생겨난 것이었다.
경건주의에서는 그 모든 중점을 “경건의 실천”에 두었기 때문에, 교리의 정통성이라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고 때로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이라도 여러 가지 죄들을 질 수 있고 잘못된 교리를 지닐 수 있다. 신학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가장 분명한 열매들을 맺는 일이 무수히 많았다는 것은 경험이 보여준다. 반면에, 단지 신학적인 지식이 있다고 해서 실제의 삶 속에서 행실을 통해 참된 신앙이 있음이 확증되고 구원의 확실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했다. 따라서 신학적인 지식의 소유 여부를 통해서 자신이 택함 받은 자들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경건주의는 표면적으로는 계속해서 신학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교회에 대해 깊은 불신과 반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경건의 실천”에 공감하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세상 및 세속적인 활동을 멀리하는 “작은 집단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주의는 개혁교회가 표방했던 “성도들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그런 교회를 이 땅에서 눈에 보이게 하고자 했고, 기존 교회로부터 독립한 분파를 형성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보이는 교회”를 통해 세상의 영향들로부터 벗어나서 그들의 삶의 모든 세부적인 일들에서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며, 자신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외적인 증표들을 통해 자신들이 택함 받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또한 경건주의자들은 참되게 회심한 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교회”를 통해 금욕주의적인 삶을 강화해서 현세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이라는 지극한 복을 누리고자 했다. 경건주의자들의 신앙 속에서 개혁교회의 일반적인 신자들의 경우보다 더 강력하게 감성적 측면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했다.
3.감리교(methodism:방식주의)
감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금욕주의적인 신앙, 그리고 칼뱅주의적인 금욕주의의 토대가 된 교리들에 대한 무관심 또는 배척을 결합시킨 것이, 유럽 대륙의 경건주의를 영미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감리교의 특징이다. 방식주의라는 명칭은 당시 사람들이 감리교도들의 삶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구원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삶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감리교에서도 처음부터 “구원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모든 종교적인 활동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경건주의 분파들과 방식주의자 간에는 이런저런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유사성이 존재했고, 그것은 “회심”이라는 감성적 행위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사람들의 삶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감리교에서는 “감성”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열광적인 신앙은 상당한 정도의 내적 갈등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적인 “합리주의”를 토대로 한 금욕주의적 윤리와 결합되었다. 먼저 칼뱅주의에서는 신앙과 관련해서 모든 감성적인 요소들을 기만적인 것으로 규정해서 의심의 눈길을 보냈던 반면에, 감리교는 성령의 직접적인 권능으로부터 생겨나서 사람들의 내면에서 순수하게 느껴지는 죄 사함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은 원칙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을 증명해 주는 유일무이하고 틀림없는 증표라고 보았고, 개별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그러한 체험을 언제 했는지, 그 날과 시간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감리교에서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된 것은 “중생”과 “성화”개념뿐이었다. 즉, “중생”은 신자의 믿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겨난 구원에 대한 감성적 확신으로서, 신자가 “은혜의 상태”에 있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토대이자 최종적인 구원인 “성화” 체험으로 나아가는 발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그러한 “성화” 체험을 통해 신자는 그 논리적인 귀결로서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거기에 비례해서 구원의 은혜를 얻기 위한 외적인 수단들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을 비롯한 각지에서 감리교를 따라서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예정론이 강력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4.재세례파 운동에서 생겨난 분파들
유럽 대륙의 경건주의와 영미의 감리교는 신학 사상이라는 측면에서나 역사적 발전과정이라는 측면에서나 이차적으로 발전된 것들이다. 반면에, 칼뱅주의에 이어서 개신교적인 금욕주의를 독자적으로 확립한 종파는 재세례파였고, 16~17세기를 거치면서 거기로부터 직접적으로, 또는 그 신학 사상을 흡수하는 형태로 침례교, 메노파,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퀘이커교 같은 분파들이 출현했다. 이러한 종파들에게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교리와는 원칙적으로 다른 토대 위에 세워진 윤리를 지닌 종교 공동체들을 만나게 된다.
역사적이거나 원리적으로 이 모든 공동체들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믿는 자들의 교회” 사상이다. “믿는 자들의 교회”사상에서는 이제는 종교 공동체들, 그러니까 종교개혁에 토대를 둔 교회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보이는 교회들”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으로 거듭난 개개인들, 그리고 그런 자들의 공동체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든(칼뱅주의), 아니면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 주기 위한 것이든(가톡릭과 루터교) 하늘로부터 어떤 소임을 위탁받은 기관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하늘로부터 그런 소명을 받은 기관은 “교회들”이 아니라 “분파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아들이나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오직 내적으로 참된 믿음을 지니고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성인들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이 분파의 독특한 사상도 바로 이러한 원리의 외적인 표현일뿐이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경건과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제2장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금욕주의적인 개신교의 기본적인 종교 사상들과 사람들이 일상적인 경제생활에서 지켜나간 규범들 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목회 실천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신학적인 글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이유는 당시, 죽은 후의 내세에서의 운명이 사람들의 관심의 전부였고,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 시대였으며, 목회적인 돌봄이나 교회의 규율, 설교를 통한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오늘날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던 시대여서, 목회 실천을 통해 행사되었던 종교적인 힘이 한 나라의 “국민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구원의 확실성”이라는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노동, 부, 경쟁, 이윤과 관련해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조직한 것, 즉 종교를 기반으로 한 심리학적 보상을 얻기 위해 직업 노동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은 전통주의적인 경제 윤리를 뿌리뽑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다고 역설한다. 청교도의 경제 활동 전반에 스며들어 있던 다중적인 윤리적 차원은 경제적 전통주의를 와해시키는 “혁명적인 힘”으로 작용하였고, 그런 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이라 불리는 것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개신교의 여러 분파들이 실어 나를 이러한 개신교 윤리는 17세기에 뉴잉글랜드,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 널리 퍼져서, 그로부터 한 세기 후인 벤저민 프랭클린 시대에는 광범위한 지역들에서 통용되고 있었지만, 종교에 토대를 둔 윤리적인 요소는 이러한 팽창에 따라 약화되었고, “공리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는 윤리”로 변화되었다. 베버는 개신교 윤리가 탈종교화 또는 세속화되어서 생겨나게 된 가치관, 즉 노동 자체를 목적으로 보고, 직업 노동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하며, 자본을 증식시키고, 부를 누리려고 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돈을 벌며, 물질적인 부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표지로 이해하는 가치관을 “자본주의 정신”이라 부른다. 그런 가치관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들의 삶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한 사람들, 즉 “자본주의 정신”을 삶 속에서 구현한 사람들은 신앙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공동체의 복리를 위해 일하는 선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평가되었다. 즉, 개신교 윤리는 이제 종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따르는 보편적인 윤리가 되었고, 그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 받고자 하는 신앙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정직과 자신감과 존경받을 만함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윤리적 행위의 종교적 뿌리가 이렇게 약화되기 훨씬 전에, 청교도의 윤리적인 가치들은 개신교의 가정들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다. 청교도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러한 윤리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삶을 조직하는 법을 가르쳤고, 그런 가치관에 의해서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도록 격려했기 때문에, 식민지 미국이 청교도 신앙의 전반적인 영향으로부터 점점 더 느슨하게 되어 갔을 때도, 그런 윤리적인 가치들은 탈종교화되고 세속화된 채로 이후 세대들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개신교의 가정들은 금욕주의적인 개인의 생활습관, 혹독한 경쟁, 사회생활에서 정직과 공정한 경쟁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따라서 원래 금욕주의적인 개신교 분파들이 지니고 있던 가치들을 지향하는 생활양식은 교육기관들과 문화와 금언들과 사회 규범들, 가정의 관습과 전통을 통해서 새로운 세대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침으로써, 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고, 벤저민 프랭클린의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세대들의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은 그 원조와는 반대로 “내세지향적인”것에서 “현세지향적인”것으로 변모되었다.
감상
수많은 기독교 용어 그리고 관련된 세계사, 처음 들어보는 역사 속 유명인물들이 나왔다. 관련 배경지식이 없고 무교인터라 어렵고 이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책에 대해 찬찬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은 정말 다행이다. 우린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정작 그게 뭔지 잘 모른다. 이 책은 자본주의 정신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개신교 윤리의 기원을 탐구하고 그 개신교의 윤리를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개신교의 윤리를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한다고 해서 베버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시도했던 것은 아니고 당시 독일에서 꽤 제기되었던 견해인 종교적인 신념은 삶 전체는 물론이고 노동 습관과 기업에 대한 접근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종교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너무 강해 국민성을 결정하고 사람들에게 만연히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사상까지 변화시켜나갔다.
저자는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이 이는 걸 직접적으로 목격하며 살았다. 당시 목격하며 우리가 맞이한 이 물결을 어떻게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저자는 기업과 가사활동의 분리, 복잡한 회계방식의 발달등과 같이 근대 자본주의의 단지 형태적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 윤리 관점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뿌리인 종교적인 관점에서부터 접근해 분석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각종 언론, 책등에서 4차산업혁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내놓으며 우리에게 대비하라고 요구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에 우리는 방황하고 당황한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이 책은 지침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과학기술의 발전, 즉, 4차산업혁명은 당시의 산업화 같은 변화이다. 이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직시해 바로 보고 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 자본주의 속성을 알고 자본주의 정신을 가지고 살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시대에 잘 부응해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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