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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BookTok은『매천야록』 서평, 독후감, 요약, 리뷰 글입니다.
책의 배경
황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입에 들어서는 위기와 혼돈의 시대를 살아왔다. 매천야록은 1894년 고종 31년 전부터 시작하여 경술년 1910년 순종 4년까지의 구한말 조선의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권력층 간의 권력다툼, 기득권의 부패와 무능력, 외세의 압력에 대해 힘을 잃어가는 조선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냈다. 강화도 조약을 비롯한 열강들과의 각종 불평등 조약을 통해 조선의 자원과 이권을 수탈당하며 내부적으로는 임오군란을 시작으로 환란을 겪게 되고 다시 외세침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치면서 일본에게 주도권을 잡히게 된 시대이다.
저자 소개
광양현 서석촌(현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라 했다. 출신 가계를 보면 장수 황씨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기는 하나, 중간에 가세가 영락해서 그의 조부에 이르러서는 상업으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기반으로 황현은 1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나, 관력은 불우하여 34세에야 겨우 성균관의 생원이 되는 데 그쳤다. 그는 생원이 된 후, 조선 안팎으로 혼란한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거실에 구안옥(苟安屋)이라 이름을 붙이고 독서와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구국 운동에 참가하라”라고 권유했으나, 황현은 그때마다 “그대들은 어찌 나를 귀신 나라에서 날뛰는 미친 사람들 가운데로 끌어들여 같은 귀신, 미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가” 하고 도리어 엄절히 책망했다.
혼란한 세상에서 황현은 비록 은거했으나 망국상을 그대로 보고 있지는 못했다. 자신의 지기였던 김택영이 벼슬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것처럼 자신도 망국인의 방도를 생각한 듯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본은 소위 한일병합조약이라는 것을 발표해 나라와 민족의 멸망을 공식화했다. 이 소식을 듣고 황현은 애절한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했다.
내용 요약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한말의 역사책이다. 6권 7책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 – 운현궁
*당시 고종이 즉위하고 세도정치로 변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상감은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아 계씨 성은 하사하게 되었고, 상감은 즉위 4년만에 얻은 아이를 원자로 책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중전이 아들을 낳은 경우를 생각하며 천천히 생각해보기를 권유했다.
이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판을 쳤는데, 이들은 장동 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을 이름을 부를 때 더러 음을 줄여 자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급하게는 장동으로 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장동 김씨의 선조인 김상용, 김상헌 등은 후덕하고 능숙한 일처리로 박수를 받아왔으나, 후세의 참욕과 교만으로 외척이 나라를 망치는 기틀을 이루어놓았다고 한다.
장동 김씨 중에는 김훙근이 일찍이 헌종 시절에 극력 간쟁을 하다가 유배형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철종은 후사가 없이 죽었다. 김훙근은 김씨들이 금상을 끌어드려 세우려하니, 흥선군이 있으니 그를 왕위에 앉히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당시 ‘김병학’은 자신의 딸을 중전으로 간택하기로 흥선군과 약속을 하였으나, 상감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군은 대원군이라는 존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어 병학과의 약속을 깼다. 그는 민치록의 딸로 국혼을 정해버리니 이분이 바로 명성황후이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시작할 때 쯤 김훙근은 사친은 정치에 간여하지 않기를 청원했으나 곧 내외의 대권이 모두 대원군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원군은 김씨 중에서도 훙근을 가장 미워했으며, 그의 농장 십 경을 빼앗아버렸다. 드디어 운현궁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이때를 세도 정치의 시대라 하며, 대원군도 운현에 살기 때문에 운현이라 부른 것이다.
2장 – 흥선대원군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되고 나서 이룬 그의 업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제도는 교서를 내릴 때에는 반드시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로 시작했는데, 이때의 십년 동안은 다만 ‘대원위 분부’ 다섯 글자로 시작하였으며 이 제도가 유행하다가 갑술년 친정이 시작된 다음에야 옛날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인들은 숙종 이후부터는 벼슬을 못하게 자격이 박탈되어 있었는데, 남인 출신이었던 흥선 대원군은 집권 후 남인과 북인을 숭상하고 등용했다. 이미 노론이 자리를 차고앉아 있어 그들을 다 제거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에도 관직에 있는 사람의 총수는 노론이 남인 북인을 합한 수보다 많았고, 전체의 삼분의 이를 점하는 실정이었다.
경복궁은 자주 화재를 입어쏙, 임진왜란 때 병화에 불탄 이후로 황폐한 채 보수하지 않았다. 금상 을축년에 중건을 시작하여 몇 해만에 끝마치니, 웅장한 자태에 놀라웠다. 하지만 재원부족으로 팔도의 부자들을 골라 간축비용을 할당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납전이 그 예이다. 이 떄문에 파산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백성들은 “바치기를 원하는 원납(願納)이 아닌, 원망하며 바치는 원납(怨納)이다”라고 말하며 혀를 내둘렀다.
대원군은 젊은 시절 서원을 맟은 선비에게 곤욕을 당한 적이 있어 정권을 잡은 후 그 선비를 죽이고 서원을 철폐해 버렸다. 당시 처분되어 남은 서원과 사당이 48군이며, 남은 곳은 모두가 문묘에 배향된 명현이거나 국가에 큰 공훈이 있는 분들을 모신 서원만을 남겨놓았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로, 남연군의 말을 듣고 전 재산을 팔아 2만 냠을 만든 다음 그 반을 주지승에게 뇌물로 주어, 남연군이 가르친 절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당시 3형제의 형들은 탑신의 꿈을 꾸며 이곳을 떠야 한다고 하지만, 혈육 한 점 없는 흥선은 두려워않고 탑을 부수게 되었다. 이 곳은 남연군의 묘가 되었고, 모두들 그 곳은 꿩이 알을 품고 앉은 복치형의 명당이라 말하며, 그 14년 후에 금상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운현궁 부대부인 민 씨는 대원군과 금슬이 매우 좋았다. 갑자년 이후 사대부와 내명부 과부들을 불러 모으는 자리에서 대원군이 여인들을 골라 음욕을 채우도록 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세상의 눈총을 받는 일이 있었다.
요즘 사투리에는 “도모지(도무지)”가 있는데 이는 말의 첫머리에 사용되는 단어로, ‘한마디로 말해서 대체 누가 알 것인가’라는 뜻이다. 이 때 당시 운현궁에서 실권을 잡으면서 형벌시행이 과감하여 천주교도와 화폐를 밀주조하는 사람 이외에도 비방에 연좌되거나, 잘못에 연루되어 죽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운현궁이 잘한 일 3가지를 언급했는데, 첫째는 귀한 사람 천한사람 구분없이 모두가 균등하게 장정 한 사람당 해마다 두 냥을 납부하도록 개혁하고 동포전이라 불렀다. 둘째는 동포전이 시행된 후 곡식 한 섬당 3냥으로 한정되었다. 이에 동포와 와환이 시행되면서 백성들은 차차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당백전 제도인데, 매 호당 2냥씨을 관에서 지급하되, 그 돈을 밑천으로 백성들은 쌀 한 섬씩을 수납하여 마을에 저장하고 백성들이 맡아서 관리하게 하며 관리들의 손이 아닌 봄에 방출 가을에 수납함을 환곡과 동일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 나오는 돈이 바로 당백전이다.
병인년 9월 병인양요가 발발했다. 모두가 강화를 바라만 볼 때 양헌수는 나서 싸우기를 자처했으니, 원희는 포수 삼백을 내주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헌수는 황해병사에 발탁되고 일 년 만에 대장이 되었다. 난이 끝난 다음에는 사학을 금지하고 개화를 반대하는 ‘위정척사’의 왕명을 반포하였다.
신미년 여름엔 미군이 강화를 침범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니, 전 병사 ‘어재연’이 순무중군으로 이를 방어하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을 과거를 강화도에 시행하라는 명을 떨궜다. 건창이 급제하여 대원군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대원군을 농으로 어린 나이이니 책을 읽고 있으면 5년 후에 한림으로 등용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5년이 지나고도 감감무소식이자 이건창은 대원군에게 불평했고 그는 경박하다 하여 등용하지 않았으나 갑술년 이후 그의 관직생활이 거ㅣ낌 없음을 보고 자못 후회했다고 한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규수는 신미양요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이 있으며 이일이 보고되어 규수는 직급이 오르고, 군교는 공을 인정받아 진장이 되었다고 한다. 규수는 행정능력이 뛰어나고 문장이 아름다워 당시에 쓸 만한 인재로 추앙받았으나 다만 대원군이 집권할 때에는 힘써 서양을 배척했다가, 갑술 년 이후에는 왜인과 통상할 것을 주장하여 우물쭈물 시의에 영합하니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대원군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이를 안 대원군을 노하여 익연을 호조참판에 발탁하니, 익현은 이를 사양했다.
대원위분부. 대원군이 집권한 십년 동안 이 다섯 글자가 삼천리를 휩쓸었다. 서울 올라간 시골사람은 잡혀가면 바로 죽는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로 흥선의 두려움은 커져갔다. 흥선이 집권한 10년동안 큰 업적은 이룰만한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놓쳤다.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좋은 제도를 연구하고 씀씀이를 절약해 백성들을 사랑하고 측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였는데 부족했다. 대원군은 장동 김씨의 부귀에 침을 흘리다가 권력을 얻고 난 뒤 무절제하고 멋대로 날뛰어 그들을 눌렀으며 토목사업과 당파 편들기로 시간을 흘려보냈으며 백성에게 원한을 심어주는 이 점이 가장 한탄스럽다!
3장 – 고종의 친정과 민씨의 세도
갑술년에 상감의 친정이 시작되자, 안에서는 명성왕후가 주관하고 밖에서는 민승호가 받들어 시행했으며 도리어 점점 상감이 제약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승호는 운현궁이 독단 일삼다가 실권한 선례를 바로잡으려고 상감에게 권하였다. 그는 안으로는 상감의 독단을 막는다는 핑계를 대고 겉으로는 소론을 끼워 넣음으로써 세도의 흔적을 가리고 노론에 대한 비난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민승호는 천성이 유약하고 어리석으며 건망증 또한 심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조정대사를 맡게 되어 나라를 어지럽게 하니, 정치판에는 쥐구멍이 생겨 권력은 옆길로 새어 나가게 되었다.
원자가 탄생하면서 궁중에는 빠른 속도로 소문이 퍼졌다. 이를 위한 잔치로 하루에 천금을 다 써버리니 운현궁이 십 년 동안 비축한 것이 탕진되었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급제를 파는 여러 가지 폐단이 시작되었다.
당시 벼슬아치였던 김보현, 김병시, 윤자덕, 신정희, 정기세, 이유원과 박규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쓰고 있다.
이어서 민승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병자년 봄에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여 상감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동시에 민승호 집에 불이나 승호가 타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운현궁 쪽을 가리켰다고 한다. 훙인군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한 때에, 왕후는 운현궁이 훙인군을 원망해서 한 짓이라 한다.
민규호는 태호의 아우로 왕후에 눈에 띄어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 민규호는 접은 시절 매우 가난하여 형과 함께 살며 장사를 하며 살았다. 당시에는 권력은 황산이 글씨는 추사를 추앙했으니 이들을 사모하여 규호는 스스로 황사라 했다. 명성왕후는 씀씀이 부족이 걱정되어 드디어 수령 자리를 팔기로 하고 규호에게 관직의 가격을 정해달라고 부탁했다. 매관매직 하려는 경쟁자가 많아질수록 백성들을 더더욱 고통스러워했고 규호는 비로소 이를 후회했다.
이어지는 민씨의 세도에는 민영익과 김병덕이 언급되었다. 병덕을 시험관에 임명했고 그는 지시한대로 영익을 뽑았다. 당시에도 문과와 무과, 소과에 따라, 권력과 기수에 따라 괴롭힘이 지속되었었다. 민영익이 관직에 들어가는 1년 만에 통정의 직급에 뛰어오르니 당시 전하 내외의 총애를 받던 민규호는 화병이 나 약을 달고 살았으며 곧 겨울에 사망했다. 왕후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조정의 기강과 전례, 문벌의 높낮이를 모두 암기하고 있었으니, 인현왕후에게 충성을 바쳤던 인물의 자손을 비록 영락했더라고 끝까지 찾아 발탁했으며 모든 소론과 남인의 엄격한 논의를 일으켰던 가문을 일체 배척했다.
우리나라에 천연두의 존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당시 옆 사람을 감염시키는 종두가 발생했다. 근세에는 우두법이 서양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에 파급되어 이미 수십 년을 성행했으나 우리나라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하고 지냈다.
영은문을 헐고 삼전비를 넘어뜨리니 9월 17일 계묘 일에 상감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정했다.
4장 – 암행어사
*암행어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암행어사는 직지․수의라고도 부르는 조선조의 독특한 제도이다. 16세기 지방의 비리가 계속되자 마침내 암행어사라는 관직이 제도화 되었는데 암행어사라는 명칭은 중종 4년 11월에 기록에 처음 나타나며, 성종 말기에 시작되어 이때에 공식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암행어사가 활성화되어 숙종에서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운영방안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판서 이시원은 성품이 강직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나 관리로서의 능력이 탁월하여 첫 부임지 태천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낙향하였다가 다시 경기 어사로 발탁되었는데 한 때 ‘십준팔초’의 민요가 있기도 했다.
어사 이건창은 가을에 빈민 구제를 살피고 탐관오리를 가려 탄핵할 시절에 나타났다. 그는 하찮은 젋은이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굳게 풍모를 지키려는 처지였으니, 민규호는 그를 함부로 인명을 해친다고 무고하여 벽동군에 유배시켰다.
이면상이 주진독리가 되어 천진에 부임하였다. 그는 전라도 어사가 되어서는 기생과 악기에 돈을 탕진하고 불량배 수백 인을 몰고 다니니 이를 ‘어사난리’라고 하였다. 면상은 각 고을에서 징수한 돈을 왕의 밀명으로 각 사찰에 실어 보내 왕실의 푸닥거리 비용에 충당하였다. 또한 세력 있는 관리와 부자의 명단을 만들어 그들의 제물을 긁어모았다.
5장 – 과거시험
*근세의 과거시험의 형태와 당시 매관매직 하던 관리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조선왕조 말엽에 대과로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그 종류가 매우 많았다. 동당과, 중광과, 정시과, 알성과, 도기과, 일차과, 응제과, 별시과, 충량과, 윤차과부터 종친과까지 다양했다.
옛날의 정시과는 시험 입장이 매우 엄격하였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서 조정의 기강은 날로 문란해 가고 과거제도 또한 날로 해이해지니, 과거 시험장은 시장판이 되어 시끄럽고 교활한 자는 옆 사람의 답안을 훔쳐보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관들은 정신이 피곤하고 눈이 어지러워 다 채점을 하지 않고 무작위로 답안지를 뽑아 채점할 뿐이었다고 한다.
소과에는 식년과, 증광, 승보, 복시, 공도회, 응제초시가 있었다. 먼저 시와 부를 시험하기 때문에 그것을 초장, 하루 걸러서 의의를 시험하기 때문에 종장, 회시에 합격한 사람은 초장 종장을 막론하고 모두 진사라 부른다. 옛 제도에는 수령이 고을의 초시 응시자를 모아 소학을 강하게 하고 이를 통과하는 자만 응시토록 하였으니 이를 조흘강이라 한다. 또 쪽지첩을 만들어 증빙으로 발급하고 이를 조흘첩이라고 하였다. 금상치세의 갑술년에 이르러서는 폐단이 날로 극에 달해 자리를 사는 일마저 없어지고 함부로 들어가도 금하는 이가 없으니 술 팔고 엿 파는 사람도 거의 선비들이었다.
중국에서는 응시자의 정원이 존재했는데 시험장에 들어서면 복도처럼 늘어진 곳에 한 명씩 가둬놓고 시험을 치뤘다. 서울에서는 시험은 일정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성균관이나 비천당, 혹은 예조에서 실시하였으며 회시 또한 그러하였고 그 격식은 외도에서 실시하는 것과 비슷했다.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의 시험관은 상시관 부시관 삼시관 각각 1인을 보내 3명의 시험관들이 모두 의견을 모아야한다. 처음에는 시험장에 폐단이 늘어나는 것 때문에 감사의 감사의 직위가 높고 위엄이 컸으나 감사들은 도리어 직위가 높음을 기화로 맘대로 벼슬을 팔아먹었으니, 오히려 명망 있는 경시관들이 처음 나왔을 때 보살피고 돕던 일에 미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초시의 매매가격이 이백 냥 또는 삼백 냥으로 같지 않았고 오백 냥에 이르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경시관이 나가는 지방은 관서와 삼남 네 자리만 남게 되었으니, 그리하여 4개도를 사색당파에 나누어 배분하기에 이른 것이다. 경시관은 녹봉이 없고 다만 반비전 팔백 냥을 하사할 뿐이었으므로, 합격 방을 내건 다음에 묵권을 거둘 때 수수료를 징수하면서 이를 낙폭전이라 불렀다. 회시에 응시하려고 대기하다가 기공 이상의 중한 복을 입게 되면 증빙을 첨부하여 예조에 연기를 신청하고 다음 식년까지 기다리는 제도를 진시장이라 한다. 응제과에서는 다만 대과에서 한두 사람을 선발하고 말았는데 갑술년 이후에는 대과 소과를 겸하여 선발했고, 사람들은 응제소과 급제자를 삼전진사라 불렀다.
우리나라 신분제도는 문벌을 정한 품계가 있었으니 서울이 더욱 심했다. 사대부는 하나의 계급을 이루어 관직을 생업으로 하고,. 중인은 하나의 계급을 이루어 역관을 생업으로 하며, 상사람 또한 하나의 계급을 이루어 상업과 심부름꾼 그리고 노비를 이룬다. 이런 제도는 수백 년을 내려오며 뚜렷하게 존재하여 서로 섞이지 않ᄋᆞᆻ다. 때문에 과거는 남의 일이 되어 상으로 주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진사는 관직과는 관계없는 깨끗한 명예임으로 갖고 싶었으나 이에 이를 길이 없어 오직 갈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과와 무과의 계층이 달라지면서부터 시대에 따라 높낮이가 존재했으나 하늘과 땅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난 적은 없었다. 시험으로 선발하는 방법은 대소과와 비슷하여 별시과, 증광과, 알성과가 있는데 이것은 문과와 동시에 실시하는 경우이며, 식년과가 있으니 이는 문과의 명경과가 있는 것과 같다. 지방의 병영과 수영에서 도시과를 실시하는데 이는 관찰사가 실시하는 선도회와 같은 것이다. 무과를 처음 제정했을 때는 그 규정이 매우 엄격했다. 근세에는 무경을 강하는 일을 폐한지 오래되었고 승마와 활쏘기는 사람을 사서 대신하거나, 활쏘기도 없이 합격자 발표를 하는 경우도 있다.
갑오년 식년 소과에서 생원 진사 총 1300명의 합격자를 발표했다. 상감이 내탕금 부족을 걱정하여 식년마다 백 명을 더 선발하여 돈 바친 사람들을 원방에 붙여 발표하면서 원방진사라 불렀다. 또 80세 이상 늙은 초시 합격자를 모두 섞어서 합격방 끝에 붙여 발표하고 은전진사라 불러 조정 안팎을 위로하려 하였다. 선비들은 난리가 두려워 서둘러 돌아가는 바람에 백패도 못받고 난삼과 두건도 갖추어 입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이들을 공명진사라 불렀다.
6장 – 매관매직
*당시 어지러운 사회에서 매관매직이 끊이지 않았음과 백성들의 분노를 담았다.
을유년 식년과인 생원과 진사의 회시에서 상감은 합격자 일백 명을 더 선발하여, 이만 냥씩을 받고 팔되, 원래의 정당한 합격자는 공정하게 선발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시험관인 심이택과 민종묵 등이 뒤섞고 혼탁하게 만들어서 공정하게 선발된 합격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진사를 더 선발하여 드러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다. 이때는 한 해 걸러 증광시, 한 달 걸러 응제시가 있고, 거기에다 식년과까지 있어, 그 중에서 열에 아홉은 돈 냄새나는 과거가 되었다. 상감은 “여러 말 하지 말라. 조선 말엽에는 마을마다 급제요 집집아다 진사라는 속담을 들어보지 못했느냐? 그 천운을 어찌하고 내가 벼슬을 팔지 않는다고 더 나아질 것이란 말이냐?”하고 말했다 한다.
좌의정 김병시가 상소를 올렸다. 당시 외직은 감사, 유수, 병사, 수사는 물론이고 수령, 진장에 이르기까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며, 돈을 많이 낸 사람이 진정한 벼슬아치가 되었다. 서울의 벼슬아치도 매매가 적은 곳은 문관의 관직뿐이었고, 음직으로 처음 벼슬하는 도사, 감역, 참봉, 감찰 등의 벼슬은 우열에 따라 값의 고하가 결정되었으니, 이를 한 판의 술값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시골 부자들이 진정으로 벼슬을 받아 출세하기를 원해서 덤볐으나 조금 지나자 자주 험한 꼴을 다하게 되는 것을 보며 서로 피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반역을 생각하게 되고 한 번 떨쳐 일어나 소리치는 자가 생기면 따르는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수령을 쫓아내는 수가 해마다 수십 곳에 달했으니 이것을 백성의 소요라 부른다.
민씨 척당의 수령인 민영준은 동학의 번성은 예절이 바로 서지 않아 풍속이 퇴폐한 때문이라고 외치며 백성들을 매질했다. 또한 나이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쌀과 고기를 하사하며 수직으로 통정과 가선 등의 직첩을 내리고, 삼십 냥씩을 거두어 드리면서, 자손들을 옥에 가두어 독촉하니 노인들은 우선 꾸어서라도 변통할 수 밖에 없었으며 기것을 노인 난리라 불렀다.
7장 – 말세풍경
조선 후기 어지러운 사회에서 발생하는 해괴한 사건들을 담았다. 거짓 장례, 감생청, 진령군이 된 무당, 마지막 성균관유생, 전주 감영의 아전들, 서울에서 화적때가 들끓었던 일, 제주의 민란 등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8장 – 일본의 침략
병자년 정월 왜인이 조약을 어기다. 그들은 구로다가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와서 온갖 협박을 하며 전쟁을 일으킬 형세를 취헀으나 그등은 강화협정을 개정하려는 심산이었다. 이때 그들에게 승복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니 강화도조약이다.
개항 이후로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 물품은 가격이 매우 싸서 상인들이 이를 전매하여 많은 이들을 챙겼다.
임오년 6월 9일 서울의 군영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이다.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나리를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는 군대의 급료를 미지급한 지 반년이 넘었던 때라 마친 호남에서 세곡선 몇 척이 도착하여 군대의 급료를 우선 지급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당시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군대의 급료인 쌀에다 쌀겨를 혼합하여 이득을 취했다. 이를 안 군인들은 겸호를 죽였다. 이 해 봄에는 장정들을 모집하여 일본식 군대훈련을 하던 별기대가 존재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교동에 공사관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공사가 되어 서울에 주재하면서 김옥균 일당과는 날로 친밀해졌으며, 옥균 등은 두터운 친분으로 공관 이전을 성원하여 자신과 가까운 곳에 옮기도록 유인하였다. 유생 홍종우는 상하이에서 이런 김옥균을 단죄하였다. 그는 옥균을 죽여 나라의 우환을 제거하려 계호기했으나 그들의 동료가 너무 많아 시행하지 못했다.
봄철 2월 22일 기미일 밤에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거듭 울렸다. 동학농민봉기의 시작을 알리기 울음소리 같았다. 전봉준은 집이 가난하여 일정한 직업이 없고, 오랫동안 동학에 물들어 늘 불만이 가득하여 지냈다. 민란 초기에 군중이 수령으로 추대하였으며 곧 그의 동료와 함께 대사를 모의하고 백성들을 끌어당겼다.
이에 앞서 을해년에 왜국과 맺은 강화도조약 제 1조 에는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서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였는데 청국은 이를 알고도 불문에 부쳤다. 을유년의 톈진조약에서는 ‘이후 조선에 일이 생겨 중 일 양국이 파병을 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서로 통지해야 한다’를 넣었다.
일본공사 오토리가 서울로 돌아올 때 수군제독 이토와 육군소장 오지마가 뒤따라 왔다. 오토리의 입성 이후 정부에 대한 협박이 날로 심해지자 정부는 “병자수호조약 제 1조를 보면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본국은 체결한 조약의 준수 실행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우리나라의 내치와 외교의 자주권에 대하여는 중국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라는 화답을 보냈다.
시모노세키조약은 청국과 왜국의 강화조약을 의미한다.
-시모노 세키조약
①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②타이완섬 전체와 성경남부 랴오둥 일대의 땅을 할양 한다.
③고평은, 청나라 표준저울로 2억 냥을 전비로 배상한다.
④ 통상조약을 개정한다. 이와 같은 조약이 이달 23일 갑오에 체결되었다.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개화 이후 일본에 휘둘리는 상감의 모습을 왕후는 분하게 여겼고 왕권 회복을 위해 은밀히 러시아와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하지만 유길준과 박영호 무리가 일본으로 넘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는 모의 결과가 나왔다. 8월 20일 무자일 일본공사 미우라가 범궐하여 왕후 민씨를 시해하였다.
9장 – 을사년과 그 이후의 역사
*을사년 이후의 우리나라 신하들의 상반된 모습과 더불어 러일전쟁 및 을사늑약 등을 담고 있다.
정월에 최익현을 경기 관찰사에 임명하다. 각 항구를 왜인에게 저당 잡혀 일천만 원을 차관하였다. 국가재정의 부족을 외국에서 차관함은 불가하다 하여 나라 안팎에 통고하여 인간의 의연을 요청하고 이것을 ‘자원민재’라 부르니, 왜인들이 이들을 붙잡아 심문하고 10일을 구금한 다음 통문을 회수해 버렸다.
일본이 헌병을 파견하여 경운궁 궐문을 지키기 시작했다. 민영환이 참정이 되어 누차 엄히 물리칠 것을 청원하였으나 듣지 앉ㅎ다가 마침내 왜인이 파병하여 금지하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멈추지 않았다. 왜인들이 내시의 감원을 주청하니 모든 환관들이 모여 통곡하였다.
왜인이 최익현을 강제로 포천으로 돌려보낸 사건도 발생했다. 왜인들은 익현이 거듭 상소 올리기를 그치지 않으니, 치안 유지에 심히 방해된다고 여겨 들것에 실어 포천 집으로 돌려보냈다.
서울에는 청년회와 헌정연구회가 있고, 삼남에는 공진회가 있었다. 청년회는 예수를 구세주로 여기는 종교단체이고, 헌정회는 구미의 입헌정치를 본받으니 모두 서양학문에 물든 사람들이며 공진회는 일진회를 배척하여 일어난 모임이다.
의양군 이재각을 대사로 임명하여 일본의 뤼순 승전을 축하하였다. 왜국의 승려가 서울 명동에 정토종교회를 창건하였다. 각 항국에 유민의 출항을 금지하는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 왜인 다이테이는 궁핍한 우리 백성들을 속여 남녀 수 천 인을 싣고 멕시코에 들어가 노예로 팔았다. 우릭 군대의 정원을 감축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은 서울에 거류지를 만들어 동을 정으로 바꾸어 부르는 등 서울 거리의 명칭을 바꾸기도 하였다. 왜인들이 강압으로 요청해 온 내륙 하천의 자유 운행을 허가하였다.
러시아가 ‘쓰시마’해협에 들어와 왜군을 습격하니 왜군이 이들을 맞아 싸워 대파하였다. 이를 러·일 해전이라고 한다. 주영 공관의 참서관 이한웅이 자살하다. 왜국은 지난해부터 스스로 우리나라의 보호를 담당한다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 구미 각국에 전파하니 그곳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되었으며, 런던에서 어떤 자가 ‘이한웅’을 망국의 백성이라 놀렸다.
왜인이 서북 지방 통치를 관장하며 강제로 제정한 3가지 규약.
⑴지방관의 임면은 반드시 사령부에 통지하여야 한다.
⑵각 군수의 부임에는 반드시 사령부의 문서 증빙을 휴대하여야 한다.
⑶서북광산과 삼림은 사령부의 인가 없이 채굴함을 불허한다.
왜인이 각 도에 지금고를 새우다. 관리들은 앉아서 배의 이익을 챙겨서 나라와 백성을 병들게 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평화협정에 들어섰다.
복은 입고 집에 머물던 한규설을 불러 참정에 임명하였다. 그는 근년에 들어 서울의 천박한 무리들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어보고 싶어 미친 듯이 날뛰는 가운데 이 명령이 마침 순명왕후의 복이 끝나는 시점에 있게 되었다.
전 참서 김택영이 바다를 건너 청국을 들어갔다. 앞서 상하이 사람인 장지엔이 우장칭을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영택과 사귀게 되었고 그 뒤에 둘은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13일 왜국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왔다. 일본은 ‘히로부미’를 우리에게 파견하여 정권을 박탈함으로써 영원히 청국의 희망을 끊어버릴 계책이었다. 한편으로는 고무라를 청국으로 보내 위안스카이와 담판하도록 동시에 출발하게 했다.
21일 밤에 왜인이 범궐하여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고 참정 한규설을 면직 유배시켰다. 당시 이완용, 이근택 등이 몰래 관망하며 숨어서 계략을 꾸민다고 지목하였다. 이날 밤 구완희 박용화 등이 왜인을 인도하여 궁궐 담장에 빙 둘러 대포를 매설하였고 서명날인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사늑약이다. 당시 상감은 공포심에 두려워하였고, 한규설은 분개하여 날인하지 않았다. 그는 강제조약 체결에 굽히지 않고 한결같이 분개하여 울부짖으니, 히로부미는 왕명을 사칭하여 한규설에게 3년 유배형을 내렸다. 이 시절에 횡성신문이 폐간되었다. 사장 장지연이 늑약의 시말을 그대로 실어 서둘러 발해해 버리니 히로부미가 대노하여 지연을 구속하고 서둘러 신문사를 폐간시켰다.
이런 을사늑약의 참담함을 들은 전 참판 홍만식, 민영환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결하기 시작하였다. 특진관 조병세, 평양에서 올라온 부대의 상등병 김봉학 등 줄을 잇는 순국선열이 계속되었다.
10장 – 의병활동
각 도에서 크게 의병이 봉기하였다. 강제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는 왜놈을 죽이자는 함성이 끊이지 않기 시작했다. 울릉도 바다 동쪽 백 리가 되는 거리에 독도가 있는 데 예부터 울릉도에 소속된 섬인데 왜인들이 강제로 저희 영토라 주장하며 조사해갔다.
의병장 민종식은 의병을 데리고 홍주에 입성하였다. 앞서 왜인들은 홍주의 성곽이 믿을만하다 생각하고 포병 약간 명을 주둔시키고 대포 십여 문을 매설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종식의 소유가 되었고 이에 힘입어 부대를 편성하고 방어하게 되니 그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부의 적인 아전이 의병이 반드시 패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들이 숨어있던 동문을 몰래 열어 왜병을 불러들였다. 종식은 정예병을 골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고 한다.
전 판서 최익현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익현은 당시 왜인들의 감시 하에 살았기 때문에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낮에는 누워있다 왜인들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변복을 하고 빠져나와 임병찬을 만났다. 익현은 사람을 모집하여 왜국 영사관에 문서를 전달했는데 전달 책임을 맡은 사람이 두려운 나머지 왜군 사령부 정문에 붙여 놓고 도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왜인들 사이에 이 문서 내용이 전파 되었으니 그들이 돌려가며 읽어 보았음을 알 수 있겠다.
20일 순창에서 의병이 패전하고 ‘최익현’은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21일이 되어 전주대가 접근하여 익현과 12인을 함께 끌고 올라가 사령부에 가두었다. 그는 수백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기에 패전을 한 것이었다. 그가 패전을 하자 창부나 걸인도 목이 쉬도록 소리쳐 한탄하고 최충신을 살려 달라고 백정들과 무당까지 모두 하늘에 호소하였다고 한다.
의병장 민종식이 구금되기도 했다. 겨울 10월에 의병장 민종식과 전 참판 이남규를 김가진이 붙잡아 서울로 송치하였다. 그들의 의병봉기를 도모하려 남규의 집을 내왕했는데 이를 미행하던 충남관찰사 김가진이 그들을 붙잡아 사령부에 송치하였다.
호남과 호서에서도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그들은 가진 무기 하나 없어 그들의 소 한 마리와 양총 한 자루를 맞바꿨다고 한다. 경북의 의병장 임성기와 하덕근이 구금당하여 해를 넘기다가 지방 진위대에서 처형 되었는데 ‘성기’는 임종에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으며 떠났다고 한다.
감상
매천야록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저번에 인터넷 프로그램을 보던 중 명성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 한 후, 옆에 “황현<매천야록> 中”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때, 명성황후 혹은 조선 말기의 모습을 나타냈구나 싶었다. 지금 우리가 역사책에서 많이 배우던 역사를 기록한 책이 바로 매천야록이다. 국세부터 시작하여 벼슬아치, 노동자, 백정까지 다양한 계층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고 생생하게 적어두려고 노력한 것 같다. 솔직히 써머리를 작성하려고 책을 읽었을 때, 단순히 과거 역사의 흐름대로 구한말의 상황을 서술한지라 요약하기 어려웠었다. 하지만 황현은 제재가 많았던 당시 신문을 보며 보고 듣고 책을 완성하였다. 매천야록은 역사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자신의 눈으로 명성황후의 안 좋은 습관과 흥선대원군의 탕진 등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번역하여 옮긴 책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고종 시절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이고 어떻게 일본에 지배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질문이 풀린 것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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